부르르 떨게 싸늘했다가, 맹렬히 뜨거워졌다가. 이곳의 바람 속을 걷다 보면 가끔은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아침에는 18도였는데 매시간 기온이 극적으로 치솟다 한낮에는 정말 일기예보처럼 42도가 되었다. 야외활동을 할 수 없어 종일 도서관에 있을 수밖에 없었다. 집 근처 센트럴 역 앞에 늘 앉아있는 노숙인이 안 그래도 걱정이 되었는데 다행히 오늘은 보이질 않는다.
점심을 먹고 다시 도서관으로 향하는 길, 라이브러리 역 입구에 그가 있는 게 아닌가. 역사 건물 밖으로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냉기를 따라 그는 오늘 자리를 옮긴 듯했다. 반가운 마음도 잠시, 이런 날씨에 거리에 사람은 없고, 이 더위 속에서 온종일 거리에 앉아있을 그가 자꾸 마음에 걸렸다. 후식으로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을 사 주면서 그를 위해서 하나를 더 샀다. 아이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자기가 건네주겠다고 나섰다. 아이들을 알아본 그는 쓱 웃으며 고맙다며 아이스크림을 건네받았다. 우리의 염려와 달리 괜찮다고 여유롭게 손 흔들어 보이는 그를 뒤로하고 우리는 서늘한 도서관 열람실로 향했다. 오늘 같은 날, 그도 도서관에 머물면 나을 텐데. 이상기온이 빈곤한 이들에게 더 악랄하게 다가오는 현실이 더운 바람처럼 내 마음을 답답하게 덮었다.
다음날 이곳의 바람은 선선했다. 전날의 뜨거운 바람을 통째로 날려버린 듯 말이다. 장거리 투어에 참여하기 위해 평소보다 일찍 일어나 집을 나섰다. 밤늦도록 이어지는 버스킹, 늦도록 깨어있는 젊은이들의 고성과 경찰차의 사이렌 소리로 혼재된, 잠들지 않은 중심가의 소음은 새들의 지저귐으로 말갛게 씻어내고 아침을 맞이했다.
서울-부산 구간 정도의 그레이트 오션 로드 초입을 다녀오는 투어였는데 때마침 적당한 구름과 그 구름 사이를 비치는 햇빛에 바다색은 투명한 청록색과 하늘색으로 어우러져 수평선 저 끝까지 윤슬로 반짝이고 있었다. 깎아지른 석회 지층이 해안절벽에 우뚝 서 있는 그레이트 오션 보다도, 나는 소금기 머금은 해풍을 맞고자란 덤불들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쑥설기에 들어간 쑥처럼 희끗한 풀색의 관목, 연초록의 잎들, 짙은 상아색의 가는 철사줄 같은 풀들이 빚어낸 묘한 색감의 그 아늑한 풀숲으로 자꾸만 내 걸음은 옮겨졌다.
다음날 또다시 달궈진 멜버른 시내. 지구 대 재앙의 날처럼 뜨거운 바람이 종일 거리를 휩쓸었다. 그제의 42도가 그저 그늘이 없는 곳에 훅 끼치는 더운 열기였다면 오늘의 43도는 고온으로 웍에서 조리하는 중식당 환풍구의 열기를 모아서 일제히 거리로 내뿜는 수준이었다. 하늘은 흐리고 거리의 먼지들이 소용돌이를 일으켜 눈을 제대로 뜰 수가 없었다. 이런 날에 어딘가에서 잠깐의 실수로 불씨가 옮겨 붙는다면 이 도시가 화염에 휩싸이는 건 순식간이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무섭기도 했다.
그 와중에 큰 아이는 오후에 클로에 집에 초대를 받았다. 클로에 엄마께 초대해 주셔서 감사하다고 인사를 드리고 나는 작은 아이와 카페 데이트를, 드디어 플랫화이트를 마셔보리라 꿈꿨지만 클로에네 집까지 가는 불과 몇 백 미터의 거리를 걷는 동안 우리의 얼굴은 붉게 타 올라버렸다.
클로에 엄마는 들어와서 열을 식히라고 괜찮다 하셨고 펜트 하우스의 시원한 대리석 바닥에 발을 디딘 나는 어쩔 줄 몰라했다. 바깥의 기온은 좀처럼 떨어질 줄 모르고 작은 아이는 불구덩이 같은 밖으로 나가기 싫다고 하고… 내리 3시간 동안 짧은 영어로 어색함과 미안함을 무마하려고 나는 계속 긴장을 했다. 그러다 보니 아직까지 멜버른에 와서 플랫화이트를 마셔보지 못했다는 아무 말 대잔치를 시작했다. 이미 레모네이드로 목을 축였는데 클레어 엄마는 전혀 어려운 일 아니라는 듯 이어 플랫화이트를 내려 주셨다. 밖에선 아이스 롱블랙을 마셔도 탈진할 것 같은데 아늑하고 쾌적한 이곳에선 따뜻한 플랫화이트라니. 경황이 없었지만 커피는 고소했고 오늘 밤은 잠들기 글렀다 생각하며 홀짝홀짝 맛있게 마셨다.
여유로운 집에 초대받아 과분한 시간을 보내고 돌아오는 길, 나에게도 그런 넉넉함과 멋스러움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까보다 한 김 식은 지열을 밟으며 생각했다.
정상을 되찾은 수은주와 함께 다시 평화롭게 맞이한 주말 아침, 오전에 일찍 동물원을 가려고 트램을 탔다. 오늘도 역시나 하차할 정거장을 지나쳐 내렸지만 덕분에 신선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한적한 동네를 거닐었다.
멜버른 동물원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코알라가 아닐까 싶다. 적어도 머나먼 한국에서 온 우리들에겐 말이다. 나무 가지에 웅크린 채 아슬아슬하게 꾸벅꾸벅 졸고 있는 그 둥그런 회색 털뭉치를 바라보며 무해한이란 단어가 절로 떠올랐다. 어릴 적 친구들과 쎄쎄쎄 하며 불렀던 ‘숲 속에 사는 코알라, 아무것도 모르는 코알라, 코, 알, 라’란 짧은 노래 속 코알라만큼 지금 내 눈앞의 코알라를 잘 설명해 주는 문장이 있을까. 사십여 년 후 코알라의 고향에서 코알라를 이렇게 조우할 일은 꿈도 꾸지 못한 채 아무 뜻 없이 노래 박자에 맞춰 친구와 손뼉을 치던 그때가 문득 아련하게 밀려온다.
미동도 하지 않고 인형처럼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코알라. 산들바람만 솨솨 하고 가지에 매달린 나뭇잎을 흔들어 깨운다. 꿈을 꾸고 있는 건 눈앞에 단잠에 빠져있는 코알라가 아니라 어쩜 나일지도 모르겠다며 나는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