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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Oct 04. 2020

사과에 대하여

"환자한테 절대 죄송하다고 하지 마라."

"...왜요?"

"죄송하다고 하는 순간 네가 다 책임지게 되는거야. 네 잘못이 되는거라고. 네가 잘못하지 않은 것까지 뒤집어 쓸 수도 있어. 환자한테 도의적으로는 미안한 느낌이 들 순 있겠지. 그래도 절대 사과하면 안돼."

학생 때 전공의 선배들에게 들은 얘기. 소위 hidden curriculum 중의 하나다. 누구나 들을 수 있지만 누구에게 들었는지는 기억이 안나는 이야기. 교과서에는 없지만 대부분의 의대생들이 실습과정에서 배우는, 자기 방어의 팁.

병원에서 환자가 예기치않게 나빠지는 일은 흔히 일어난다. 의료인의 부주의 때문인 경우도 안타깝지만 늘 일어나는 일이다. 그러나 만약 이 상황에서 죄송하다고 말한다면 자칫 모든 것을 책임지고 커리어가 끝장나는 상황이 될 것이라는 경고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어요."

치명적인 의료과실로 인해 평생 가는 장애를 입고 병동의 가장 안쪽 병실에 수 년째 누워있는 환자의 간병인이 말했다.  장기간의 병원생활로 온갖 가재도구와 살림살이들이 가득한 그 방은 공기가 달랐다. 그 방에서 인턴이었던 나에게 말이라도 건네는 이는 간병인밖에 없었다. 환자와 가족들의 눈빛은 공허했다. 매달 바뀌는 인턴 따위는 상대하지 않겠다는 느낌이었다. 감정이 없어보였다. 슬픔도 분노도 더 이상 표출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듯 했다. 아마도, 병원으로부터 돌아오는 반응이 없었을 테니까.

"멀쩡하던 환자가 이렇게 되었는데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어요. 죄송하다고 한 마디라도 들을 수 있었다면 가족들이 이렇게 나오진 않았을 거에요."

나는 그저 그 방의 분위기와 함께 도저히 혈관이 드러나지 않아 채혈도 주사도 불가능한 환자의 팔이 무서웠다. 혈액샘플을 해야 하는 날이면 한숨부터 나왔다. 병원으로부터 사과를 받는다면 가족들이 받아들였을 것이라는 간병인의 말도 믿지 않았다. 장애를 입고 침상에서 평생을 보내게 된 환자와 가족의 좌절과 분노, 엄청난 실수를 저지르고 죄책감과 공포에 시달려야 했을 담당의사의 마음, 이 모두가 다 헤아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 두 가지 일이 모두 평생 나에게 일어나지 않기만을, 그리고 그 방에 들어갈 일이 가능하면 없기만을 바라면서 한달을 보냈다.


2009년에 "sorry works"라는 책이 번역되어 출간되었다. 나는 그 책을 샀던 것 같은데 결국 읽지는 못한 것 같고 책은 어디있는지 모르겠다. 많은 의료사고 및 의료과실로 인한 분쟁들이 의외로 의료진의 진심어린 사과로 해결된다는 내용이라고 한다. 이 책에 대해 들었을 때 생각났던 것은 인턴 때 마주쳤던 간병인의 말이었다. 정말일까. 사과하면 끝장이 나는게 아니라 상대의 마음을 누그러뜨릴 수도 있는걸까. 그러나 나의 지인들을 포함한 대부분의 의료인들에게 이 책의 메시지는 별다른 반향이 없었다.

 "그거 다 이상적인 얘기지. 결국 문제는 돈이에요. 사과 한마디로 해결될 문제들이 아니라니까."

"우리나라 사람들은 병원에서 환자가 나빠지면 다 의사 탓이라고 하잖아요...말기암으로 죽어도 의사탓이라고 하는데.”

“죄송하다고 하면 다 뒤집어 씌울겁니다.”

“사고 나면 브로커들부터 바로 달려드는 거 알아요? 작은 틈이라도 보이면 끝장이에요."


면허를 따고 20년이 흐르는 동안 나에게도 크고 작은 사건들이 있었다. 바로 얼마전에도 의료분쟁 조정중재원으로 간 사건이 있기도 했다. 좀더 잘 했더라면 환자의 고통이 좀 덜했을 텐데, 하는 후회와 죄책감은 늘 삶의 한구석에 도사리고 있는 아픈 손가락이다. 한참 힘들때는 꿈에도 나오고 울면서 깨기도 한다. 나는 나름의 최선을 다했고 누가 그 상황에 있었더라도 어쩔 수 없었어, 라며 스스로에게 강변하는 마음은 죄책감을 이겨내는 마취제와도 같다.

다행히 소송까지 간 건은 없었지만, 그것은 진료를 잘 해서가 아니라 내가 운이 좋아서일 따름이라는 것을 안다. 아무리 훌륭하고 빈틈이 없는 의사여도 언제든지 의료과실의 죄를 추궁당할 위치에 설 수 있다는 것을 안다. 최근 언론에 나오는 일련의 의료소송기사들을 보며 사람들은 분노하지만, 의사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한편으로는 두려워한다.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소송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주의의무를 다한다'는 것이 실제로 과연 가능한 것일까? 나의 팀의 일원인 간호사, 인턴, 전공의가 하는 일을 모두 빈틈없이 관리감독할 수 있을까? 아니 그 정도가 아니더라도 과연 수 초에서 수 분에 지나지 않는 외래 진료시간동안 환자의 위중함, 또는 위중하게 될 위험을 놓치지 않고 적절하게 진료할 수 있을까? 과연 스스로를 믿을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의사 입장에서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것 역시 알고 있다. 

예기치 못하게 상태가 나빠지거나, 장애를 입거나, 최악의 경우 사망에까지 이르는 환자의 억울함은 누가 보상할 것인가? 피해가 분명히 있는데 누구의 잘못인지 따질 수 없고 사과를 받을 수 없는 상황이 된다면 아마도 누구나 미칠 것 같은 지경이 될 것이다. 음식물이 기도로 넘어갔는데 기관삽관이 늦어져 식물인간 상태가 된 환자의 가족은 누구에게 사과를 받아야 할까. CPR 요청을 좀더 신속히 하지 못한 간호사? 삽관을 빨리 하지 못한 당직의사? 만약의 상황에 대비해 응급기도확보를 위한 전담팀을 운영하지 않은 병원? 기도확보를 위한 전담팀을 운영할 수 있는 수가와 시스템을 마련하지 않은 보건당국?


누구도 의도한 바 없지만 피해와 고통은 실재한다.

누가 되었건 사과는 해야 회복과 치유가 시작될 수 있지 않을까? 사과는 피해의 존재를 인정하고, 다시는 이런 문제가 발생하지 않도록 노력하겠다는 약속이다.

누가 사과해야 할까? 누가 이 피해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까? 그건 솔직히 아직 잘 모르겠다. 어려운 문제이고,  상황에 따라 책임의 주체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바라는 것은, 각자가 자신의 위치에서 사과를 하고, 피해자의 고통에 공감하되, 책임은 분산되었으면 하는 것이다. 사과를 했다는 것만으로 그 책임이 의료진 개인에게만 지워지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기도확보를 하지 못한 의료진이 져야 할 죄책감과 부담은 환자가 겪는 고통에 비할 바는 아니겠지만 엄청난 것이다. 기도확보 전담팀을 운영하지 않은 병원, 운영이 가능하도록 지원하지 않은 보험과 국가 역시 함께 사과하고 책임을 나누어 맡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진다. 시스템의 가장 말단에 있는 취약한 이들이 잘려나가지 않았으면, 개인을 단죄하고 끝나는 방식이 아니었으면, 이 사고를 통해 시스템이 좀더 나은 방향으로 개선될 수 있다는 약속을 할 수 있다면 좋겠다.




문득 '사과'라는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된 것은 국시를 치르지 못한 의대생들에게 사과를 요구하는 여론을 접하고서이다. 수 주에 걸친 전공의파업으로 벌어진 혼란과 피해에 대한 분노는 온통 의대생들에게로 향하게 되면서 '왜 사과하지 않느냐'는 목소리는 점점 높아져갔다. "아무도 사과하지 않았어요." 인턴 때 들었던 간병인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과'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의사와 의대생들로 하여금 '절대 사과하지 말아야 한다'고 다짐하게 만들 것이다. 사과하는 순간 파업을 했던 명분은 다 사라져 버리고 다시는 뭔가를 주장할 수 없게 되어버릴 것이라 여기고 있다. 그들은 2020년의 파업을 둘러싼 일련의 사건들이 의사의 노동을 값싸게 착취하기 위한 국가의 음모에 국민들이 동조한 것이라고 기억할 것이다. 사과를 하는 것 자체가 그 음모에 굴복하는 것이라 여길 것이다. 이런 식의 관점 역시 ‘환자에게 사과하지 말라’는 말과 마찬가지로 hidden curriculum 중 하나다. 전문가를 제대로 대우하지 않는 국가에 대한 냉소와 피해의식. 아마도 이를 우려한 한 의대 교수는 신문 칼럼에서 ‘학교를 떠나서 아픈 이들에게 공감하는 마음을 배우고 오라’고 일갈하였으나, 장담컨데 그의 말은 의대생들에게 아주 작은 파장도 일으키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의료사고와 마찬가지로, 파업의 피해 역시 실재한다.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사람들이 있고, 수술이 늦어진 암환자들은 수없이 많으며, 입원을 하지 못해 여러 병원을 전전해야 했던 이들, 전공의들의 빈자리를 대신해 일해야 했던 간호사들과 다른 여러 의료직종들 모두 몸과 마음의 피해를 입었다. 무엇보다 의사가 환자에게 얼마든지 등질 수 있다는 경험에서 오는 공포는 한국사회가 입은 큰 트라우마다.  의사들은 이 모든 것이 정부의 탓이라고 얘기한다. 그렇다면 의사들의 책임은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엄연히 존재하는 피해에 대한 사과 없이 의사들은 국민들의 신뢰를 얻을 수 있을까? 이렇게 말하면 대부분의 의사들은 신뢰라는 것이 이미 바닥나서 기대하지 않는다고, 그러므로 불필요한 사과를 해서 우리 주장의 가치를 일부러 깎아내릴 필요는 없다고 답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아직은 완전히는 아니지만, 너무 순진한 것인지 모르겠지만, 

사과의 힘을 믿는다. 

사과는 항복이나 자폭이 아닌 새로운 시작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기치 못하게 상태가 나빠졌던 환자와 가족들에게 송구스럽다고 종종 말해왔다. 죄송하다고 한 적도 몇 번 있다. 적어도 그 한마디로 잘못을 인정한 거 아니냐고 추궁당한 적은 아직은 없는데, 운이 좋아서일지도 모른다. 다만 분쟁으로 갈 것 같은 경우에는 괴로워도 환자와 가족들을 더 자주 만나고 설명하려고 노력했다. 이것도 아주 악질적인 상대를 만나지 않은, 재수 좋은 편에 속해서인지도 모른다. 아니면 대형병원에서 근무하는 덕에 기본적인 신뢰를 받고 있고 훌륭한 법무팀이 잘 막아주어서일 가능성도 크겠다. 그러나 그렇다고 사과가 쉽고 간단한 것은 아니다. 사과는 늘 고통스럽고 눈물과 큰 호흡과 기나긴 망설임 후에 할 수 있다.

위에서 언급한 칼럼을 쓴 교수님은 의대생들의 롤 모델로 의대를 떠나 민중의 삶을 배우고 온 체 게바라를 인용했다. 지역의사제를 도입하자고 했을 누군가가 벤치마킹했을 중국의 베어풋닥터나 쿠바 의료를 떠올리셨는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다르다. 사과할 수 있는 의사면 충분하다. 그것조차도 지금 상황에서는 너무 어렵다. 진심으로 사과할 수 있고, 사과했다는 이유만으로 비난받지 않으며, 사과에 따르는 책임은 관련된 주체들이 나누어 지는 사회라면 어떨까. 적어도 굳이 체 게바라가 필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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