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어도 또 걷고 싶은 올드타운
한낮의 연꽃은 생기를 잃고 만다. 올드타운 안에 많은 사원 가운데 조그만 연못이 있는 왓 쩻 린에 아침에 가 보고 싶었다. 아침부터 서둘러 나간다고 툴툴대며 앞서 걷는 딸아이의 뒷모습이 못내 아쉽다. 이른 시간이라 여행객들의 소요가 없는 고즈넉한 사원의 뒤뜰에는 연못을 가로지르는 대나무 다리가 있었고 그 위를 조심스레 걷는 우리의 발끝에서 삐그덕거리는 소리만 들려올 뿐이다. 연못에 빼곡히 찬 연잎들이 때마침 흩날리는 이슬비에 촉촉이 젖어든다. 이내 내 마음도 차분해진다. 딸아이 등뒤에서 궁시렁대던 입을 멈추고 뾰로통하게 부어있는 딸아이를 말없이 감싸 안아주었다. 대나무 다리 난간에 걸려있는 윤회의 수레바퀴를 보며 아이와 나는 지금 억겁의 세월 그 어디쯤을 함께 구르고 있는지 잠시 생각해 보았다.
사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캄 빌리지가 있다. 복합 문화 예술 공간인데 매력 넘치는 곳이다. 천연염색, 손 바느질등 공예품들을 볼 수 있어 인사동 쌈지길과 비슷한 공간이지만 더 고요하고 아늑하다. 카페도 있고 도서관도 있고 작은 박물관도 있다. 그 멋스럽고 편안한 공간에서 문턱을 낮춰 아이들을 들여보내준 있는 것만으로도, 거기에다 잠깐 숨을 고르고 더위를 식힐 수 있게 해 주어서 고마웠다. 구글맵에 적어놓은 누군가의 평처럼 이곳의 주인이 누구인지 궁금할 정도로 개인의 경제적인 이익보다도 지역사회에 공헌을 하는데 큰 뜻을 두는 어느 고매한 인격의 부호이지 않을까 감히 추측만 해 본다. 머무는 것만으로도 휴식이 되는 캄 빌리지를 나서며, 인심 좋으신 내외분이 운영하시는 근처 바질 식당에서 나는 매콤한 바질 오징어 볶음밥을, 아이들은 바질 닭고기 볶음밥을 먹고 아이들에게 후식으로 아이스크림콘을 사 주고 정겹게 호텔로 돌아왔다. 오후에는 호텔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할 계획이라 호텔로 돌아가는 아이들의 발걸음은 그저 가벼웠다.
올드타운의 골목 구석구석은 숨겨진 보물 찾기처럼 ‘어, 이런 가게가 여기 숨어 있네’ 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서울의 서촌 혹은 북촌을 걷는 것처럼 지루할 틈이 없다. 하지만 두 아이들에게 올드타운은 그 골목이 그 골목 같겠지. 더 욕심 낼 수는 없고 남은 한 달 동안 틈틈이 거닐러 오리라는 다짐을 하고 3주 머물 숙소로 가기 위해 풀어놨던 짐을 다시 쌌다. 너그러우신 집주인아주머니께서는 아이 둘을 데리고 치앙마이에 왔다며 우리가 머문 호텔까지 픽업 차량을 보내주셨다. 그 배려가 고마웠는데 숙소에 도착해서 냉장고 문을 여니 망고 3개가 접시에 예쁘게 담겨있더라. 태국에서는 손님을 환대하는 표시로 망고를 내놓는다고 하는데 그 뜻을 알고 나니 더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여기서 남은 3주를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침실 하나, 화장실 하나, 주방 겸 거실이 있고 베란다까지 있는 작지만 아늑한 이 집이 마음에 든다. 식수 한 상자, 밀폐용기부터 조미료, 여분의 쓰레기봉투까지 구비되어 있어서 주인아주머니의 세심한 마음 씀씀이를 느낄 수 있었다. 사흘동안 호텔에 묵혀서 눅눅해진 빨래를 돌리고 베란다 빨랫줄에 널고 나니 개운하기 그지없다. 아이들은 여기서 원래 살았던 사람들 마냥 아주 편하게 각자의 위치에서 그림을 그리거나 동영상을 시청한다. 다음날 국립공원 트레킹을 예약해 두어서 이 날은 근처 마야몰에 가서 늦은 점심으로 내 영혼의 카오소이를 먹고(아이들은 피자를) 쌀과 계란, 우유등을 사고 집에 와서 각자 슈퍼에서 고른 간식을 나눠 먹는 걸로 마무리했다.
전날 국립공원 트레킹을 무사히 마치고, 일요일 한나절 평화로운 일상을 보내다 오후 늦게 선데이 나이트 바자를 다녀왔다. 서쪽 왓 프라 싱에서 시작해 동쪽 타패 게이트까지 이어지는 약 1킬로미터에 달하는 치앙마이 최대 규모의 야시장이라 하는데 정신 차리지 않으면 1000밧(한화 약 4만 원)이 그냥 순식간에 지갑에서 새 나갈 것 같다. 시장 입구에서부터 고산족들의 수공예품이 눈길을 끈다. 한국에서 아무리 사게 사더라도 5천 원은 족히 넘는 핸드메이드 손가방이 천 원 남짓 한다. 선물 받을 대상이 정해지지도 않은 손가방을 여섯 개나 사고, 아이 둘에게 코끼리 바지 한벌씩을 사주고 각자 갖고 싶은 공예품을 하나씩 사줬는데 큰 아이는 머리끈을, 작은 아이는 캔을 재활용해 만든 툭툭이를 골랐다. 나는 아이들 과자 그릇으로 안성맞춤인 코코넛 그릇을 샀다. 시장 규모가 꽤 커서 한번 지나쳤던 곳에서 망설이다 사지 못하면 그게 끝이다. 되돌아가기에는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멀다.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살까 말까 망설일 땐 사게 된다. 물론 비슷한 물건을 파는 가판이 또 나오긴 하지만 좌우로 다 살펴보기엔 너무 많다. 뜨게 인형도 예쁘고, 작은 음식 모형 자석도, 박제된 곤충들도 아이들의 발길을 붙잡는다. 마지막으로 남루한 젊은 예술가의 사원 그림 한 점을 덜컥 사고 캐리어에 다 담아 갈 수 있을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야시장 천국인 치앙마이에서 겨우 첫 번째 야시장을 다녀왔는데 양손에 한 봉지씩 짐이 그득하다. 아까 야시장이 열리기 전 오후 한 차례 비가 내렸었는데 빼곡히 늘어선 가판 위, 아이들이 멈추어 선 등 뒤로 복숭아빛 저녁노을이 펼쳐져있다. 근처에선 옛된 얼굴의 여학생이 울림을 주는 목소리를 담아 팝송 버스킹을 한다. 시장이 끝나는 타패게이트까지 더 쭉 구경하고 싶었는데 발갛게 상기된 아이들 얼굴을 보자니 더는 무리해서 걸을 수 없겠다. 아련하게 등 뒤에서 멀어지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를 남겨둔 채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는 올드타운을 서둘러 빠져나왔다.
아이들이 다리 아프다며 왓프라싱~타패게이트의 중간 지점에서 돌아왔으니 망정이지 나머지 500미터 구간을 더 갔으면 아마 2000밧도 모자랄 뻔했겠지. 그런데 남겨진 미지의 구간은 치앙마이를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