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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누비스 Nov 13. 2023

제이의 기억

이 일에서 가장 괴로운 것은, 모두를 구할 수 없다는 거야.


 네이버 알람에 무언가 떠서 생각없이 들어갔다가 뜬 문구에 손이 멈추었다. 네이버 마이박스에 저장된 13년 전 오늘의 사진을 보여주는 기능에 이걸 들어가야하나 말아야하나 한참 고민했다. 내가 이걸 꺼내보는게 맞을까. 그래도 되는걸까. 매 년 이맘때 즈음 늘상 했던 고민이지만 올해도 고민하고 말았다. 이정도면 아예 열어보지 않는게 맞지 않을까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래도 보고싶었다. 그리웠다. 평소에는 여전히 네이버 계정에 저장된 이 사진들을 열어볼 엄두도 나지 않았기에.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정도 희석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기억나는 그 아이의 모습이 보고싶었기에.


 지금도 어쩌다 개와 고양이를 모시는 집사가 되었지만 고등학생 때에도 우리 집에는 개가 있었다. 정확히는 동생이 개를 키우고 싶다고 졸라서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온 말티즈에게 나와 동생은 제이(Jay)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가지고 있는 돈을 털어 간식과 장난감을 사주고 돌보며 함께 했다. 동네 공원에도 함께 다니고 시내에서 산책하는 날도 있었다. 우리는 제이를 사랑했고 제이가 우리와 함께 오래 살기를 바랐다.


 2023년 현재에도 시에서 운영하는 동물 보호소는 형편없는 곳이 참 많다고들 하지만 그 때에는 더 심했다. 그 때나 지금이나 동물 보호소는 관리도 되지 않고 그저 동물을 수납하듯 보관하는 일종의 창고와도 같았다. 관리가 되지 않는 동물 보호소 아니 동물 수납 보관소에서 방치되듯 있었던 제이는 건강이 좋지 않았다. 그 때문인지 자주 아팠고 동물병원을 드나드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다 어느 겨울이 되어가던 날 제이의 상태가 급격히 안 좋아져서 급히 동물병원을 갔더니 자궁축농증이 심하다는 소견이 나왔다. 문제는 제이가 나이도 많고 수술을 버틸 상태도 아니라 수술을 하지 않고 집에서 먹고싶어하는 것을 먹이고 하다가 보내주는 것이 더 나을거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내가 고삼이 되기 직전, 고2 초겨울이었다. 한국 나이로 18살 만으로는 17살. 죽음을 모르는 어린 나이는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동안 함께 지냈던 반려견이 머지않아 죽음을 앞두고 있다는 것은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눈물이 앞을 가리지만 무작정 슬퍼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어떻게든 내가 제이를 마지막까지 돌봐야 했다. 늙고 병든 개의 마지막을 지켜주고 싶었다. 설령 제이가 나를 떠나더라도 외롭게 마지막을 보내도록 하고 싶진 않았다.


 그 진심이 통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동물병원에선 길어야 한 달을 버틸 것이라 했음에도 그보다 두 달은 더 살다가 내가 학원을 가있는 동안 조용히 떠났다. 마지막을 혼자 떠나게 해서 마음이 좋지 않은 기억이기도 하고 그동안 즐거웠냐고 물어볼 틈조차 주지 않아서 서럽기도 했다. 그래서 함께 한 몇 년간 찍은 사진들을 지금 쓰고 있는 네이버 계정의 드라이브에 모조리 옮겨놓고 평소에는 들여다보지 않다가 오늘처럼 몇 년 전의 오늘 사진을 확인해보세요 하고 뜨면 몰아서 보게 되었다.


 당시 제이를 살릴 수 있지 않았을까, 내가 좀 더 신경쓰고 노력했다면 하루라도 더 살지 않았을까 하는 물음표가 꼬리표처럼 나를 따라다녔지만 이후 대학교를 다니고 전공 공부를 하면서 그건 불가능하다는 것을 가면 갈수록 실감했다. 모든 생명에는 끝이 있으며 인간은 그 생명의 생사에 아주 직접적으로 개입해서 좌지우지할 수는 없다. 생명에 대한 권한은 그야말로 신의 영역이다. 그게 내가 몇 년간 대학교를 다니며 전공 공부를 하고 내린 최종적 결론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고 어찌되었던 제이는 나를 떠났을 것이다. 그걸 인간인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는 것이었다. 부정하고 싶고 슬프지만 모두를 살릴 수는 없고 그게 이 전공에서 가장 괴로운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나 다시 나는 집사가 되었고 먹여살려야 할 개와 고양이가 생겼다. 그리고 그 둘이 뒹굴며 노는 모습을 힐끗힐끗 보며 얇은 책 한 권을 읽었다. 성당 성물방에서 보고 안 살수가 없어서 샀는데 내가 이전부터 알고 있었던 프란치스코 성인의 일화도 나오고 해서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책의 마지막 즈음에는 하느님께서 우리의 강아지를 하늘나라에 데려가실지 어떨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우리가 강아지를 아끼는 것보다 훨씬 더 따뜻하게 우리의 강아지를 아껴 주시며 강아지는 그분의 품 안에서 행복할 것이며 우리가 간절히 바란다면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하늘나라에서 우리 강아지를 다시 만나 영원히 함께 할 은총을 주실 것이라는 글이 나온다.


 책을 읽고 나니 문득 이전에 트위터에서 보았던 글이 떠올랐다. 사람이 죽으면 자신이 키웠던 개가 마중을 나와준다는 이야기. 천상 과학도라 그런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별로 좋아하지 않지만 제이를 생각하면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간절히 바라고 있으니 다시 만나기를 바라고 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꼭 묻고 싶다. 나와 함께 해서 행복했었냐고. 그래서 만족하냐고.


 성경에는 하늘나라가 양과 늑대가 함께 사는 곳이라 묘사된다.

 그러니 그 중에는 제이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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