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가 이럴 줄 몰랐네
다음 글은 위의 <까르띠에 목걸이 대신 괌>의 후속 글입니다.
지금 나는 에메랄드 빛 서태평양(엄밀히 말하자면 필리핀해지만)을 바라보며 글을 쓴다. 이 자리에 앉아 파도소리를 듣기까지 스쳐왔던 상념들이 하얀 포말이 되어 밀려온다. 결혼 1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남편과 아이 둘, 우리 넷이 처음으로 함께 떠난 휴양지, 괌에 와 있다. 수영도, 운전도 못하는 나에게 사실 휴양지는 돈 아깝고 지루하고 사치스러운 공간이다. 게다가 요즘같은 때 달러를 쓰는 미국령은 더 부담이 되었다. 하지만 물놀이를 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에게 휴양지는 지상 낙원이겠지. 결혼은 남편과 내가 했으나, 그로부터 10년 후 우리는 두 아이와 함께 공동운명체가 되었으니 공동 선을 위해 과감히 괌 pic 슈퍼골드패스를 끊었다. 전 일정 식사와 음료가 포함된 특가 상품으로 말이다. 한 달 살기에 조금 지치기도 했을뿐더러 휴양지까지 와서 남편과 아이 둘 (즉 아이 셋)을 뒤치닥거리 하다 끝나기엔 나도 대접받는 여행이 절실히 필요했으니.
내 아이 둘과 하는 여행도 품이 많이 드는데 김금옥 여사님의 아들과 함께 하는 여행은 사실 더 많은 인내를 필요로 한다. 본인 칫솔 하나, 양발 한 켤레 챙길 줄도 모르는 건 유치원생 아들과 같다. 환전을 할 생각도, 여행지의 전압을 생각할 겨를도 없는 건 초3 딸아이의 수준이다. 여행자 보험을 들거나,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는 건 어른의 일이다, 하여 김 여사님의 아드님이 넘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내 아이 둘을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인데 여행 와서 여사님의 아들까지 돌보아야 하는 일은 아무리 슈퍼골드패스가 있어도 쉽사리 통과하지 못하는 피곤한 일이다.
“여보, 어떡해. 핸드폰 충전기가 안 맞아”
“…… 캐리어에 멀티 아답터 있잖아요”
“기내 안이 춥더니 목감기가 올 것 같네. 어쩌지?”
“…… 저기 투명 파우치 안에 종합 감기약 있어요”
“나 우리 부서 사람들 선물 사야 하는데 이거 어때?”
“아… 지금 원 달러 환율이 1400원이 넘고 마카다미아 5알 들어있는 초콜릿이 3달러라 4000원이 넘는데 이걸 꼭 사야 해요? 비닐봉지로 된 건 1.5 달러인데 굳이 상자에 들어있는 거를… 지금 애들 아이스크림도 안 사주고 있는데 이걸 20개나 사겠다고요? 그나저나 오빠 따로 환전한 거 있어요?”
내 수중에 있는 이 달러로 말할 것 같으면 10년 전에 하와이로 신혼여행 갈 때 환전하고 남은, 해외여행을 갈 때나 한 달 살기 할 때마다 비상금으로 갖고 나갔다가 손대지 않고 도로 가져온, 예사 달러가 아니다. 근데 이 금 같은 달러를 회사 사람들 간식 비용으로 쓰겠다니. 괜히 부아가 치민다. 나도 왕년에 사회생활을 해 봐서 알지만 여행지 물가에 따른 적정 선물이라는 게 있다. 보통 큰 봉지의 간식을 서너 종류 사서 소분해서 주는 정도다. 그리고 굳이 사다 주지 않아도 욕 할 일 없고 기껏 사다 줘도 고마워하지 않는 게 현실이다. 지난번 일본 다녀온 후배는 10개들이 젤리를 두 상자 사 왔다던데 (아무리 비싸도 1000엔이 넘지 않고 엔화가 싸서 박스당 만원도 안 넘는 거, 이만 원어치 그래, 누구든 그렇게 하겠지) 왜 결혼식 하객 답례품도 아니고 결혼 10주년 기념 여행에 동료들을 줄 기념품을 사다 줘야 하는지. 달러 앞에 옹색해지는 내 속 좁음도 싫었고 세상 물가 생각지도 않고 한 턱 내고 싶어 하는 남편의 너른 품도 꼴 보기 싫었다. 내 친한 지인에게 사다 줄 선물을 포기하고, 결국 아이들에게 초코 쁘레즐 하나도 사 주지 못하고, 내가 입을 타미힐피거 티쪼가리 한 장도 사지 못하고 얼굴도 모르는 남편의 회사사람들 기념품을 사는데 10년 묵은 내 소중한 60달러를 바쳤다. 경제공동체란 이름 하에.
이번 여행을 오기 전에 다른 건 다 몰라도 차량을 렌트하고 운전과 관련된 건 남편에게 일임하겠다고 약속을 받아내고 왔다. 하지만 카드 한 장 챙겨 오지 않은 남편. 렌터카 업체 사장님이 ‘결제와 예치금은 어떻게 하시겠어요’ 라고 묻자 ’아, 핸드폰에 카드가 있는데요…‘ 라고 얼버무리는 남편. 단전 저 아래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깊은 빡침이란 이 저급한 단어는 이 상황에서 꼭 사용해야 한다. 달리 우아한 표현으로 고치고 싶지가 않다. ‘아무리 한국사람이 많다 해도 여기가 경기도 구암시니, 남의 아들?’ 부르르 떨리는 아랫입술을 힘껏 이로 물고서 전대에 꼭꼭 숨겨둔 쌈짓돈을 또 턴다. 차를 반납할 때까지 예치금으로 걸어 두어야 하는 신용카드는 나의 플라스틱 마스터 카드로 쓰고 (삼성페이에 있다는 남편의 카드, 해외에서 사용 가능한 건지도 미지수다. 분명 국내용으로만 제한을 했겠지) 렌트 한 차를 반납할 때 채워야 하는 주유 역시 얼마 남지 않은 나의 달러에서 충당했다.
넉살 좋은 남편은 괌 섬 드라이브를 마치고 오는 길에 묻는다.
“그래도 내가 운전해 주니까 편하고 좋지?”
“오빠가 운전 하나는 정말 잘 하죠. 다만 운전만 잘 한다는게 함정이지”
“우리 20주년엔 어디로 여행 갈까? 동유럽 좋다던데 핀란드 이런데 어때?”
“핀란드는 북유럽이고 폴란드가 동유럽이거든요, 아저씨”
뭉게구름 피어오르는 너른 괌의 하늘, 나흘동안 벌써 세 번의 무지개를 보여 준 이곳 하늘은 조석으로 황홀했고 바닥이 훤히 보이는 투명한 바다색 마저 흠잡을 데 없었지만 빈 몸과 투명한 머리로 이곳까지 온 남의 아들때문에 못내 아쉬움이 남는 여행이다. 덕분에 웃픈 추억하나 브런치에 남기게 됨을 고마워 해야 할런지.
근데요 오빠, 10년 후 결혼 20주년엔 오빠랑 여행 같은 거 안 가고 저 그냥 까르띠에 목걸이 받으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