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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Sep 18. 2018

부모님의 병상일기를 톺아보다

의사가 되어 되돌아보는 아버지의 죽음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은 1992년 8월에 서울 서대문구에 소재한 <도서출판 눈>이라는 (아마도 지금은 없어진 듯하다) 출판사에서 펴낸 어느 40대 부부의 병상일기이다.  


남편은 1990년 가을 담낭암을 진단받았다. 아내와 함께 서울의 큰 병원으로 갔으나, 워낙 진행된 상태라 별다른 치료를 받지 못하고 그해 겨울 그들이 살던 제주도로 돌아왔다. 일기는 그들이 돌아온 1991년 1월부터 시작한다. 왼쪽에는 아내의 일기가, 오른쪽에는 남편의 일기가 적혀 있다. 그리고 1991년 9월부터는 남편은 상태의 악화로 더 이상 일기를 쓰지 못하였고, 아내의 일기만으로 채워져 있다. 책은 1991년 12월, 남편의 죽음을 기록한 아내의 일기로 끝을 맺는다.  

그 책을 출판한 것은 아내의 의지가 아니었다. 남편을 따르던 지인이 간곡히 요청하여 하는 수 없이 남편과 써오던 일기의 출판을 수락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내는 그 세월을 다시 돌이켜 볼 용기가 나지 않았고, 게다가 간병을 하는 동안 맘속을 오가던 수많은 감정들을 여과없이 생생하게 털어놓은 그 글을 남들에게 보여주게 된 것을 후회하였다. 아내는 출판사에서 온 수십 권의 책을 모두 쓰레기통에 집어넣었다. 시중에 유통된 것은 몇 권이나 될까. 그렇게 특별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 쓴, 대단한 사건이 있는 것도 아닌 책을 사람들이 얼마나 샀을까. 사실 그보다 더 재미있고 감동적인 내용의 책들도 한달에 수백 수천권씩 잊혀지고 있을 텐데 말이다.  


22년이 지난 어느 날, 전주의 어느 헌책방에서는 그 책을 한 권에 1,000원에 팔고 있었다. 그 책을 주문하는 데에는 택배비까지 4,000원이 들었다. 부부의 딸이 부모의 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던 시간을 다시 들여다보는 데에는, 고작 4,000원이면 충분했으나,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아버지가 사망하였을 당시 열 여섯, 중학교 3학년이었던 큰딸이 자라서 택한 직업은 공교롭게도 의사였다. 또한 더욱 공교롭게도 종양내과라는 전공을 택했다. 그녀가 살아온 삶은, 아버지를 무너뜨린 암이라는 질병과의 싸움을 결심한 비장미 같은 것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녀는 아버지의 죽음으로 무너진 중산층의 안락한 삶을 되찾기 위한 집념으로 열심히 공부하였을 뿐이었고, 사실은 할 줄 아는 것이 그것 밖에 없기도 했다. 의대에 간 것은 정말 과장이 아니고 우연이었다. 원서를 쓰기 직전까지 그녀는 의사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그려 본 적이 없었다. 그나마 유학이라는 비용 투자 없이 안정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가능성이 제일 많이 보인 것은 의사라는 직업이었기에, 의대에 간 것뿐이었다 (요즘같이 의대의 인기가 엄청나지 않을 시절이기에 가능하기도 했다).

학부를 졸업하고, 인턴 때 전공으로 내과를 선택하고, 전공의가 되어 세부전공으로 종양내과를 선택하였을 당시에도 그녀는 사실 별 생각이 없었다. 환자가 죽는 것이 일상인 과이니, 뭔가 예기치 않은 문제가 생겨도 어차피 죽을 환자들이어서 크게 책임을 추궁 당하지 않을 것 같다는 얄팍한 생각까지 있었다.  

그녀는 종양내과 의사로서 십여 년을 살았다. 항암제를 처방하고, 그러다가 항암제의 효과가 다하면 환자에게 다가오는 죽음을 알리고, 임종을 맞이하고, 그런 과정에서 수많은 환자들을 저 세상으로 보냈다. 그럼에도 사람의 죽음이라는 것은 좀처럼 익숙해지는 것이 아니었다. 환자의 임종을 겪을 때면 아버지가 떠올라 종종 울었다. 사람들은 그녀가 마음이 착한 의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고, 동료들은 감정을 정리하지 못하는 미숙한 의사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사실은 그녀 본인은, 환자가 아니라 본인에 대한 연민으로 우는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스스로가 부끄럽고 한심했다. 아버지가 마지막 숨을 헐떡이던 모습, 아버지의 숨이 끊어진 후 울면서 "이 지겨운 것... 내가 뽑아줄께" 하며 그의 옆구리에서 일년간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담즙 배액관 튜브를 뽑아내던 어머니의 통곡이 뇌리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그녀는 이제껏 그냥 우연히 손에 닿는 대로 선택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지만, 아버지의 죽음이 그 속에서 갖는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16세 소녀에게 사무치는 슬픔과 고통을 안겨, 지금까지도 마음 한 곳에 어두움을 드리우고 있는, 그 한 죽음을 말이다.  


처음으로 그 책의 행방을 물었을 때, 엄마는 집에 한 권도 남겨놓지 않으셨다고 했다.  

"왜?"  

“한 번 읽어 보려고… 내가 그런 환자들을 많이 보니까. 환자 보는 데 도움이 될까 해서.”  

“그걸 뭐하러 읽어! 창피해서 다 버렸어.”  

“인터넷에 검색하면 나오던데… (물론 검색하면 같은 제목의 가수 이은하의 노래가 주로 나오고, 부모님의 성함을 함께 검색해야 도서관 서지 정보 정도가 겨우 나온다)”  

“검색하지 마…”  

얼마 후 엄마가 우리집에 다녀간 이후 헌책방에서 주문해서 꽂아 놓았던 그 책이 없어졌다. 아마도 엄마가 숨겨놓거나 버리거나 했겠지. 결국 나는 그 책을 우연히도 한권 가지고 있던 나의 오랜 벗에게 부탁하여 다시 손에 넣었다.  

“아직도 그대는 내사랑”은 아마도 엄마가 즐겨 흥얼거리던 노래 같은데, 들어본 지가 꽤 되었다. 어쩌면 뇌리에 계속 남아있던 가사를 운명처럼 책의 제목으로 정해놓고서는 본인도 오글거려 노래마저도 부르지 못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나조차도 느껴지는,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민망함. 처음 고등학생 때 이 책을 보고서는 느꼈던, 차마 책장을 넘겨보지 못할 정도의 통증이 떠올랐다. 이제 세월이 많이 흘렀고 나도 어린애가 아니니, 그런 건 괜찮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빛이 바래 누런 책장을 넘겼을 때 눈물이 계속 흐르는 것은 역시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한편으로는, 20년전의 투병 과정인데도 어쩌면 이렇게 요즘과 똑같은 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신문과 TV에 나오는 새로운 암 연구결과에 일희일비하는 것, 지푸라기라도 잡듯 각종 민간요법에 매달리는 것, 병원과 의료진에게 고마워하기도 하지만 서운함과 아쉬움이 더 많은 것, 갑작스런 증상 악화에 어쩔 줄 몰라 하며 응급실로 달려가는 것…. 그만큼 말기암 환자의 고통을 덜어준다는 측면에서는 사회도, 병원도 그다지 달라진 것이 없다는 뜻이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죽어가는 사람과 가족의 고통은 의학과 기술의 발전으로도 해결하기 어려운 본질적인 고통일까 싶기도 하였다.  

특별할 것 없는 사람들이 쓴, 대단한 사건도 아닌, 그저 한 남자가 구질구질한 일상 속에 죽어가는 이야기일 뿐인 이 책이 나에게는 중요한 텍스트가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부모님의 일기는 죽음을 앞둔 사람과 그 가족이 상황을 각자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그런 고통이 어떻게 일상이 되는지를 말해준다. 하지만 그 일상을 조금은 더 평온하게 유지할 수 있고 조금은 더 특별하게 장식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인 것만은 아니다. 암환자의 가족이었지만 지금은 암환자를 보는 의사가 된 사람으로서, 지금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이 있지 않을까?  

그 말들을 정리해보기 위해, 글을 써보기로 했다. 그게 나에게도 치유의 과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난 이제 암환자의 가족이 아니라 그들의 무너지는 마음을 붙잡아주어야 하는 치료자이기 때문에, 계속 그들 곁에서 옛날의 비슷한 처지인 나를 불쌍해 하며 울고 있을 수가 없다. 글을 쓰며 옛날로 돌아가 실컷 울고, 울 것은 다 울고 나면, 조금은 그 슬픔을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고 나면, 내 환자들에게 위로가 되고 도움이 되는 말들을, 또는 몸짓들을, 울어버리지 않고 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그들이 기댈 수 있는 치료자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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