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OncoAzim Aug 25. 2019

세상에 넘실대는 좌절  

명문대생들의 촛불시위를 보며

아들이 영어학원에 다녀와서 쇼미더머니를 보고 있다. 종종 잔소리를 하는 편이긴 하지만 조금씩 추가해온 학원이 점점 늘어나서 일주 중 하루도 학원을 안가는 날이 없게 되었으니 (물론 일부는 본인이 좋아서 다니는 피아노와 일렉기타이긴 하지만) 측은해서 그냥 두고 있다. 대한민국에서 아이를 키우는 일은 누구에게나 힘겹고 피곤하고 혼란스러운 일이다.


조국씨 자녀 일로 세상이 들썩인다. 다들 본인은 흙수저라고 생각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지방유지들의 자녀들이 주로 다니는 교대부속국민학교를 다니면서 시내  대형 약국집 아들의 바이올린, 한의원 집 딸의 나이키 운동화를 보며 자란 나는 그때도 나를 흙수저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내가 정말 부모에게 받은 것이 없었나. 국민학교 다닐 때 사회과목 숙제를 아빠한테 물어봐서 해간 적이 있다. 경상수지 무역흑자 뭐 이런 단어를 설명해가는 숙제였는데 경제학자이던 아빠는 본인전공이라 엄청 좋아하시면서 가르쳐줬다. 지식노동자의 습관과 모럴과 자존심을 그는 물려주었다. 그건 감귤 과수원을 하는, 시장에서 옷집을 하는 집안에서 자라난 친구들은 얻지 못할 것들이었다.

80년대에 2부제를 안하고 통학버스가 다니고 급식이 나오던 (그래서 보내려면 추첨에 도전해야 하는 시간과 의지가 있어야 하고 돈이 어느 정도 있어야 했던) 교대부국을 다닌 것 자체가 특권이었다는 것을, 농민 자녀가 많았던 중학교에 가서 알았다. 물론 그 따위를 특권이라 여기다니 정신승리라고 해도 할 말은 없다. 그러나 요즘처럼 사회경제적 계층에 따라 거주지가 나뉘어져서 학교에서 계층간 섞일 일이 없는 사회에서는 본인이 가진 특권을 깨닫는 기회 자체가 없다. 그렇게 자란, 본인에게 당연히 주어진 것이 없는 이들도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자란 사람들이 더 갖지 못한 자신의 처지에 좌절하고 촛불을 든다. 그들은 아래를 보지 않는다. 위만을 본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본다. 그러다 보면 분노가 일어날 수밖에 없다. 


촛불을 들었다는 서울대와 고려대학생들의 분노는 나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는 있다. 나도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으니까. 경우는 좀 다르긴 하지만, 좀더 쉬운 (쉬워 보이는) 길을 통해 내가 힘겹게 얻은 것을 가진 자에 대한 분노 말이다. 고향의 국립의대를 나와서 나의 모교병원 레지던트로 들어온 국민학교와 중학교 동창들을 만났을 때 나는 반갑게 그들을 아는 척 할 수 없었다. 화가 났다. 의도적으로 그들을 무시했다. 그들보다 나는 공부를 잘해서 서울대에 입학했고 (참고로 나는 수능+본고사 시절 입학했다. 물론 서울아이들은 내신빨로 들어왔다 무시했을 수도 있겠다) 객지에 와서 갖은 고생을 하며 공부를 했는데, 집에서 편하게 학교 다닌 그들과 왜 같은 대우를 받아야 하나, 그런 못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나름의 노력을 했고 지금은 훌륭한 의사들이다. 적어도 그들은 나의 기회를 빼앗지 않았다.

조국씨의 딸은 명문대에 들어가지 못한 다른 이들의 기회는 빼앗았을지 모르겠다. 지방대에 다니는, 혹은 대학에 가지 못한 이들이 촛불을 들었다면 그것에 대해 뭐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그곳에 있는 당신들의 기회를 빼앗진 않았다. 설마 기회를 빼앗긴 이들을 위해 자신들이 나선 것이라고 말하지는 않겠지? 당신들은 그저 그가 자신들과 동급으로 대우받는 것을 견디지 못하는 것 뿐이다. 내가 그런 생각 해봐서 안다. 


원래 글은 촛불 든 이들을 나무라는 말로 맺었다. 갖지 못한 것보다 이미 가진 것들을 생각해보라고. 그걸 갖지 못한 이들을 생각해보라고. 그러나 생각해보면 그들의 깊은 좌절은 그것 나름으로도 이해받아야 할 성질의 것이긴 하다. 더 못가진 이들은 입을 닫았다. 아예 그런 금수저와 자신과 비교할 생각조차도 못하는 것이다. 그나마도 분노하는 이들은 세상을 살아갈 의욕을 가진 이들이다. 그들 역시 아래를 내려다볼 여유가 없다. 말하지 못하는 자도, 소리높여 말하는 자도, 좌절하고 있다. 세상에 좌절이 넘실대고 있다. 

내 아이는 어떻게 키워야 할 것인가. 아니 내가 키우려는 방향대로 키워지기나 할 것인가. 우리 아이는 SKY는 아마 못갈 것 같지만 벌써 왜 선행학습은 미리 안시켜줬냐고 하는 걸 보니, 여행갈땐 비즈니스석에 앉아봤으면 좋겠다고 하는 걸 보니, 부모의 재력과 시간과 정보력에 대한 아쉬움이 있는 것 같다. 이 아이는 아래를 내려다볼 줄 아는 아이가 될 수 있을까. 아니 그것이 이 아이의 삶에 과연 도움이 되는 것일까. 아이들을 위해 우리는 어떤 것을 할 수 있을까. 

작가의 이전글 몸에 박힌, 몸이 아닌 것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