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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Jan 28. 2016

의료의 일상과 그 경계

어제 논란이 되었다는 시신기증에 대한 기사를 읽었다. 


http://www.hankookilbo.com/v/0b30b6ee08c14de9a004471cd356cacc


담배피우던 시신은 죽어서도 폐가 딱딱해서 해부하기 힘들고, 비만자는 방부처리를 위한 고정액이 퍼지지 않아 훼손 우려가 크다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아 그런가보다 하지만, ‘흡연과 비만은 죽어서도 민폐’라는 가치판단이 들어간 것이 문제였다. 시신기증을 하려는 의지는 자신의 몸을 댓가없이 내주는 선의에서 나오는 것인데 그것을 민폐라고 폄훼하는 것이 타당한가? 당연히 그렇지 않다. 몸을 한낱 물체로 대하는 것은 해부학 뿐만 아니라 의학에서는 일상이지만 그것이 일상이 아닌 이들에게는 견디지 못할 역린이 된다. 의사는 그 경계를 잘 알아야 한다.

사실 실제 해부실습의 과정을 잘 알고 있는 의사들이 시신기증을 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나만 해도 나의 사후에 시신기증을 할 것이냐고 물어본다면 흔쾌히 대답을 잘 못하겠다. 실습학생들, 해부학 교수와 조교들이 시신을 함부로 대해서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들은 악한 사람들이 아니다. 의대생=공부잘하는 애들 = 이기적= 시신 함부로 대함, 이런 편견에 찬 도식은 타당하지 않다. 
나의 시신을 기증하는 것이 망설여지는 이유는, 다만 해부의 과정이 일상이 되면 어떻게 되는가를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시신을 기증하고자 하는 의지는 숭고하고 아름다운 뜻이다. 그런데 그것을 매일 보고, 하나하나의 장기와 조직으로 분해하는 과정에서 시신은 인격체가 아니라 물체가 된다. 그리고 그것을 매일같이 대하는 일상은 하루하루가 다 그 숭고하고 아름다운 뜻에 감사하며 살아갈 수가 없다. 그러나 그 시신을 하나의 인격체로서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 그것은 고통이 된다. 사실은 그래서 시신기증이 더 크고 아름다운 행위이기도 한 것이다. 자신의 몸이 물체가 되며 누군가의 일상이 되는 것, 그리고 가족의 고통까지 감내하겠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즘 읽고 있는, 30대에 폐암으로 운명한 신경외과의사인 Paul Kalanithi의 유작 “When Breath Becomes Air”에서도 해부학실습에 대한 얘기가 나온다. 그의 짧은 인생에서 의학이 어떻게 삶과 죽음을 바라보는 관점에 영향을 미쳤는지를 돌아보는 대목이다. 그는 해부학실습을 하게 되면 구역질이 날 거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막상 실습을 할 때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막상 구역질이 솟아오른 것은 자신의 할머니의 무덤가에 섰을 때였다. 무덤에 엎드려 거의 울 뻔한 상태가 된 그는 자신이 해부한 시신이 아니라 그 시신의 손자에게 마음속으로 사과하고 있었다. 그리고는 말한다.

All of medicine, not just cadaver dissection, trepasses into sacred spheres. Doctors invade the body every way imaginable. They see people at their most vulnerable, their most sacred, their most private. They escort them into the world, and then back out. Seeing the body as matter and mechanism is the flip side to easing the most profound human suffering.

“시신해부 뿐만이 아니라, 의학의 모든 측면은 신성한 영역으로의 침범을 의미한다. 의사들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방법으로 몸을 침범한다. 의사들은 사람들의 가장 취약하고도 신성하며 사적인 부분을 보며, (그것들이 노출되는) 세계에 사람들을 데려다놓고 자신은 빠져나온다. 몸을 물체와 기전으로 보는 것은 가장 큰 인간의 고통을 완화하는 의학의 다른 측면이다.”

이 대목은 어제 우연히 읽게 된 공감에 대한 글과 겹친다. 공감은 사람에게 무한히 있는 자원이 아니고, 공감은 자신을 희생하여 누군가를 위하려는 행동으로 이어지게 되므로, 결국은 자신을 소진시키고 업무의 효율성과 지속성을 헤칠 수 있다는 것이다. 공감이 필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다. 다만 의료인은 항상 공감하며 일을 할 수가 없다. 이 바닥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게는 누구나, Paul Kalanithi 처럼 가끔은 환자가 내 가족이라면, 하고 울컥할 때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아무렇지도 않게 신경과 혈관을 찾으려고 시신을 헤집는 날이 더 많을 것이다. 환자가 마취된 후에는 신나는 댄스음악을 틀어놓고 수술하는 날이 더 많을 것이다. 외래나 응급실 대기명단에 뜬, 저마다 아프고 힘든 환자들의 이름들을 보고 한숨과 짜증을 몰래 내뱉는 날이 더 많을 것이다. 그렇게 일상이, 그리고 의학이 지탱된다. 
그러나 이러한 일상을 노출하는 것은 그것이 일상이 아닌 사람들의 심기를 건드는 것이다. 그 경계를 잘 알아야 하는데, 공감을 할 줄 알아야 그 경계를 알 수 있다. 잘 감추는 것은 위선이 아니라 어쩌면 공감의 힘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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