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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Nov 13. 2018

몸에 박힌, 몸이 아닌 것들

“이 지겨운 것…. 이 지겨운 것…”


아빠가 돌아가셨을 때 시신에서 담즙배액관 (보통 PTBD (percutaneous transhepatic biliary drainage)라고 부르는, 간내답도의 담즙을 배출하는 플라스틱 관을 피부에 삽입해놓은 것이다)을  빼면서 엄마가 울먹이며 되뇌었던 말은 아직도 뇌리에 남아있다. 보통은 병원에서 임종하는 경우에는 의료진이 제거하지만, 아빠는 임종 직전에 자택으로 옮겨와 집에서 숨을 거두었기 때문에 그 일을 한 것은 엄마였다.

엄마는 일년여동안 아빠의 오른쪽 옆구리에 박혀 있던 가느다란 플라스틱 튜브를 당신의 손으로 잡아 뺐다.  

엄마와 아빠의 일기에서 PTBD는 당신의 자식들 이야기보다 더 자주 등장한다. 오늘은 담즙이 얼마나 나왔는지. 색깔은 어땠는지. 삽입부위가 얼마나 아팠는지. 어느 날 PTBD에 달려있는 담즙 주머니를 아빠가 실수로 밟아 일부가 빠져나왔을 때의 충격과 공포는 대단했다. 엄마가 외출한 동안 일어난 일이라, 아빠는 괜히 죄없는 엄마를 탓하고는 이내 후회한다. 인근 병원에 가서 관을 제거하고 다시 삽입하는 시술을 받고 또 열이 나서 입원하게 되는 과정들을 읽노라면 마음 한켠이 답답해지고 그저 속상할 뿐이다. PTBD는 아빠의 몸 안에 있던 암덩어리로 막혀 고여 있던 쓸개즙을 빼내어 삶을 희미하게라도 이어가게 해준 생명줄이었던 동시에, 두 분의 삶의 비극을 총체적으로 드러내는 상징이었다. 그것을 자기 손으로 빼내는 그 순간, 남편의 몸 안에 들어있던, 살아서는 그 끝을 직접 볼 수 없었던 그 원망스런 관의 끝부분을 보았을 때 엄마가 느꼈던 것들을 나는 아직도 감히 헤아릴 수가 없다.  


만약의 경우 남편에게 이런 일이 일어나면 나는 제일 먼저 옆구리의 카테터를 내 손으로 뽑아버리려고 생각했던 것을 실행에 옮겼다.  “여보, 잘 가. 이 지겨웠던 것은 내가 뽑아 줄께. 내가 없애줄께. 당신을 지겹도록 괴롭혔던 이 줄을 뽑아줄 테니까 부디 잘 가.” 나는 혼자서 이렇게 중얼거렸던 것 같다.  


그런 PTBD를 나는 한달에 두세 명 이상의 환자에게 넣고 있다 (내가 직접 넣는 것은 아니고 시술은 영상의학과에서 하며, 종양내과 의사는 이 시술을 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리고 요청하는 역할을 한다). PTBD 외에도 암환자들에 몸에 삽입되거나 새로 달리는 장치들은 많다.

PTBD 삽입부위를 스스로 소독하는 환자의 모습을 그렸다. 무균상태인 체내와 직접 연결되어 있는 관이기 때문에 매일 소독이 필요하다. 

암덩어리들은 몸 안에서 자연스레 흐르고 배출되어야 하는 담즙, 소변, 대변이 향하는 길목을 막고 서서 행패를 부린다. 다른 우회로라도 터주어야 몸의 기능이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담즙은 간에서 만들어져서 십이지장으로 배출되어야 정상인데, 그것이 나가는 길이 막혀 간에 고이게 되면 황달이 생기고 담관염이 생겨서 자칫하면 패혈증으로 악화될 수 있다. 소변이 배출되지 못하면 콩팥이 부어서 옆구리가 아프고, 노폐물이 몸에 쌓여서 붓고 숨이 차며 의식이 흐려지기도 한다. 대변이 배출되지 못하면 창자가 팽창하며 복통이 생기고 심하면 뱃속에서 파열이 되어 복막염으로 갑자기 사망할 수도 있다. 이런 파국을 막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장치들이 담즙배액관, 소변줄, 인공항문 등이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을 바깥으로 표가 나지 않도록 몸 안에 넣어 해결하려는 시도들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고, 예전에 비해 바깥으로 나와있는 부분 없이 체내 삽입형의 스텐트로 해결할 수 있는 경우가 점점 늘어나고 있다.

암의 합병증을 해결하기 위한 것 이외에도 치료를 위해 삽입되는 인공물들도 있다. 치료를 용이하게 하기 위한 케모포트, 히크만카테터 같은 중심정맥관들이다. 주사를 맞을 때마다 말초혈관을 찾아 바늘로 살을 찌르는 고통과 수고를 덜기 위해 만들어진 이 장치들은, 수일에 한번씩 또는 연속으로 며칠간 연달아 투여되는 항암제들이 몸 속으로 순식간에 퍼져나가게 되는 고속도로를 몸에 깔아놓은 것과 비슷하다.


생각해 보면 암 치료만큼 우리 몸에 많은 이물질을 집어넣고 연결하여 생채기를 남기는 질병이 얼마나 있을까. 그러나 암 치료의 대부분은 언제나 최악을 피하기 위한 차악이다. 암으로 인한 합병증보다는 그 이물질을 가지고 사는 삶이 고통은 덜하고 좀더 오래 산다. 그러나 환자들도 정말 그렇게 생각하는지 우리 의료진들은 별로 묻지 않는다. 당장의 차악을 피하려다 이후의 최악을 만나 차악마저도 선택하지 못하는 경우을 너무 많이 봤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몸에 달린 이물질들이 환자와 가족의 마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그것들을 가지고 사는 삶에 대해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는가. 

환자들은 이물질이 박혀있는 자신의 몸을 꽁꽁 숨기고 살기 때문에, 대부분의 (암을 앓았거나 암환자를 돌본 경험이 없는) 사람들은 이런 장치를 달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 자체를 잘 모른다. 우연히 알게 된 이들은 그 낯섦에 겁에 질린 표정을 지을 뿐.

몸 안에 이물질을 넣고 사는 삶은 당연히 불편하고 괴롭다. 그러나 넣지 않고 사는 삶이 더 괴롭기 때문에 넣은 이상, 그 고통은 감내해야 할 수밖에 없다고, 의료진들은 생각한다. 불편하다고, 신경쓰인다고 외래에 올 때마다 이야기하는 분들이 많지만, 그것들이 감염 따위의 합병증이 없는 것만 확인하고 안심시켜주는 몇 마디 말을 던지는 것이 사실 짦은 진료시간동안 해줄 수 있는 전부이다.  

이것을 안 넣을 수는 없는 걸까. 넣지 않은 삶도 괴롭지만 넣고 사는 삶도 혹시 그만큼 괴로운 것은 아닐까. 차악이 최악보다 정말 나은걸까. 늘 생각하는 것이지만, 수없이 저울질을 하지만, 대개는 안 넣을 수가 없다. 때로는 냉혹한 과감함이 환자를 위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간 전이가 진행된 대장암 환자분이 황달이 생기면서 응급실로 내원했다. 두 달 전 항암제에 내성이 생기고 더 이상 암을 줄일 수 없는 방도가 없어 말기로 진단을 내렸던 분이다. 간 전이암이 진행하여 폐쇄성 황달이 진행하였고, 온 몸이 누렇게 변했다. 내시경으로 담도스텐트를 넣었지만 황달은 가라앉지 않았고, 결국 PTBD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폐쇄성 황달로 변한 몸은 사실 노란 색이라기보다는 까맣다. 황달의 황은 누를 황이나, 노란 색보다는 좀더 탁하고 어두운 색이며 오히려 붉은 색에 가깝다. 십이지장으로 빠져나가야 할 담즙이 혈액에 섞여 들어가면서 온 몸의 피부와 점막을 물들이는 그 색깔은, 아마도 ‘죽음의 색’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가장 적절할 지도 모른다.  

70대 초반이지만 할아버지라기 보다는 아저씨라는 호칭이 더 어울렸던 건장한 촌부가 침상에 누워 있다. 시골 햇빛에 그을렸던 피부에는 그 죽음의 색이 드리워져 있다.  

“배액관은 한번 넣으면 계속 갖고 계셔야 할텐데... 그냥 지내보시는 것도 방법입니다.”

“그럼 뭘 더 안해도 되는거요? 황달이 다른 방법으로도 내릴 수 있는 건가?”

애써 희망을 찾으려는 목소리. 

"물론 황달을 다른 방법으로 내릴 방도는 마땅히 없기는 합니다. 항암제로 암을 줄일 수 있다면 당장 황달부터 해결한 다음에 항암제를 쓰는데... 환자분은 황달이 해결되어도 그 다음 대안이 마땅치 않아요. 황달만 내리자자고 옆구리에 관을 넣기에는 너무 불편하실 것 같습니다.  다만 혹시 합병증으로 담관염이 생길 수도 있는데 그땐 관을 넣으셔야 할 수도 있습니다.  ”

PTBD를 넣어도 안넣어도 기대여명은 수 개월이라, 배액관 없이 지내보면 어떨까 하는 얘기를 나는 이렇게 한다. 넣으라는 얘기인가 말라는 얘기인가. 내가 들어도 혼란스럽다. 그러나 배액관 삽입을 안했을 때의 최악의 상황에 대해 말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 ...그때 옆에 있던 전임의 선생님의 한마디.

“선생님 환자 전신상태나 랩(혈액검사결과)은 괜찮긴 합니다만 어제 열이 한번 나긴 했었습니다. 그리고 곧 주말이라…”

그러면 아무래도 불안하다. 담관염 초기일 수도 있는데, 주말동안 만약 악화되어 패혈증으로 악화되기라도 하면… 그땐 PTBD를 할 수 밖에 없는데, 그보다는 미리 하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주말, 특히 야간에 영상의학과에 연락해서 PTBD를 해달라고 하면 연락이 빨리 안될 수도 있고, 의사 뿐만 아니라 영상기사, 간호사들도 응급출동을 해야 한다. 게다가 주중에 계획된 시술보다는 응급시술의 위험이 높은 것은 어쩔 수 없는 일. 게다가 영상의학과에서 주중에 온 환자를 왜 미리 안해놓았느냐고 당직 전공의를 타박이라도 하면 서로 몸과 마음만 상하고 지치게 될 것이다. 안전한 불편과 불안한 편안함 사이. 어차피 오게 될 최악을 막기 위한 차악과, 당장의 최악 사이. 아무래도 의사의 선택은 전자가 될 수밖에 없다.

궁극적인 것은 환자의 안녕이어야 하겠지만, 그것을 위해 무엇이 최선의 방법인지는 늘 고민스럽다. 사람들은 의사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의사도 종종 혼란에 빠지곤 한다. 아빠를 생각하면서 가능한 한 안 넣고 싶었던 마음. 그러나 결국 불확실함에 굴복하고 만다. 그는 아마도 남은 2-3개월의 시간을 PTBD와 함께 하게 될 것이다. 아빠처럼.  


한 의료사회학자가 자신의 항암치료 이야기를 쓴 책인  <아픈 몸을 살다>[1]에서 글쓴이 아서 프랭크는 중심정맥관 (체외로 일부 노출되어 있는 히크만 카테터인 것으로 보인다)이 자신의 삶에서 차지했던 의미에 대해 말한다.  


내 몸에 연결된 정맥 라인에는 바늘이 붙어있지 않았다. ‘중심정맥관’이라 불리는 영구 도관을 삽입하는 시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중략) 도관은 내 몸의 일부가 됐지만, 내 몸은 더는 완전히 나만의 것이 아니었다. 중심정맥관은 내 몸에 붙어 있는 암을 상징해서, 몸 상태가 좋게 느껴질 때도 여전히 가슴에 달린 채로 암과 관련된 모든 것을 상기시켰다.  (중략)  중심정맥관은 의학이 내 몸에 꽂은 또 다른 깃발이었다.


의학이 꽂은 깃발. 점령당한 몸. 몸에 박힌 도관은 적군이 아니라 암에게 맞서 싸우면서 요청한 지원군이 꽂은 깃발이긴 하지만, 온전한 몸이 아님을 늘 상기시켜주는 존재다. 질병을 극복하고자 내 안에 받아들인 이물질이지만 늘 질병을 떠올리게 하는 역설적인 상황. 도관이 박힌 몸은 무균상태이어야 할 몸의 내부가 바깥과 연결된 상황으로 (물론 바깥 공기에 그대로 열려있지는 않다. 도관의 끝은 배액, 채혈 또는 약물주입시에만 무균적으로 취급하고 그 외에는 항상 닫힌 상태로 두어야 한다는 것은 의학적 처치의 기본이다), 사실 의학적으로도 매우 감염에 취약한 상태일 뿐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온전한 존재로서의 가치가 떨어진 듯한 자괴감을 안기게 된다.

히크만카테터는 심장으로 연결되는 두 개의 굵은 도관이 가슴에 박혀있다. 생명을 살리기 위해 의학이 몸에 꽂은 가장 강렬한 깃발들 중 하나다.

그러나 중심정맥관은 아서 프랭크에게 간병을 하던 아내와의 접점이 되기도 했다. 중심정맥관을 소독하고 세척하는 시간은 아내와의 신체적, 정서적 접촉을 하는 일종의 의식이 되었고, 그것은 그가 질병이라는 낯선 존재와 마주하면서 겪는 새로운 경험이기도 했다.


 신체를 돌보는 데는 정서적인 지원도 필요하며, 정서적인 지원에는 신체적인 연결이 필요하다. 우리 부부에게는 중심정맥관이 서로를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다. 도관 관리는 매일 해야 한다. 도관이 나와 있는 부위를 소독하고 반창고를 붙여두어야 했으며, 한 차례의 화학요법 치료가 끝나고 다음 차례까지의 기간에는 도관을 식염수로 세척해야 했다. 아내과 소독하고 세척하고 반창고를 붙이는 일을 맡았고, 이 일은 우리 관계에서 매일의 의례가 되었다. 아내와 나는 “우리가 함께 보내는 특별한 시간”이라고 농담했지만, 정신없는 삶 한가운데서 조용했던 그 시간은 농담이 아니라 정말로 선물과도 같았다.  


그 원망스러웠던 PTBD도, 역설적이지만 엄마와 아빠를 이어주는 매개체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아빠가 열이 나서 괴로워하던 밤이 그렇게 많았는지를 나는 책을 읽으며 처음 알았다. (PTBD는 담관염의 악화를 막기 위해 넣지만 그것 자체가 감염증을 일으키기도 하며, 특히 관이 담즙이나 혈액 찌꺼기로 막힐 때면 간헐적으로 배액이 안되면서 발열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 수많은 밤을 아빠를 간호하며 PTBD에 식염수를 넣어 세척하기를 반복하던 엄마. 그런 엄마를 보며 미안해 하는 한편 애달픈 사랑을 표현하는 아빠의 마음을 읽을 때면, 그 시간에 세상 모르고 자던 아이는 아득한 슬픔에 뒤늦은 눈물을 흘린다.  


적지 않은 환자들에게 ‘그 날’은 온다. 몸에 박혀 있는 관을 빼는 날. 아서프랭크는 중심정맥관을 제거하던 날을 '내 몸이 다시 내 것이 되는 입회 의례'로 표현한다.


입회 의례에서 몸에 내는 흉터는 해당 구성원이 일정 수준의 경험을 통과했다는 사실을 표시하고 더 높은 지위를 가질 수 있는 자격을 부여한다. 중심정맥관 제거는 이런 입회식과도 같았다. 내 몸은 다시 내 것이 되었다.  삶이 다시 시작됐다. 물론 나는 삶이 멈춘 적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바흐를 듣던 밤들, 샤갈의 그림 위에 비치던 오후 햇빛, 아내와 함께한 희망과 공포의 순간들, 상실과 절망, 이 모든 것 또한 삶이었다. 삶은 암을 앓는 동안에도 결코 멈춘 적이 없다. 단지 더 강렬했을 뿐이다.  


관을 제거할 때 그가 아내와 껴안고 “기쁨과 안도가 뒤섞여서이기도 했지만 그저 진이 빠져서” 흘렸다는 눈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알 수는 있을 것 같다.

전공의 때 골수이형성증후군[2]으로 조혈모세포이식을 받은 환자를 병실주치의로서 담당한 적이 있었다. 그 분을 수 개월 후 외래 주사실에서 콜을 받고 내려가 다시 만났다. 완치 판정을 받고 히크만 카테터를 빼러왔다는 것이다. 왠지 내가 보던 환자가 완치되어 관을 뺀다고 생각하니 뭉클했고, 이식했을 때 큰 위기[3] 없이 무난하게 회복되었던 사람 좋은 아주머니는 그저 기뻐하며 싱글거렸음에도 나는 카테터를 제거한 후 돌아서서 왠지 울컥했다. 수술장에서 히크만 카테터를 넣고 올라오던 날. 항암제가 시작되던 날. 동생분의 조혈모세포를 채취해 이식[4]하던 날. 백혈구 수치가 0을 찍던 날. 머리가 빠지고 입안이 헐고 열이 나던 괴로운 순간도 묵묵히 잘 견뎌내던 아주머니는 더 위독한 환자를 보느라 바쁜 나에게 제대로 힘든 것을 하소연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그런 무균병동에서의 나날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환자의 마음 속엔 나보다 더 생생한 기억들이 되살아났으리라.


몸에 박힌, 몸이 아닌 것들. 그것을 살아서 제거한 이들은 고통과 위험을 온 몸으로 받아들이며 통과했다는 표징을 지니게 될 것이고, 그것을 죽어서 제거한 이들, 아빠와 같은 이들에게는 이승에서의 고통에서 해방되어 영원한 안식에 들었다는 의미를 지닌다. 그것들은 패배도, 추함이나 거추장스러움도 아닌, 인간이 마주한 표정 없는 운명이자, 그것에 맞서 견디는 인간의 숭고함을 드러내는 장치와도 같다고 느낀다.



 [1] 아서프랭크 저, 메이 옮김, 아픈 몸을 살다, 봄날의 책, 2017

[2] 골수이형성증후군 (myelodysplastic syndrome)은 혈액세포를 만드는 조혈모세포의 이상으로 인해 혈액세포의 수가 줄어들고 빈혈, 감염, 출혈 등의 증상이 발생하는 질병으로, 사실상 혈액암의 한 종류로 구분된다. 고위험군은 급성골수성백혈병으로 진행할 위험이 커서 조혈모세포이식을 고려하게 된다.

[3] 동종조혈모세포이식은 골수 세포를 거의 비우는 강력한 항암화학요법 이후 공여자의 조혈모세포를 이식하는 방법이다. 우리 몸의 면역계가 한꺼번에 무너졌다가 새로 세워지는 대 공사이기 때문에 각종 감염증에 노출되고 대부분 패혈증 등의 각종 감염증상을 겪게 된다. 이 과정에서 치료로 인한 사망률은 최근 많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약 10-20% 정도에 이른다.  

[4] 조혈모세포이식은 흔히 간이식, 신장이식 등 고형장기 이식과 같이 수술적 치료가 아니다. 흔히 언론에서 조혈모세포 이식수술이라고 표현하는 것을 종종 보는데 틀린 표현이다. 조혈모세포 이식은 공여자의 골수 또는 말초혈액에서 뽑아낸 조혈모세포를 히크만 카테터를 통해 수혈처럼 주입하는 방법이며 수술장이 아니라 무균병동에서 이루어진다. 히크만 카테터는 항암치료 뿐만 아니라 이식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장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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