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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Sep 03. 2018

영어학원 원장님에게 배운 것  

초6아들은 방과후 영어교실에 다닌다. 우리는 초 1 딸도 거기 보낼 예정이었는데,  교육부 정책에 따라 초1,2는 방과후 영어교실에 참여가 어렵게 되었다. (정말 잘못된 정책이라고 생각한다) 유치원때부터 영어 학습지를 했던 아들과는 달리, 딸은 취학전엔 구몬영어로 스펠링 정도 익힌 수준이었고, 여름방학 전까지는 영국문화원 어학원에 다녔다. 파닉스와 동화책 읽기를 조금 하긴 했지만 아직 영어에 익숙해지는 수준이고 단어를 읽거나 스피킹이 되는 수준은 아니었다. 영국문화원은 아마 원어민선생님에게 수업과 관련된 자율성을 부여하는 경향이 좀더 강한 것 같았고 우리나라 학원같이 커리큘럼이 빡빡하지는 않아보였다. 교재로 진행하는 동화책을 아이가 읽기 어려워하는 것 같다고 알림장에 (영어로...) 썼더니 선생님의 반응은 it's ok, the textbook is too difficult for  the beginners like Minseo, I understand,  she was enthusiastic in the class, she  is doing well...  이런 안심시키는 반응이 대부분이어서 나는 크게 걱정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영국문화원 어학원은 우리집에서 전철 5정거장 정도 거리인데, 어른이 다니기엔 무난하지만 아이를 주 2회 통학시키기엔 너무 멀었고, 연로하신 할아버지가 데려다주시거나 아빠나 엄마가 일찍 퇴근해서 전철을 타고 왕복을 해야 했기 때문에 지속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결국 어제 아이 친구가 다닌다는 동네 영어학원에 가서 레벨테스트를 보게 되었다. 동네라고는 했지만 교육열 높은 지역의 영어유치원을 겸한 곳이라 꽤 큰 곳이었고, 전화를 미리 했을 때 응대하는 이도 친절해서 맘에 들었다. 들어오자마자 데스크에서 반갑게 맞아주었고 상담실로 우리를 안내했는데, 곧 누군가 와서 아이를 레벨 테스트를 하러 데려가고 어떤 50대-60대쯤 되어보이는 여자분이 들어왔다.

들어오더니 자기 소개 없이 인사만 간단히 하더니 내가 작성한 학생카드를 (이전의 영어공부 경력과 인적사항, 주소와 가족관계 부모 직업 학력까지 모두 적으라고 해서 착실히 다 적었다) 쭉 살펴보더니 영어학원 커리큘럼을 소개하며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파닉스는 할 수 있는 수준이냐. 영국문화원은 얼마나 다녔냐. 주 몇회 몇시간 하냐. 1학년들은 3월부터 파닉스를 스타팅 (R 발음을 매우 굴려서 발음하심) 한 반이 제일 기초반인데 여기 들어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 사람은 교사인지 관리자인지 헷갈리는 상황에서 이런 구체적인 질문을 당하는 일이 편치 않았다. 결국 먼저 물어봤다.

"저...원장선생님이신가요?"

"네."

곧이어 아이가 테스트를 마치고 돌아왔고 원장은 나가서 테스트를 한 선생님과 몇 마디 하더니 들어와서 얘기했다.

"음... 아이가 레벨이 안나오네요. 영국문화원 다닌건 맞나요? "

"..네?"

"아이가 기초가 너무 없어서... 어떻게 도와드려야 되나..."

굳이 도와달라고 한 적은 없는데요. 뭐 어떻게 하려는 거지.

"엄마가 진도를 따라갈 수 있도록 도와주실 수 있으세요? 아니면 주 3회 다니는건데 한번 더 나와서 보충수업을 하는 방법도 있어요."

음. 어느 정도 예상했긴 했지만 좀 충격이다. 소설 '잠실동 사람들'에 나오는, 동네 영어학원에 들어가기 위해 과외를 한다는 게 이런거구나. 주 4회 영어학원에서 2시간씩 지내도록 할 수 있을까. 너무 힘들것 같은데.  게다가 아이가 하고 싶어하는 방과후 활동도 있는데 그것도 다 엎어야 한다. 생각해보겠다고 하고 영어학원을 나왔다. 학원 현관문에 "pull"이라고 되어 있는데 내가 문을 밀고 나가서 문 바깥의 매트가 밀렸다. 원장은 안녕히가세요 하며 매트를 제자리로 해놓으려는 나에게 괜찮아요 그냥 가세요 한다. pull이라는 단어를 이해하지 못하는 무식한 엄마라고 생각했을까 싶어 괜히 부아가 난다.


결국 우리는 영어학원을 포기하고, 더 기초부터 가르쳐주는 개인과외선생님을 찾았고, 이번주에 새로 시작할 예정이다. 1학년에, 아니 학교 입학하기도 전에 파닉스를 다 떼고 회화도 가능한 친구들을 따라잡으려고 노력하면서 버둥거려야 할까. 그냥 아이가 스스로를 믿도록 더 아이를 사랑해주고 격려해주어야지 싶다. 그리고 처음 만난 학부모에게 자기 소개를 하지 않는 원장을 보며 내가 그동안 했던 행동들도 반성이 되었다.

병동 컨설트를 보러 다니며 "안녕하세요 종양내과에서 왔는데요"라고만 간단히 스스로를 소개한 것은 사실 상대방이 말하지 않아도 나를 알거라는 자만때문은 아니었다. 왠지 쑥스럽기도 하고 진료과 이름 앞에 붙은 '종양'이라는 말에 처음 진단받은 환자가 소스라칠까봐 말하기가 두려워져서도 그랬다. 하지만 환자 입장에서는 '종양'이라는 낱말이 주는 두려움보다 갑자기 내 침상 앞으로 다가와 이것저것 묻기 시작하고 진찰을 시작하는 낯선 사람에 대한 당혹감이 더 클 것 같다는 생각이 비로소 들었다. 아무리 가운을 입어도 그건 병원이 주는 권위를 장착했을 뿐이지 내 소개가 아니다.

"안녕하세요 종양내과 XXX 교수입니다. 주치의선생님께 환자분을 봐달라는 진료의뢰를 받고 왔습니다." 라고 똑바로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내 입으로 내가 교수라고 말하기도 쑥스럽지만 (테뉴어가 아닌 임상교수이니 더 민망하다.) 어쨌든 전공의나 전임의가 아니고 계속 환자를 진료할 책임이 있다는 것을 표현하려면 그렇게 말해야 할 것 같다. 이 때 직급은 과시가 아니라 책임을 의미하는 거니까.

자기 자신이 암환자가 되고서 환자 중심의 진료와 돌봄의 중요성을 깨닫고 "Hellow my name is" 캠페인을 시작한 영국의 의사 케이트 그레인저의 부고 기사(http://www.hankookilbo.com/v/de80653067c5496f9300ea4d9ca587ae) 가 떠올랐다. 그는 먼저 환자에게 자기 소개를 하는 환자 이송반원의 배려에서 느낀 기쁨에서 이 캠페인을 시작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기사를 읽을 때는 이게 뭐야, 싶기도 했다. 제목부터 친절이라니. (나는 친절이라는 단어가 감정노동과 동의어로 생각되어 거부감이 있다) 그러나 낯선 공간에 놓여져 두려움과 긴장에 떨고 있는 누군가에게 자기 소개를 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큰 의미가 있다는 것을 겪어보니 알게 된다. "안녕하세요. 나는 당신이 누구인지 알고 있지만 당신은 나를 모르죠. 이제부터 알면 됩니다. 내 이름은  XXX 입니다. 그러니까 안심하세요. 괜찮습니다." 그런 의미가 아닐까.


내 마음을 상하게 한 사람에게서도 배울 점을 찾고 내 것으로 만든다는 것은 꽤 괜찮은 일이다. 아이는 학교에 갔고, 나는 출근해서 오늘의 회진과 컨설트 명단을 출력하며, 힘차게 하루를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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