찾았다,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 오빵
언제였더라. 논산에서 차로 한 시간 거리인 전주로, 군산으로, 대전으로 오로지 빵을 먹겠단 일념하에 길을 나섰던 때가. 빵을 극진히도 사랑하지만 근처에 빵집이 없던 시골에서 운전도 하지 못해 오도 가도 못하고 논두렁이나 어슬렁 거리던 시절이 있었다. 두 살배기 딸아이가 먹다 흘린 떡뻥 부스러기나 주워 먹는 나에게 남편이 선사할 수 있는 최고의 여행은 유명 빵집이 있는 도시로의 당일치기 여행이었다. (바게트가 있는 파리였으면 더 좋았으련만)
전주는 내 고향. 친정에 가는 날이면 빵집을 들러야 했다. 풍년제과가 아니다. 풍년제과는 어릴 적 소위 전주의 메이커 빵집이었고 여전히 우리 부모님은 누군가에게 답례를 해야 하는 상황이면 풍년제과 롤케이크와 땅콩샌베이를 선물하는 것으로 예의를 차리신다. 하지만 지금의 풍년제과는 여행자들을 위한 초코파이 빵집으로 바뀌어 예전의 고급스러운 맛을 잃었다. 나는 기본 빵에 충실한 빵집을 좋아한다. 소금빵이 맛있는 전주 맘스브레드도 좋지만 한 곳만 고르라 한다면 모짜르트 빵집을 고르겠다. 치즈, 크림치즈, 베이컨, 소시지, 파슬리로 화려하게 치장한 빵들이 가득한 여타의 빵집에서 찾아보기 힘든 기본 빵들이 맛있는 곳. 빵을 예닐곱 개 사면 빵 하나를 서비스로 주는 인심을 여전히 간직한 곳. 오래된 아파트 도로 안쪽에 자리 잡은 빵집이라 여행객은 찾아볼 수 없지만 전주에 간다면 언제라도 들르고 싶은 빵집이다.
중국 청도에서 살 때다. 중국 빵집의 빵은 만두(소가 없는, 우리가 아는 중국식 꽃빵과 유사) 반죽을 기본 베이스로 하는 빵들이 많았다. 설탕은 넣었는데 소금이 부족한 그런 느낌의 빵에 물려갈 무렵 청도 시내에 한국인이 운영하는 리치몬드란 빵집이 문을 열었다. 그 당시 공장에서 일하는 고졸 노동자의 임금이 700위안(그 당시 환율로 한화 8만5천원)이 되지 못할 때 한국식 빵집의 생크림이 들어간 빵은 10(1200원)위안을 호가했으니 꽤 비싼 가격이었다. 어느 나라를 가던 나는 그나라 서민의 평균 소비에 반하지 않는 삶을 살려고 하는데 사치스러운 그 빵만은 참을 수 없었다. 두 장의 직사각 초코 카스텔라 사이에 아주 얇은 생크림이 한층 껴있는, 백설기 한 덩이 만한 크기의 빵. 매주 토요일 청도 시내에 나갈 때면 그 초코 케이크 빵을 두 조각 사 와서 호사스러운 주말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주중엔 5마오(60원) 혹은 1위안(120원) 짜리 전병을 먹으며.
한국으로 돌아와서는 그 초코 케이크 빵을 잊고 살았다. 그게 아니어도 먹음직스러운 빵은 도처에 널려있으니까. 그러다 어느 날 모짜르트 빵집에서 잊고 있던 초코 케이크 빵을 마주하게 되었다. 초코 카스텔라 위에 초코 크림을 치덕치덕 덧 바르지 않아도(그런 의미에서 나는 스타벅스의 가나슈 레이어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다) 초코 케이크 본연에 충실한 빵 말이다. 혀 끝에서 사르르 녹는 시폰 케이크보다는 조금 더 거칠어 때론 칼칼하게 목이 막히기도 하지만 달콤 쌉쏘롬한 그 빵과 블랙커피 한잔이라면 세상 만사가 너그러워진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산 고장, 군산. 개인적으로는 전주 한옥마을보다 일제강점기 가옥과 건축물들이 보존된 장미동, 월명동 일대를 걷는 시간을 좋아한다. 군산세관, 군산근대역사박물관, 군산근대건축관, 군산근대미술관을 쭉 들러보고 짬뽕을 먹은 다음 이성당 밀크셰이크로 입가심을 하는 코스로 말이다. 사실 나는 그 어느 곳에서도 밀크셰이크를 마시지 않는다. 하지만 이성당의 밀크셰이크라면 한 겨울 머리가 띵 해지더라도 마실 의향이 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이성당의 단팥빵은 빵만큼 팥을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결코 지나칠 수 없다. 얇은 만두피에 소가 꽉 찬 만두를 먹는 것처럼 이성당 팥빵 또한 그러하다. 밀가루 반죽은 비엔나 소시지의 껍질에 불과할 뿐 팥이 제 역할을 다 했다. 이성당 팥빵을 잘라 그 단면을 보면 그래, 모름지기 팥빵이라면 이래야지 하는 끄덕임이 있다. 세상의 모든 바람떡과, 붕어빵과, 팥죽이 다 이성당 팥빵처럼 제 본분을 다 했으면 좋겠다.
군산에서 시간 여행을 한 느낌이라면 계획도시인 대전을 갈 때마다 느끼는 건 여행지로서의 매력보다 애 키우며 살기 좋은 도시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엑스포 공원 앞 널찍한 천변을 걷는 시민들을 볼 때 이곳에서 유모차를 밀고 산책을 하면 손목에 힘 안 들이고 걸을 수 있겠지 싶었다. 논길에 박혀있는 돌멩이들을 피해 유모차를 수레 끌듯이 끌던 때였으니까. 대전 성심당의 대표메뉴는 단팥소보루다. 사실 소보루는 소보루(그러고 보니 어릴 적 풍년제과의 소보루는 참 맛있었는데)여야 하고 팥빵은 팥빵이어야 하기에 단팥 소보루에겐 후한 점수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부추빵이 먹음직스럽다. 이성당의 야채빵처럼 성심당의 부추빵 역시 팥앙금의 단맛에 질릴 때 한입 베어 물면 또다시 단팥 소보루를 먹게 만드는 러닝 메이트 역할을 톡톡히 한다. 하지만 그보다 교황님이 방문하셨을 때 드셨다던 치즈 스콘이 기억이 난다.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는 집 근처에 빵집이 서너군데나 있고 내 스스로 알아서 섭섭치 않게 빵을 사 먹곤 한다. 빵 따라 추억 여행을 떠나다 보니 문득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빵은 오빠가 사준 빵이였음을 깨닫는다. 오늘은 퇴근길에 남편이 빵을 사왔으면 좋겠다. 오빠 말고, 오빠가 사준 빵, 오빵 사랑해.
덧붙여 어제 이 글을 끄적이고 난 뒤 남편과의 짧은 대화:
“오빠, 제가 전주에서 제일 좋아하는 빵집 기억나죠?“
”어, 베토벤“
”.......“
아, 진정 나는 오빠 말고 오빵만을 사랑해야 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