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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캐서린의 뜰 Dec 12. 2024

한 달 살기 성지, 치앙마이

성스러운 한 달 살기의 시작


여름 방학은 짧다. 한 달이 채 되지 않는다. 아이는 나흘의 교외체험학습 신청서를 제출하고 나는 새 캐리어를 샀다. 이번에는 28인치다. 한 달 살기 준비가 두 번째니 거드름을 피워본다. 출국일 사나흘 전이 되어서야 짐을 싸기 시작했다. 설사 빠트리는 짐이 있다 해도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현지에서 사면된다는 여유로움 정도는 이제 생겼으니까. 게다가 이번엔 도착해서 처음 나흘동안은 치앙마이 올드타운 내에 있는 호텔에서 묵을 예정이다. 밤 비행기로 도착해 그 다음날 낯선 공간에서 아침을 챙겨야 하는 수고로움 대신 차려주는 아침을 먹고 주변을 사부작거리는 느긋함을 챙겨야겠다는 깨달음이 지난 한 달 살기를 통해 있었으니 말이다.


큰 아이는 오전 수업을 마치고 오자마자 책가방을 여행 배낭으로 바꿔 메고, 나는 내 허리춤까지 오는 캐리어를 끌고 작은 아이의 손을 잡고 또다시 미지의 세계를 향해 현관문을 나섰다. 세찬 장맛비가 30분 전부터 내리기 시작하더니 그나마 빗줄기가 약해졌다. 기다렸다는 듯 매미들은 젖은 나뭇잎 사이에서 일제히 함성을 질러대고 꿉꿉해진 공기를 가르며 우산도 받쳐 들지 못하고 우리는 최대한 서둘러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짧은 거리를 걸었는데도 빗물인지 땀인지 벌써 등과 어깨가 축축하다.    


인천 공항까지 한 시간, 아직 학교에 가지 않는 둘째 아이 덕분에 긴 대기 줄에서 벗어나 빠르게 수속을 마쳤다. 이륙까지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 활주로를 바라보며 아이들과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벌써부터 피로가 몰려온다. 여섯 시간의 비행 후 입국 수속을 마치고 숙소에 가서 씻고 눕기까지는 앞으로 열 시간이나 족히 남았는데 아찔하다. 집에서 에어컨 틀고 뒹굴거리기 딱 좋은 흐린 날인데 나 또 사서 고생하는구나. 내가 경솔했구나 깨달아도 이미 늦었다.


한국시간으로 자정이 가까울 무렵 우리는 치앙마이 공항에 도착했다. 소금물에 푹 절여진 배추처럼 무겁고 늘어진 몸을 미리 예약한 픽업차량에 실었다. 공항을 벗어난 차는 금세 시내 중심부로 들어선 듯했다. 그런데 창밖 풍경이 예사롭지 않다. 비몽사몽 정신이 없는 와중에  차분한 노란빛 가로등에 일렁이는 수로, 거기서 한 걸음 비껴 나 수줍은 주황빛으로 드러낼 듯 말 듯 이어지고 끊어지기를 반복하는 성곽길이 내 눈을 깜빡이게 한다. 팔다리는 반쯤 잠들어 있지만 뇌가 또렷이 깨어났다. 밤 풍경이 이렇게 고고할 수 있다고. 오기 전에는 심란하더니 오고 나니 심쿵이구나.


간밤에 꿈인지 생시인지 모른 채 기절하듯 잠이 든 아이들은 이튿날 아침 마주한 창문밖 세상을 보고 배시시 미소를 지어 보낸다.

“엄마 자고 일어났더니 치앙마이에 있어, 우리가”

그랬다. 치앙마이 올드타운은 짙은 푸르름과 빛바랜 벽돌색으로 온화하게 우릴 반겼다.


서울 사대문 안에 경복궁, 경희궁, 창덕궁, 창경궁등 궁들이 모여 있듯이 치앙마이 올드시티 안에는 크고 작은 사원들이 모여있다. 왓프라싱, 왓 쩨디 루앙, 왓 쩻 린, 죄다 왓으로 시작하는 지명들.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왓은 틀림없이 사원을 의미하겠지. 올드타운의 남대문 격인 타패게이트(엄밀히는 동쪽에 위치한)에서 모든 여행자가 그렇듯 성문 인증샷을 시작으로 우리의 노정이 시작되었다.


거의 다 무너져 내리는 붉은 돌담을 따라 걷다 보니 어젯밤 졸음에 겨운 내 눈을 번쩍 뜨게 한 수로변으로 이어졌다. 가로등빛 대신 햇빛에 얄랑이는 수면 위로 군데군데 작은 분수가 뿜어져 나와 고요히 잠들어 있던 지난밤과는 사뭇 다른 풍경을 보여주었다. 길을 따라 쭉 걷다가 조그만 시장에 들러 마침 오늘이 생일인 친구 지혜가 생각나 향초를 샀다. 20여 년 전 방콕에 갔을 때도 난 기념품으로 향초들을 샀었는데. 역시 내 취향은 한결같나 보다. 점심때가 되자 치앙마이 도심 곳곳에 있는 세븐일레븐에 들러 간식거리를 사고 덥다는 아이들의 성화에 못 이겨 호텔로 잠시 후퇴했다(내 이러려고 올드타운 내에 있는 호텔을 예약했지) 점심을 간식거리로 때우고 근처 식당에서 이른 저녁으로 나는 카오소이(내가 무척이나 그리워하던 말레이시아의 커리락사와 유사한 음식) 한 그릇을, 아이들은 포크누들 한 그릇을 시켰다. 동남아의 향신료 한 모금이 빈 뱃속에 들어가니 감격스러웠다. ‘나 정말 왔구나, 치앙마이’


카오소이 맛집 근처에 올트타운 내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왓 쩨디 루앙이 있어 식후 산책도 할 겸 사원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석조 불탑 주변을 걷다 잠시 벤치에 앉아 대나무 풍경소리에 귀 기울였다. 사원 밖의 소란스러움에서 한 걸음 물러나 돌탑을 올려다본다. 탑 꼭대기에 걸릴 듯 가까이 내려와 흐르는 짙은 먹구름과, 세월에 침식되어 군데군데 깎이고 떨어져 나간 붉은 벽돌들, 계단아래 커다란 항아리에 펄럭이는 연잎들이 조화로운 아름다움을 빚어내고 있었다. 세계 어딜 가나 절, 성당, 모스크라는 공간은 종교와 무관하게 초면의 이방인을 그들의 안식처로 기꺼이 초대한다. 어제 이 시간의 나는 인천공항 탑승구에서 지루하게 탑승 안내방송이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는데 오늘의 나는 올드타운의 한 사원에서 바람에 엷게 실려온 연꽃향을 들으며(聞香) 지금 이 순간에 오롯이 머물러있다.


사원을 나오자 모퉁이에 툭툭이가 보인다. 작은 아이가 갑자기 다리가 아프다고 한다. 툭툭이를 타고 싶단 소리다. 오늘 탈 생각은 아니었지만 언제고 한 번은 탈 거였기에 흔쾌히 허락했다. 툭툭이를 타고 올드타운 골목골목을 힘차게 가르고 있는데 소나기가 내린다. 뺨 위로 빗물이 튀어도 아이들은 마냥 신나서 소리친다. 골목을 벗어나 큰 길가로 나오니 맞은편 하늘에 커다란 무지개가 걸려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만큼 큰 무지개가 우리를 반겨준다고. 벌써부터 애정이 넘쳐 흐르는 이 도시, 치앙마이. 큰일 났다,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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