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질문하고 그이가 쓴다
나는 무슨 빵일까? 내가 나를 어떤 빵이라고 정의하는 순간, 나는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잃는 게 아닐까? 적어도 동기들과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기 시작한 이 순간에 말이다. 나는 '자기란 무엇인가?' 같은 비슷한 류의 '나는 어떤 빵일까?'라는 질문을 차마 써 내려갈 수 없었다. 나를 가장 잘 아는 내 편에게 물어 그 입을 통해 나오는 이야기들을 받아 적는 수밖에.
가설의 행방을 결정하는 주체는 독자이지 작가가 아니다. 이야기는 바람과 같다. 흔들리는 것이 있어야 비로소 눈에 보인다.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은, 소설가에게는_적어도 나에게는_ 거의 의미가 없다. 그것은 소설가에게 너무도 자명한 물음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기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다른 종합적 형태로(즉, 이야기의 형태로) 치환해 나가는 일을 일상적 업으로 삼고 있다. 그 작업은 지극히 자연적으로, 본능적으로 이루어지므로 질문 자체를 구태여 생각할 필요도 없고, 생각한다 해도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혹시 '자기란 무엇인가?'를 장기간에 걸쳐 진지하게 골똘히 생각하는 작가가 있다면, 그/그녀는 본래적인 작가는 아니다. 어쩌면 그/그녀가 뛰어난 소설을 몇 권쯤 쓸 수 있을지는 모른다. 그러나 본래적인 의미의 소설가는 아니다. 나는 그렇게 생각한다.
무라카미 하루키 잡문집 p 21-22
최근에 알게 된 어떤 부부 유튜버는 그들의 일상 대화를 녹음해 영상을 만든다고 한다. 우리도 대화를 좋아하는 부부라 언젠가 한번 녹음해 봐야지 했다. 보통 내가 질문하고 남편이 조언을 한다. 일에 대한 팁일 수도 있고, 관계에 대한 해결책일 때도 있다. 대부분은 아이들의 반짝이는 순간을 주고받는 거지만. 이번 대화는 내 글, 나에 관한 것이기에 한 글자도 놓치기 싫어서_글의 분량이 나오지 않을까 봐_ 진짜 녹음을 했다. 잠깐 얘기한 거 같았는데, 5분이 넘었다. 남편의 말은 참 길다. 대개 단점으로 느껴지던 그 점이 오늘은 아주 맘에 들었다.
"내가 왜 피자빵이야? 모든 재료를 조금씩 넣어 만든 적당한 빵이라는 얘긴가?"
"그러니까 피자빵은 사실 피자의 진짜 재료가 들어간 것도 아니야. 진짜 피자빵의 재료는 사실은 그것밖에 안 들어갔어. 피자 치즈. 모차렐라 치즈가 들어가 있고 토마토 페이스트 같은 게 조금 들어가 있지. 그 외의 나머지 내용물은 뭐가 들어가도 상관없는데, 자꾸 뭘 집어넣어. 그러니까 거기에 뭐를 집어넣어도 ‘어, 피자빵은 이런 맛일걸.’ 이런 느낌으로 잘 감싸주는 게 있어. 빵인지 참 애매하긴 하지만, 빵인 듯하면서 피자인 듯하면서 그런 느낌을 내주는 게 약간 부인이랑 닮았어. 그러니까 부인은 남들보다 이것저것 받아들이기를 잘하거든. 유연해. 그러니까 피자빵의 치즈 같은 그런 유연함이 있고. 그 남들에게, 그러니까 뭐가 들어가도 그걸 부인식으로 잘 소화시켜서 부인만의 긍정회로를 돌려서 해석을 잘해. 그걸 자기에게 맞게 잘 넣어서 음, 그래. 이런 건 좋은 거야. 이렇게 딱, 그걸 부인 걸로 만드는 능력이 있어. 그게 그래서 난, 나의 이 부족한 빵에 대한 지식에서 그나마 부인이랑 닮은 빵, 딱 생각나는 피자빵이 아닐까? 생각했어"
"음. 수용적이다, 긍정적이고, 유연하다."
"응. 근데 이게 진짜 빵인가? 그 모호함은 있어."
"그렇지? 뭐 하나 특출나진 않지."
"아니, 근데 피자빵이 생각보다 되게, 아니, 빵을 되게 좋아하는 사람들은 피자빵을 거들떠보지 않는데_빵에 조예가 깊은 사람들은 피자빵을 좋아하지 않는데_ 빵에 조예가 없이 그냥 빵집 갔다가 우와 맛있어 보여하고 그냥 빵을 고르는 사람들은 생각보다 피자빵에 손이 많이 가서."
"배고픈 사람들?"
"그렇지. 그래서 파리바게트나 그런데 가보면 피자빵 있잖아. 피자빵이 생각보다 잘 팔려. 생각보다 먼저 매진되는 빵들 중에 하나야."
"가성비가 좋은 거겠지?"
"그럴 수도 있지. 피자 한 판을 사 먹기에는 조금 그렇고, 빵집에서 빵의 기분은 내고 싶고, 피자의 기분도 내고 싶고, 그런 사람들이 살 수도 있지. 그렇다고 피자빵에 막 살라미 햄이 들어간 것도 아니고, 페페로니 같은 거 그런 거 아니고, 막 어떻게 보면은 싼 햄, 줄줄이 비엔나 같은 거 썰어 넣고 했는데, 근데 사실 피자 같은 느낌 나고 피자 맛이 나거든.
"음... 그렇지. 내가 뭐 막 빼어나진 않지. 악기를 하나 제대로 하는 것도 아니고, 글을 특출 나게 잘 쓰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진짜 몸매가 너무 예뻐 막 이런 것도 아니고. 그냥 약간"
"근데 조합이 되게 잘돼. 그리고 맛있어. 맛있고 좋아. 먹어보면은 분명히 빵을 그 돈 주고 먹었을 때 가장 만족감이 드는 빵 중에 하나가 아닐까 싶어. 나는 고급 패스츄리만 먹어요. 그런 게 아니라면은. 먹어보면 만족감이 좋아. 근데 사실 그 조화가 잘 되는 게 싶지 않거든."
"그 유연함을 가졌다는 거 마음에 든다."
"부인 유연하지."
"다리 찢기는 안돼."
"아니 그러니까 생각의 유연함."
"응. 몸 말고 생각의 유연함"
"그러니까 남의 말을 부인은 '그래, 저놈 어떤 말하는지 들어보자.' 이렇게 듣지 않고, '아 저 사람은 저런 통찰력을 갖고 있구나. 저거 괜찮은데? 저거 멋진데?' 부인의 대화할 때의 인식은 ‘아, 저 사람 멋있어!’ 그러니까 어떻게 보면 평범한 사람인데, 그 사람의 반짝반짝 빛나는 모습이 간혹 간혹 보일 때가 있거든. 그걸 부인은 잘 찾아서 '아, 저 사람은 멋진 사람이야'라고 생각을 한단 말이야. 그래서 그 사람의 가치를 인정해주려고 해. 보통 사람들은 사실 그렇지 않거든. 보통 사람들은 그 사람의 반짝이는 순간보다 뭔가 그 사람이 좀 찌질하거나 안 좋은, 그 사람의 부족한 부분을 보면서 저 사람보다 내가 낫지, 뭐 이런 느낌을 가지는데, 부인은 내가 저 사람보다 낫지 그런 거보다 '아, 저 사람에게도 배울 것이 있구나. 저 사람 참 멋지네. 이 사람들 참 좋은 사람들이야. 난 이 사람들처럼 되고 싶어.' 그런 식으로 계속해서 흡수를 하려고 한단 말이야. 그게 부인의 가장 큰 장점이잖아. 그게 가장 큰 장점인진 모르겠지만, 큰 장점이라고. 근데 피자빵이 그래. 뭐를 넣어도, 거기다가 진짜 채소를 하나 더 넣을 수도 있고, 옥수수를 더 넣을 수도 있고, 양파를 썰어서 더 넣을 수도 있고, 첨에 어, 이게 어울리려나 하다가 마치 피자에다가 파인애플을 얹어놓고서 이건 하와이안 피자입니다. 이렇게 하듯이 빵인데도 거기에다 뭐를 넣어도 막 자꾸 이상한 걸 넣어도 대체적으로 피자빵은 어 그래도 피자빵인 거 같아, 그러면서 사 먹을 거 같아. 그걸 받아들일 수 있는 유연함이 있는 거지."
"좋다. 와, 너무 좋은데, 여보"
"그래? 그러니까 방금 우리 지금 이렇게 얘기하잖아. 내가 이렇게 막 아무 말 대잔치를 하더라고 부인은 좋다! 이렇게 하잖아."
"푸하하 하하하 아니야 남편 정말 좋아. 고마워, 내가 잘 써볼 수 있을 거 같아"
5분짜리 음성 녹음을 그대로 받아 적는 데에는 한 시간 이상이 걸렸다. 말이 빨라서 생각보다 고된 작업이었다. 뭐 하나 특출 나지 않아도 나라는 사람을 세심하고 다정하게 바라봐주는 사람이 내 남편이어서 참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유연하게 늘어나는 피자빵의 치즈처럼 남편이 술 먹고 늦게 들어와도 포근하게 안아주어야겠다.
여보, 우리 피자빵처럼 빵빵하게 어깨도 피고 마음도 피자. 오래오래 같이 피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