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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Nov 06. 2018

죽기 전의 소원인데, 제발...


종양내과 외래의 초진환자는 당연하지만 다 암환자다. 같은 암환자여도 병의 상태와 여기 온 이유는 조금씩 다 다르기에 약 5-10분 정도 주어진 시간 동안 많은 것을 파악해야 한다.

처음 암 진단을 받은 환자는, 본인에게는 그렇지 않겠지만, 의사 입장에선 비교적 간단하다. 내가 근무하는 상급종합병원이라는 특성상, 대개 진단은 다른 병원에서 이미 내려진 상태에서 마음을 정리하고 내원하는 경우가 많다. 믿기지 않는 마음으로 진단을 다시 확인하고자 오는 분들도 있다. 이런 분들에게는 검사결과를 설명하고 필요하면 검사나 치료 일정을 잡으면 되므로, 비교적 빨리 끝난다.

가장 어려운 경우는 다른 병원에서 치료를 받던 분이 내원하는 경우이다. 항암제가 잘 듣지 않는다, 더 이상 쓸 항암제가 없다고 듣고 이곳 저곳을 알아보는 상황. 그나마도 쓸 수 있는 약이 있거나, 임상시험에 들어갈 수 있거나, 혹시 수술이나 방사선치료, 고주파 시술 등 다른 방법을 써볼 수 있는 경우가 드물게 있지만, 대부분은 한 병원에서 말기 판정이 내려지면 다른 병원에서 바뀔 가능성은 크지 않다. 대개는 설명을 하면 낙담한 채 돌아서지만, ‘큰 병원에 가서 무엇이라도 해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로 남을 것 같다’는 환자와 가족의 간절한 바램을 뿌리치기 어려울 때도 많다. 그럴 땐 어떻게 해야 할까. 아직도 잘 모르겠다. 아래의 글은 작년에 그런 환자의 임종을 맞이하고 적어놓았던 글이다.


A 대학병원에 입원중이라는 50대 남자의 부인이 저의 외래를 방문했습니다. 가져오신 CT를 보니 전이된 암덩어리들이 뱃속을 온통 뒤덮은 상황입니다. 수술, 방사선치료, 항암치료를 했지만 병이 진행되어 현재 거의 드시지 못하고 스스로 거동이 어렵다고 합니다. 가져오신 차트와 영상을 봤을 때 항암치료를 더 해서 이 병이 좋아질 가망은 크지 않아보였습니다. 말기암이며 호스피스케어를 고려해야 하는 상황이다라고 말씀드렸지만, 보호자는 ‘환자가 이 병원에 너무나 오고싶어한다, 여기서 항암치료를 다시 해보고 싶어한다’며 입원시켜 달라고 반복하여 요청하였습니다. 저는 일단 다음 환자를 보기 위해  입원지시를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지 않으면 도저히 진료실을 나갈 기세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병실이 필요한 다른 환자들도 많은데, 입원해서 통증조절과 수분공급 외엔 할 수 있는 것이 없어보이는데…. 일단 환자가 입원하면 호스피스로 바로 전원시킬 작정이었습니다. 환자가 투병 과정에서 다른 병원에 가볼 걸 하는 후회를 하게 되면 그게 계속 가족들에게도 죄책감으로 남게되니, 이곳에 오고 싶어 하는 환자 마음만이라도 풀어주면 어떨까 싶었죠. 한편으로는 기나긴 입원 대기 기간동안 포기하기를 내심 바라면서 말입니다.
 그러나 환자와 가족은 몇 주에 이르는 대기기간동안 포기하지 않았고, 드디어 어느 금요일 늦은 오후에 입원했습니다. 오후 5시가 넘어서 전공의선생님이 난감했던지 저에게 카톡을 보냈습니다. 전신상태가 너무 나쁘다고. 혈액검사수치만 봐도 엉망이었습니다. 순간 짜증이 확 치밀어 올랐습니다. 왜 말기돌봄이 필요한 환자가 호스피스에 가지 않고 굳이 상급종합병원의 치료를 고집하는가. 왜 가망도 없는 당신의 몸에 헛되이 집착하는가. 왜 다른 치료 가능한 환자에게 쓰여져야 할 의료진의 노동력과 정신력을 낭비하도록 만드는가. 왜 응급실에서 대기하고 있는 환자가 갈 수도 있었던 자리를 빼앗는가. 왜 국민들이 피땀흘려 번 돈으로 따박따박 납입하는 건강보험공단의 돈을 낭비하는가.
 그러나 주말이 지나기 전에 한번은 환자를 봐야할 것 같아서, 바로 퇴근할 수 있도록 옷과 가방을 챙겨들고 가운을 입은 채 병동으로 향했습니다.

 

금요일 저녁 만났던 환자는 원하던 병원에 와서 그런지 안심하는 듯한 눈빛이었습니다. 소의 눈. 왠지 그의 눈은 제가 자주 본 적도 없는 동물인 소의 눈망울을 닮았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일하다가 결국 도살장으로 끌려가기 전까지도 누군가를 의심하지 않는 소의 눈. 혈액검사와 신체검진 소견은 의식이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독한 상태였지만 다행히 의사소통은 가능하였습니다. 일단 혈액검사상의 전해질 이상과 감염증을 먼저 조절해보자, 조금 편해질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겠다고 환자에게 말씀드리고, 부인을 병실 밖으로 불러서 설명을 했습니다. 위독한 상태이며 항암치료는 불에 기름을 붙는 격이라고. 원하시는 것은 항암치료 자체가 아니라 편안하게 계시고 싶은 것 아니냐고. 항암치료를 고집하실 줄 알았던 보호자는 의외로 쉽게 수긍을 하였습니다. 오고 싶던 병원에 오게 되어 환자의 소원은 풀어주었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놓인 것일까요. 아니면 기다리는 동안 점점 나빠지는 환자를 보며 상황을 받아들이시게 된 것일까요.

 

전해질 교정과 항생제 치료를 시작했지만, 환자는 이틀 후 임종하였습니다.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보았던 그의 눈. 그의 눈을 바라보며 상급종합병원 의료진의 노동력도, 부족한 상급병원의 병실도, 건강보험공단의 돈도, 어느 정도는 이루어질 수 없는 소망에 낭비하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사람의 일이니까요. 누구나 예외없이 불완전하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치를 매길 수 없이 소중한 사람이라는 존재 말입니다.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응급의학에는 트리아지 (triage)라는 개념이 있다. 우리말로는 ‘중증도 분류’ 또는 ‘중증도 판정’이라고 번역이 될 수 있는데 현장에선 그냥 트리아지라고들 부른다. 중증도에 따라 치료의 우선순위를 정하는 것이다. 가장 위중한 환자를 먼저 집중적으로 치료하고, 경증환자는 상대적으로 순위가 밀린다. 응급실에서 치료가 늦어진다고 불평하는 이들에게 우리는 어쩔 수 없다고 말한다. 제한된 인적 물적 자원을 효과적으로 사용하기 위한 방편은, 선택과 집중이 될 수밖에 없다. 경증환자를 치료하느라 중증환자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는 것은 정의(justice)가 아니기 때문이다.

불편한 것은, 치료를 해도 죽을 가능성이 높은 환자는 과감히 포기하는 것도 트리아지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트리아지는 19세기 유럽의 전쟁터에서 태동되어 재난의학에서 정립된 시스템으로, 크게 환자를 세 그룹으로 나누는 것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어쨌든 살 환자. 치료를 해야 살 환자. 그리고 어쨌든 죽을 환자. 죽음에 임박한 부상병에게서 눈물을 흘리며 손을 거두고, 살 수 있는 장병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재난의학의 트리아지 시스템에는 죽음에 임박한 것이 자명하거나, 치료를 해도 죽을 가능성이 매우 높은 중증 환자를 분류하는 “expectant”라는 카테고리가 있다. Expectant. 뭔가 좋은 일을 기대한다는 뜻의 형용사이지만 이 때 기다리고 있는 것은 치료의 순서가 아니라 이미 예정된 죽음이다. Expectant 그룹으로 분류되면 진통제 등의 증상완화치료를 제공받지만, 생명을 유지하는 긴급치료의 우선순위에서는 제외된다.

문제는 현대의 응급실에서는 중환자의학이 발전하면서 ‘어쨌든 죽을’ 환자로 여겨졌던 이들이 살아나는 (그러나 기계로 호흡과 심박동만 유지하는, 의미있는 ‘살아남’은 아닌 경우가 많다) 일들이 생기고, 트리아지 시스템에도 종종 혼란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실제 대부분의 응급실에서는 죽음이 자명해보이는 환자도 포기하기가 어렵고, 각종 장기가 암세포로 뒤덮여 있어 기능을 하지 못하는 말기암 상태인데 심폐소생술, 중환자실 치료, 투석 등 중환자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해 집중적으로 투입되는 자원을 그들에게 쓰게 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러나 그들에게 ‘살 수 있는 사람에게 투입될 자원을 잠식한다’고 책임을 돌릴 수 있을까?

누구도 죽어가는 이들의 간절함을 외면하거나 비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두꺼운 외부병원 차트 속의, 전공의의 카톡 속의, 혈액검사 수치를 보여주던 모니터 속의 환자에게 나는 마음 속으로 맘껏 짜증낼 수 있었다. 부족한 의료자원을 잠식하는, Expectant로 분류되어야 마땅한 환자. 그러나 막상 환자의 눈을 마주한 나는 그럴 수 없었다. 그의 눈에 담긴 간절함. 기대감. 스스로의 생명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는 듯한 역설적인 평온함을 보았고, 그가 왜 이곳까지 오게 되었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를 나에게 자신의 몸을 위탁한 이상 나의 소명은 그의 존엄을 지키는 것이고, 그것은 그의 입원으로 인해 입원 대기 순서가 밀리거나 배제될 불특정의 환자보다 우선한다. 그러나 이것이 과연 공정한가, 지금 당장 병실이 없어 응급실에서 대기하거나 다른 병원으로 전원을 가야 하는 다른 환자의 입장에선 어떨지를 묻는다면 뭐라고 해야 할지 막막하다.

나는 일개 의사이지 법철학자가 아니기 때문에, 이 사안에 대한 공정함이란, 또는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증할 능력은 없다. 다만 죽어가는 이 개인의 간절함과 사회의 정의가 정확히 공존하기 어려울 때, 일하면서 수없이 부딛치는 윤리적 딜레마에 대해 조금씩 생각해온 나의 답은 결국 그 간절함의 방향을 자기 자신에게로 돌리는 것이었다. ‘저 곳에 가면 나을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기대가 환자의 마지막 소망이 된 것은, 수차례의 좌절과 실망 끝에 만들어진 신기루인 경우가 많다. 환자가 병의 경과에 대해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면, 자신에게 정말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 생각할 기회를 갖는다면, 무의미한 치료에 걸려진 부풀려진 기대는 한풀 수그러들지도 모른다. 그러한 ‘받아들임’을 돕는 것은 의료인의 역할이다. 그러나 한두 차례의 상담이나 스치듯 지나가는 외래진료로는 어렵다. 환자의 불안과 고통을 이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사실 환자들이 현대의학에 대해 비현실적인 기대를 하는 것은 우리나라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은 아니다. 외국인 말기암 환자들도 우리나라에 진료를 받으러 오는 경우도 꽤 있다. 외국에서 이루어진 연구[1]에서도 동일한 현상- 진행암 환자가 완치를 기대하는-이 보고되고 있기 때문에 우리나라 환자들만 쿨하지 못하다 나무랄 수는 없다. 다만,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전반의 자원이 서울에 모여 있는 현상에서 의료라고 예외가 아니고, big5라고 불리는 대형 상급종합병원 집중현상이 워낙 심해서 암환자들의 현대의학에 대한 비현실적 기대가 상급종합병원 선호라는 현상으로  더욱 두드러져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비현실적인 기대가 왜 문제가 되는가? 임종에 임박한 과도한 의료이용 (aggressive end of life care), 즉 중환자실 치료나 항암치료 등은 환자와 가족의 고통을 가중시켰고, 의료비를 상승시켰다[2].  앞서 말한 트리아지에서의 딜레마 역시 문제다. 말기암환자가 중환자실에 누워있기 때문에 살 수 있는 외상환자가 병상이 없어 죽을 수도 있다.

 ‘조기완화의료 (early palliative care)’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등장했다. 조기완화의료는 진행암 진단을 받은 후 항암치료를 하다가 더 이상 쓸 약이 없을 때 비로소 완화의료 및 호스피스 치료를 시작하는 것이 아니라, 진행암 진단 직후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즉 항암치료를 시작할 때부터 충분한 시간을 가지고 환자와 의사소통을 하고 치료의 목적과 한계에 대해 공유하며, 항암치료 뿐만 아니라 각종 신체 정신적 증상에 집중하여 관리를 한다. 가족에 대한 상담을 병행하는 것도 포함된다. 이것은 의사 혼자서는 할 수 없다. 완화의료를 전담하는 의사와 간호사, 사회복지사가 팀이 되어 항암치료와는 별도의 외래 진료를 통해 환자를 관리하게 된다. 하버드대 메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시행된 임상시험에서 조기완화의료는  환자의 삶의 질을 높이고 임종에 임박한 과도한 항암제 치료비율을 줄였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임종의 과정을 고통스럽게 할 수 있는 중환자실 치료나 심폐소생술을 받는 일들도 줄일 수 있었다[3].


우리나라에서는 어떨까. 이전보다 많이 나아지긴 했지만, 각 병원의 호스피스 완화의료팀에는 아직 인력이 많이 부족하다. 조기완화의료는 고사하고 임종이 임박한 환자 상담만 해도 벅찬 형편이다. 환자와 가족들의 완화의료 서비스에 대한 거부감도 만만치 않다. ‘호스피스= 죽으러 가는 것’으로 지레 짐작하고  상담조차 거부하는 이들도 많다. 그러면서 이 병원 저 병원을 전전하다가 결국 응급실이나 중환자실에서 생을 마감하는 경우도 있다.


환자들이 죽기 전에 이룰 만한 간절한 소원이 ‘큰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아보는 것’이 아니라 더 소중하고 값진 일이었으면 좋겠다. 가족과 함께 손잡고, 껴안고 대화를 나누는 일. 같이 식사를 하는 일. 추억의 장소에 가보는 일. 화해하고 사랑하는 일.

아빠의 경우엔 그것이 무엇이었을까. 아빠는 다행히 임종을 앞두고 서울의 큰 병원으로 다시 가는 무리수를 두지는 않았다. 별 의미 없는 소원 수리를 했던 것은 아빠가 아니라 나였다. 나는 아빠의 마지막 소원은 내가 고입연합고사 만점을 받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효도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했지만 결국 한 문제를 틀렸다. 임종하기 불과 일주 전이었고, 그는 그래도 정말 기뻐하면서 병실에 오는 간호사와 의사마다 붙잡고 그 자랑을 해댔다. 지금은, 어차피 당락이 문제가 되거나 인생이 좌우될 시험도 아니었는데 공부를 너무 열심히 했다는 생각이 든다. 아빠랑 좀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얘기를 나눴어야 했는데. 한 문제를 틀리든 열 문제를 틀리든, 자라나는 딸이 청소년기의 과업 중 하나를 무사히 마친 것만으로도 그는 좋아했을 테니까 말이다. 그러나 당시의 나에게는, 아빠를 위해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가에 대해 말해주는 이는 없었다. 점점 병색이 짙어지는 그의 모습이 두려웠던 나는 그저 멀리 떨어져서 아픈 이를 바라보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지금 사랑하는 사람의 삶이 저물어가고 있다면, 한번쯤은 꼭 물어보았으면 한다. 지금 당신에게 무엇이 가장 소중하냐고. 무엇을 하고 싶으냐고. 누구와 함께 있고 싶으냐고. 직접 물어보는 것이 너무 마음이 아프다면, 다니고 있는 병원 또는 인근 의료기관에 있는 호스피스 완화의료팀의 도움을 요청해보자[4]. 더 늦기 전에 기꺼이 도와줄 것이다. 당신의 편이 되어줄 것이다.



[1] 여러 연구가 있으나 대표적인 것으로는 미국의 암환자 패널 코호트 연구(Cancer Care Outcomes Research and Surveillance; CanCORS)를 통해 분석된 결과가 있다. 이 연구에서 완화적 화학요법을 받는 진행암 (재발 또는 전이되어 수술 또는 방사선치료로 근치적 치료가 불가능한 경우이다) 환자들 중 70-80%는 본인이 완치될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개 진행암 환자의 항암화학치료를 통한 완치율은 5% 미만이다.  Weeks et al, Patients' Expectations about Effects of Chemotherapy for Advanced Cancer. N Engl J Med 2012; 367:1616-1625

[2] 이에 대해 연명의료중단에 관한 법률 제정 및 도입이 ‘의료비 절감을 위한’ 것으로 종종 오해되기도 하고, 심지어 ‘현대판 고려장’이라 표현하는 의료전문지 기사 (http://www.psychiatric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6335)를 보고 황당함과 분노를 느꼈던 적도 있다. 이는 완화의료와 연명의료중단에 대한 몰이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연명의료중단의 일차적인 목적은 환자의 삶의 질 향상이지 의료비 절감이 아니다. 임종에 임박한 연명치료는 돈이 많이 들기도 하지만 실제 환자의 삶의 질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문제가 된다. 높은 의료비용은 또한 경제적 고통으로 환자와 가족의 삶의 질에 영향을 준다.  

[3] 하버드대학 부속 메사추세츠 종합병원에서 일반적인 항암치료 후 완화의료와 조기완화의료를 비교한 결과 환자의 삶의 질, 질병에 대한 인식, 의료이용 등 여러 지표가 모두 조기완화의료에서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생존기간이 조기완화의료군에서 더 길었던 것은 많은 연구자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항암치료를 덜 했는데 생존기간은 오히려 더 길었던 것에 대해 여러 해석이 있지만, 치료로 인한 부작용 및 합병증을 피할 수 있었던 것이 오히려 생존기간이 연장된 요인일 가능성이 크다. Temel JS et al. Early palliative care for patients with metastatic non-small-cell lung cancer. New Engl J Med. 2010;363(8):733-42.

[4] 현재 전국 83개 병의원에서 국가지정을 받은 호스피스 완화의료팀을 운영하고 있다. 암 진료를 하는 대부분의 병원에서는 운영되고 있다고 보면 된다. 기관 리스트는 다음 웹페이지를 참고. http://hospice.go.kr/organ/organIntro.do?menu_no=583&brd_mgr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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