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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May 30. 2020

치료받지 않을 권리

https://www.seoul.co.kr/news/newsView.php?id=20200610027024 

암 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후 회복한 것으로 알려진 한 유명인의 글을 얼마 전 읽었다. ‘항암치료는 한 번이면 됐다, 재발하면 치료받지 않겠다”라고 밝힌 부분이 눈에 띄었다. 물론 재발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만약 재발이 되었을 때 치료를 받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암의 종류에 따라 다르지만, 재발암은 일부는 완치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확률이 매우 높지는 않다. 적어도 처음 치료할 때만큼의 회복 가능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환자의 입장에선 합리적인 선택이지만, 막상 병원에서 그런 선택이 그대로 존중받기는 좀처럼 쉽지 않다. 젊은 환자가 완치 가능성이 있는데도 치료를 받고 있지 않는다면 의사는 불안해질 것이다. 본인의 의지로 치료받지 않아 향후에 악화되었을 때 환자가 후회를 하거나 오히려 의사를 탓하면 어떻게 하나 걱정이 될 것이다. 환자를 더 열심히 설득해주지 않았다며 가족들이 자신을 비난하는 경우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시나리오다. 그래서 의사는 가족들도 이 상황을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지 반복해서 확인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치료를 하지 않는 것이 맞는지 몇 번이고 물어보고, 의무기록에 이를 꼼꼼히 기록해놓고, 필요하다면 환자의 자필서명까지 받아둘 것이다. 그 과정에서 힘든 치료를 받지 않기로 마음먹었던 환자들도 결국은 뜻을 굽히는 경우가 적지 않다. 상당수는 가족들의 읍소와 애원에 마음을 돌린다. 이 모든 과정이 바쁜 의료진에게는 사실 번거롭기 짝이 없다. 어차피 받을 치료, 권하는 대로 하는 ‘착한 환자’들만 있으면 좋을 텐데, 하고 한숨을 내쉬게 된다.

그러나 환자에게 치료받을 권리가 있듯, 치료받지 않을 권리 역시 없을 리 없다. 물론 치료받지 않을 권리는 안아키가 주장하는, ‘백신을 맞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외상이나 심근경색, 뇌졸중 같은 응급상황에서 치료받지 않을 권리를 말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다만 암, 만성콩팥병, 간경변 등의 만성질환이 상당히 진행된 상황이라면, 치료가 항상 환자에게 도움이 되는 것만은 아니기에 개인의 판단이 중요해진다. 병의 초기라면 당연히 치료의 효과가 크지만, 병이 진행할수록 수명을 연장하는 대신에 감내해야 할 치료의 고통과 불편의 위험은 커진다. 어떤 이에게는 치료가 도움이 될 수 있지만, 어떤 이에게는 고통을 가중시키게 될 수도 있다. 불확실성이 큰 것이다. 이러한 불확실성을 받아들일 지는 환자의 개인적 가치관과 삶의 환경에 따라 다를 것이다. 정답은 없다. 

이 불확실성을 맞닥뜨리기가 두려운 나머지, 일부 환자들은 효과가 없을 것이 자명한 보완대체요법을 선택하여 의사를 난감하게 만들기도 한다. 이런 이들이 꽤 되다보니, 자신의 의지로 치료를 받지 않겠다고 결정한다고 해도 이런 보완대체요법의 추종자로 여겨지기 쉽다. 이는 그만큼 치료의 이득과 위험을 명확히 이해하고 선택하는 이들이 별로 없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것은 한국 의료가 실패한 여러 지점들 중 하나다. 치료가 자신의 몸에 가하는 영향에 대해 환자가 충분히 이해하고 생각하고 결정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주지 못하는. 그것에 대해 묻고 생각할 여유를 주는 것이 번거로움이 되는. 질문을 반복하며 결정을 미루는 것이 유난스러움이 되는.

오늘도 나는 외래진료실에서 궁금하던 것을 몰아 묻느라 시간을 지연시키는 환자들 때문에 초조해하고 있었다. 한 마디라도 의료진과 대화를 더 나누어보려 수첩에 궁금한 것들을 빼곡이 적어오는 이들은, 결국 뒤에서 기다리는 환자들의 시간을 잡아먹는 애물단지가 된다. 의사에게는 소위 ‘말이 많은’ 환자들의 질문에 적당히 답하는 동시에 최대한 빨리 끊고 진료실 바깥으로 내보내는 노련함이 요구된다. 진료실을 나온 환자는 정해진 코스로 ‘보내어 진다’. 원무과 직원은 재빠르게 결제하고 약사는 민첩하게 항암제를 조제하며 간호사는 숙련된 솜씨로 주사를 놓는다. 프로토콜대로 컨베이어 벨트를 돌리는 병원 노동자들은 몸을 갈아 넣어가며 최대한의 효율로 일하지만, 막상 환자들은 회복되었다기 보다는 그들의 생산품이 된 듯한 느낌을 맛보게 된다. 가성비 좋은 K-의료는 질문과 생각과 대화를 포함하지 않는다. 그래서 급박한 행동이 요구되는 판데믹 상황에서 더 빛을 발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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