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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Aug 31. 2020

당직전야

내일 병동 당직을 위한 짐을 싸고 있다. 로션, 칫솔, 비누, 헤어드라이어, 물컵, 슬리퍼 등은 병원 연구실에 있다. 라꾸라꾸 침대도 있으니 갈아입을 옷만 챙기면 된다. 삶이 그만큼 병원에서 분리되지 못했었구나 싶다. 십수년 만에 서보는 당직이라 여전히 긴장되지만, 한편으로는 그리 새삼스럽지 않기도 하다. 언제는 병원에서 자유로운 삶이었던가.

뉴스의 댓글과 소셜미디어에서는 의사 파업에 대한 비판과 분노의 목소리가 가득하다. 학교도 문을 닫은 가운데 엄마 없이 하룻밤을 보내야 할 아이들을 돌봐주시기 위해 친정어머니가 오셨다. “의사들을 늘려야 네가 이런 고생을 안하는 것이 아니냐”고 물으신다. 엄마. 의사가 부족하기보다는 의사의 일자리가 부족한 거에요. 인정받고 신뢰받고 안정적으로 일할 수 있는 일자리가요. 당신 딸은 운이 좋게 그런 일자리를 잡았지만, 사실 그런 일자리는 생각보다 그리 많지 않답니다. 지방에는 연봉 5억을 주는 곳도 있다지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그런데 세상에 공짜는 없다는 건 진리에요. 5억을 받으면 아마 25억을 벌어줘야 할 것입니다.

의사 수가 충분하니 괜찮다고 말할 수는 없다. "한국에 의사 수는 충분하다" "진료가 필요할 때 못받은 적 있나요?"와 같은 주장은 전혀 설득력이 없다고 생각한다. 의사가 있어야 할 곳에 없어서 생기는 많은 문제들이 지금도 있는데. 의사의 수가 아니라 분포가 문제라고 하는 것은 사실이더라도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언어는 아니다. 그렇다고 의사 수를 늘리는 것이 그 해결책이라고 쉽게 말할 수 있을까. 의사들이 있어야 할 곳에 기꺼이 있게 만들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문제의 핵심은 일자리라고 생각한다. 인정받고 신뢰받을 수 있으며 안정적인 일자리를 지방에 만들어야 의사가 간다. 돈도 돈이지만 돈만 문제는 아니다. 의사 혼자 진료하는 것이 아니니 간호사, 의료기사, 타과 의사들과 같은 인력자원, 장비 등 인프라가 갖춰져야 일할 수 있는 환경이라 여기고 갈 수 있다. 배가 불러서 그런 걸까? 중소기업에서 사람을 구하지 못해 아우성쳐도 청년들이 가지 않는 것은 청년들이 배가 불러서일까? 정부는 아마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이다. 질이 낮은 일자리여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수를 늘리는 것이 더 쉽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래서 출산률을 늘리려고 하고, 의사 수도 늘리려고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게 필요할 순 있지만 먼저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파업 첫날 낮 근무시간이었다. CPR (심폐소생술) 방송. 평소에 ‘전공의들이 가겠지' 하고 쉽게 움직이지 않던 굼뜬 몸은 방송 후 수 초가 지난 다음에야 문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방송이 나기 무섭게 저도 모르게 일어나 뛰어가던 전공의 때의 감각이 미약하게 느껴지면서 느꼈던 감정은 슬픔이었다. 나 역시 수면과 휴식이라는 기본권이 박탈된 채로 살았던 그 시기에는 의사라는 직업에 요구되는 희생, 봉사, 책임, 이런 말들이 싫었다. 그러나 CPR 방송이 나면 나도 모르게 달려가 가슴압박을 하고 기관삽관을 하는 감각은 몸에 새겨졌고, 필요한 곳에 늘 있었던 이유는 희생정신 때문이 아니라 본능 때문이었다. 사람은 살려야 하니까. 그게 내 일이니까. 내 일을 안하면 환자가 위험하니까.

그런 마음으로 살던 이들이 왜 제 발로 병원을 나갔을까. 사람들은 궁금해하지 않는다. 밥그릇 싸움이라 한다. 공부로 남들을 이기고 의대에 들어간 이들이니 타인의 아픔도 쉽게 외면할 수 있을거라 생각한다. 일부는 그럴 수도 있겠으나, 대부분의 전공의들은 평범한 젊은이들이다. 그들의 젊음을 갈아넣어 간신히 유지되는 시스템이 부끄러운 것이고 잘못된 것이다. 자신의 몸과 정신을 갈아넣어야 간신히 무해한 사람이 될 수 있는 이 엄청난 무게를 젊은 비정규직들이 온통 짊어지는 것이 타당한가. 이제까지는 그 댓가로 그래도 괜찮은 일자리가 주어져왔다. 하지만 이젠 그걸 견디고 보상으로 줄 만큼 좋은 일자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젊은 세대는 이런 부조리함을 견디기 어렵다. 그러면서도 나간 전공의, 전임의들이 병동 환자를 보는 데 익숙치 않은 교수가 실수라도 할까봐 파업 이후의 며칠 분의 오더를 챙겨놓고 환자의 경과기록도 꼼꼼하게 써놓은 것을 보니 마음이 아려왔다.




여기까지가 지난주 쓴 것이다. 사실 나는 그날 당직을 서지 않았다. 당직을 서야 하는 날 오후에 아이 학교에 확진자가 발생했고, 아이와 내가 코로나 검사를 받고 음성이 나올 때까지는 근무가 제한되었다. 당직시작시간까지 검사가 나오지 않을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날 당직을 다른 교수가 바꿔주었고, 대신 이번주에 이틀을 당직을 설 예정이다. 상황은 점점 악화되고 있다. 환자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답답하면서도, 지금 이 정도(외래는 큰 차이는 없으나 입원환자는 평소의 절반 수준)로 환자를 보는게 맞지 않나, 그동안 capacity를 넘어서 환자를 받은 것이 잘못이었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든다. 정부에서 대형병원들이 진료하는 환자 수를 의료진이 과로하지 않도록 제한했다면 이렇게 많은 환자들이 서울로 몰려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저수가로 병원을 운영하게 하려면 정부는 환자 수를 제한할 수 없었고, 박리다매 운영방식으로 살아나갈수밖에 없는 병원은 신환 유치에 열을 올렸고, 환자를 많이 봐야 실적과 평판이 오르는 교수들은 (본인도 일하느라 갈려나가긴 하지만) 저항하지 않았다. 그 댓가가 전공의의 과로인데, 환자를 버렸다는 비난을 이들이 한몸에 뒤집어쓰는 것이 정당한가. 나 역시 죄책감을 느낀다. 이 시스템에 부역해왔다는 것에. 




정부도 대전협도 한 치도 서로 물러서지 않는 것이 안타깝다. 이 정도로 이해 당사자간 합의가 안되는 정책이면 추진해서는 안된다. 할 수도 없다. 그러나 현재까지 정부가 제시한 타협안은 어떤 이익단체도 받아내지 못한 정도의 양보라고 생각한다. 아마 일단 진료 현장으로 돌아가면 대전협의 동력이 많이 떨어질 것이기 때문에 최대한 많이 얻어내고 접으려는 생각도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더 이상 지속하는 것은 오히려 후폭풍으로서의 규제를 더 정당화하게 될 것이다. 의사라는 직업의 자율성을 제한하는 것이 공공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생각이 점점 더 많은 지지를 얻고 있고, 실제 재난상황에서 민간인인 의료인력동원을 법제화하는 반헌법적인 법안이 입안예고되어 있다. 시민들의 인내심은 이미 한계에 도달하였고, 그것을 언론과 정부가 만들어낸 분노라고 항변하는 것은 전혀 공감을 얻지 못한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어려운 상황이지만, 지금은 진료를 정상화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당직을 서기 싫어서, 전공의를 대신해 일하기 싫어서 그러는 것이라는 비난을 들을까봐 이런 말을 하기가 조심스럽다. 그러나 항암치료를 할 때에는 늘 고민하는,  risk vs benefit을 고려해봤을 때, 지금은 파업을 지속할 때의  risk가 benefit에 비해 더 크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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