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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Jan 24. 2017

판단의 유보 속에 고통받는 환자들  

출근해보니 환자 한명이 응급실을 통해 새로 입원했다. 8월까지 내가 항암치료 했던 환자라는데 기억이 안난다. 3번 정도 주사를 맞은 후 항암치료가 힘들다며 자의로 병원에 오지 않았고, 이후 한동안 잘 지내다가 3주전부터 급격히 나빠져서 근처 병원에 갔다가 전원되었다고 한다. 한눈에 봐도 황달에 부른 배, 전형적인 말기암환자의 모습이다. serum bilirubin 11.3mg/dl (황달수치다. 정상은 1.4 미만.) 오늘 새벽 응급실에 도착하여 찍은 CT에서는 간이 온통 종양덩어리로 뒤덮여있다. 
당연히 다른 혈액검사소견도 엉망이고, 저나트륨혈증, 고요산혈증, 백혈구수치 상승을 각가 교정한다면서 생리식염수 주입, 알로퓨리놀, 항생제가 각각 투여되고 있다. 
환자와 가족들이 뒤늦게 뭐라도 해보겠다고 와서는 설득이 안되는구나, 싶어서 단단히 각오를 하고 회진을 갔는데...  의외로 그들은 상황을 담담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알로퓨리놀은 삼키지를 못하여 가루로 빻아서 왔는데 이것도 넘길 수 있을지 모르겠다며 보호자가 걱정을 하고 있어서, 안먹어도 된다고 했다. 요산수치가 15mg/dl이니 처방된 약이겠지만 그런 걸 먹는다고 해서 교정될 가능성은 희박한 상황. 환자는 가까운 병원에 먼저 갔지만 거기서 다니던 큰병원에 가보라고 해서 한반도 끝 남도에서 서울까지 이런 몸 상태로 긴 여행끝에 당도한 것이다. 

"우리가 원해서 온게 아니구... 그 병원에서 서울로 가라고 해서 온거거든요. 다시 가도 받아줄까요? "

"아마 상황이 불확실하니 가라고 했을것이고...여기서 시티검사도 했는데 더 이상 항암치료는 하기 어려운 상태입니다. 저희가 써드리는 소견서를 그쪽에 내시면 돼요."

호스피스 얘기를 꺼내자 이미 보호자들은 알아보는 중이었다고 한다. 따로 불러내어 한달 못넘길 것 같으니 준비하시라고 당부하고 전공의에게 연락해서 심폐소생술 중단 요청서 (do-not-resuscitate)받고 수액도 줄이고 혈액검사는 더 하지 말고 집 근처 병원이나 호스피스병원으로 전원준비를 하자고 했다. 


왜 환자는 이곳까지 오면서 불필요한 비용지출과 고통을 겪어야 했을까? 왜 환자는 증상완화에 하등 도움이 안되는 불필요한 치료를 받아야 했을까? 전원을 결정한 지방병원의사, 응급실 전문의, 담당전공의, 모두 이 환자가 말기암환자이며 더 이상의 중재가 소용이 없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보호자도 느낌으로 알고 준비하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혹시라도 있을지 모르는 불확실성- 교정가능한 문제일 수도 있다는-때문에 말기라는 판단을 내리는 것을 주저하고 판단을 유보한 것이다. 결국 서울의 3차병원의 종양내과 전문의가 진단을 내려야 말기암환자가 되고, 비로소 소모적 치료 (환자가 아니라 혈액검사 수치를 교정하려는)가 종료되는 기나긴 과정을 거치게 된 것이다.


뭔가를 알면 알수록 자신이 모르는 것이 더 크게 다가오는 법이다. 의사 역시 공부를 하고 수련을 하면서 자신이 모르는 불확실성의 영역에 대한 두려움은 더 커진다. 한 분야의 전문의가 되어도 마찬가지다. 내가 모르는 타과 영역에 대한 조심스러움은 더 커진다. 의학은 너무도 빨리 변하는 학문이어서, 학생때, 인턴때 배운 타과 지식은 사실 쓸모없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언제나 판단을 유보하고, 물어보게 된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내가 판단내려도 될까, 싶은 생각이 늘 있어서, 조금만 석연치 않으면 컨설트를 날린다. 혹시 모를 민원이나 의료소송에 대한 두려움 역시 이러한 행동을 만드는 큰 자양분이 된다. 그러나 눈에 안보이는 불확실성에 집중하느라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자명한 현실을 외면하게 되는 것은 아닐지. 


의학의 분과별 전문화, 의학의 본질적인 불확실성, 그러나 확실함을 요구하는 사회, 이 와중에 증가하는 소송의 위험. 이런 상황 속에 지방병원에서, 응급실에서, 또는 병실에서 1년차 전공의가, '당신은 말기암 상태이니 호스피스 케어를 받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일런지 모른다. 그러나 현실은 어찌보면 참담하기 짝이 없다. 환자의 삶의 질과 존엄성을 최우선으로 해야 하는 기본 중의 기본을 말한다는 것이 공허한 울림으로만 느껴질 따름이다. 시위현장에서의 외상성 뇌출혈로 작년 11월 사망한 백남기 농민 역시  더 이상 가망이 없다는 말기 진단을 계속 유보한 결과 중환자실에서 일년이라는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내야 했던 것이다.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우리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이런 비정상적인 현실이 왜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흐름이 되어버린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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