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의 작은 빵집, 해피데이
세상엔 무수한 빵집이 있다. 백발이 성성한 할아버지가 불편하신 한쪽 다리를 느리게 끌며 빵을 굽는 우리 동네 착한 빵집. 나는 이곳의 빵을 좋아한다. 눈물로 마스카라가 얼룩져 흘러내린 여인의 뺨처럼 해피데이 빵집의 핑크빛 간판은 시커먼 빗물이 흘러내린 자국 그대로를 간직한다. 그러면 어떤가. 이 집 빵 싸고 맛있는데.
신새벽에 공항버스를 타러 나섰던 어느 날, 깊이 잠든 동네는 고요했지만 어두운 거리에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이 딱 한 군데 있었다. 해피데이 빵집이었다. 아이들 등굣길에 언제나 빵 굽는 냄새가 솔솔 피어나 다른 가게들보다 일찍 하루를 여는 줄은 알고 있었지만 새벽 4시부터 깊은 어둠을 깨치고 반죽을 하고 계시는 할아버지를 유리문 너머로 본 그날은 존경심마저 들었다. 이곳에 족히 30년은 터를 잡고 장사를 하셨을 텐데 매일 새벽같이 나오셔서 빵을 굽는 어르신, 비록 ‘제빵 명장’이라는 화려한 수식어는 없을지라도 이 분이야 말로 진정한 장인이 아니실까 생각했다.
해피데이 빵집의 빵 구성은 특별할 것 없이 소박하다. 이제는 하나 둘 소리 없이 사라져 가는 동네 빵집에서 흔히 보는 빵들이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빵 반죽이 유난히 부드럽다는 것. 반죽으로만 승부를 봐야 하는 식빵, 모닝빵은 특히 그렇다. 솜사탕처럼 겹겹이 뜯어지고 손가락으로 살포시 누르면 손가락의 열기로 얇은 공기층이 빠져나가 빵 위에 지장이 남는다. 아이들은 잼도 버터도 없이 해피데이의 우유식빵을 앉은자리에서 몇 장씩 뜯어먹고, 모닝빵을 ‘구름빵’ 이라 부르며 구운 층을 한 겹 벗겨낸 그 폭신한 빵 속을 볼에 갖대 대기도 한다. 물론 건강을 생각해서 통밀이나 견과류가 들어간 빵들을 사기도 하지만, 거칠고 씹히는 게 많은 그런 빵이 채울 수 없는 포근함이 이 모닝빵에는 있다. 평소에는 현미, 귀리, 보리를 잔뜩 섞은 잡곡밥을 먹다가 어느 날 아무것도 들어가지 않은 갓 지은 흰쌀밥을 먹을 때 밀려오는 작은 감동처럼 말이다.
큰 아이가 친구 집에 놀러 간다 할 때는 빈 손으로 남의 집에 가는 게 아니라며 아이 손을 잡고 해피데이 빵집으로 향한다. 일 하는 엄마를 대신해 아이 친구의 등하교를 도맡아 하고 계시는 그 집 할머니께 드릴 팥빵, 완두앙금빵, 슈크림빵, 소보루, 카스텔라를 사서 딸아이 편에 들려 보냈다. 작은 아이 친구 엄마가 우리 동네에 온 날에도 근처 카페에서 신나게 수다를 떨다가 여기까지 왔는데 빈손으로 돌려보내기 허전해 해피데이 빵집을 들른다. 우리 집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닝빵을 그 집 아이들 간식으로 사서 손에 쥐어 보냈다. 아이들 등교 시키려다 내 아침을 챙기지 못한 날에는 작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고 돌아오는 길에 깨찰빵을 사오곤 한다. 물론 치즈모닝빵을 사는 것도 빠트리지 않는다. 오후 늦게 가면 다 팔려서 살 수 없는 해피데이 치즈 모닝빵.
내가, 그리고 나와 식성이 비슷한 딸아이가 해피데이 빵집에서 제일 좋아하는 빵은 치즈 모닝빵이다. 동그란 모닝빵을 2X5로 배열해 구운 길죽한 네모 모양의 빵인데, 열 알의 모닝빵이 서로 붙어있어 윗부분은 엠보싱처럼 올록볼록하고 그 위에 치즈가 뿌려져 있고 사선으로 마요네즈가 흩뿌려져 있다. 부드럽고 담백하면서도 약간 짭조름한 빵이다. 붙어있는 두 알의 치즈 모닝빵을 하나로 뜯어내고 그 옆을 빵칼로 가른 다음 에어프라이기에 3~4분 구운 뒤, 그 사이에 채 썬 양배추, 계란프라이, 후랑크소시지(혹은 베이컨, 슬라이스 햄 뭐든 취향껏)를 끼워 넣고 케첩 (더하기 스리라차 소스를 추천)을 뿌리면 간단하면서도 든든한 아침 한끼가 된다. 아침부터 빵을 먹으면 안 좋다는데 늦잠자고 맞이한 주말 아침, 빵 한입 와구 베어무는 행복마저 없다면 내 삶은 너무도 무미건조하겠지.
어제 외출하고 돌아오는 길에 보니 해피데이 빵집에 불이 꺼져 있고 선반의 빵들은 말끔히 치워져있었다. 유리문에는 A4용지에 ‘금주 수~일 휴무’ 라는 안내문이 붙여있었다. 혹시 어르신께서 어디 편찮으신 건 아니겠지. 어제 아침까지만해도 분주히 빵을 굽고 계셨는데. 앞으로도 해피데이 문지방이 닳도록 들락거릴 나인데 갑작스러운 휴무 소식에 괜스레 마음이 쓰였다. 오늘도 텅 빈 해피데이 빵집 앞을 지나며 할아버지의 안부가 궁금해졌다. 가만, 수요일부터 일요일까지니 닷새, 동남아 여행 가기 딱 좋은 날짜인데. 할아버지께서 추운 새벽부터 일어나 빵 굽는 일상을 잠시 접고, 따뜻한 나라에서 노곤노곤한 휴식을 즐기고 계시는 거였으면 좋겠단 생각을 했다. 다음 주 월요일, 나는 작은 아이를 유치원에 보내놓고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듯 해피데이 빵집을 들를 테다. 깨찰빵과 치즈 모닝빵을 잽싸게 쟁반에 담고선 반갑게 어르신의 안부를 여쭈어야지.
날은 추워지고 세월이 하 수상하니 모두의 안부가 궁금해지는 요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