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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ncoAzim May 15. 2024

응급실의 기계여자 #3333

어젠 응급실 당직이었습니다. 흔히 응급실에 상주하는 당직을 상상하는데 그건 응급의학과에서 하는 것이고, 그 외 각 진료과는 응급의학과의 호출/노티(notification)을 받아 환자를 진료합니다. 보통 다른 과는 한 명의 당직이 병동과 응급실을 함께 커버하지만, (슬의생에 나온 것처럼 외과 파트는 대체로 병동과 응급실을 가리지 않고 진료하죠) 내과같이 응급실 환자를 많이 받아야 하는 과는 별도로 대체로 응급실 당직이 따로 있습니다.

저희병원의 응급실에서 각 과 당직의사를 호출하는 방법은 크게 3가지가 있고, 이 3가지는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됩니다. 휴대폰 문자메시지, 원내 메신저, 그리고 #3333 이 발신자로 찍히는 자동음성입니다. 전화를 받으면 등록번호 몇 번 무슨 환자가 응급실 몇 구역에 있고,  선생님에게 이 환자가 의뢰되었습니다, 하는 기계음성이 나옵니다.

전공의들이 사직한 이후 이 콜을 처음 받은 것은 어느 날 아침, 출근길이었습니다. 운전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전화가 와서 연결된 스피커로 전화를 받아보니, 어떤 여자가 계속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여보세요? 여보세요?"라고 간절히 몇 번이나 외쳐도 여자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줄줄이 말하더니 끊어버렸습니다.  그게 기계음성이며 응급실 호출이라는 것을 안 것은 병원에 도착해서였습니다.  응급실 담당 전공의가 사라져버린 이후로는 정규근무시간에는  제 외래에 다니던 환자가 응급실로 오면 저에게 바로 연락을 하게 되는데, 그날은 그랬던 거죠.

아마 이  자동호출 시스템은 아마 응급의학과와 각 과 당직과의 불필요한 마찰과 감정소모를 줄이기 위해 개발되었을 것입니다. 저만 해도 전공의 때 응급의학과와 싸우던 것이 부지기수이니까요. 저희 입장에서는 제대로 환자를 보지도 않고 떠넘긴다고 여겨지니 응급의학과가 밉지만, 한편으로는 응급의학과 입장에서는 환자가 우선 급한데 어느 과 환자인지, 검사가 나왔는지, 처치의 내역이 어땠는지 일일이 따지는 내과의사가 미울 것입니다.
의료진 간의 대화 자체를 감정을 배제한 채 전산으로만 하도록 바꿔놓은 것은 그래서 꽤 좋은 시스템인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333 연락이 올 때의 좌절과 짜증은 참기 어렵습니다. 저에게 응급실 환자를 받으라고 전화를 거는 기계여자의 모습을 상상하고  인공지능에게 그려달라고 하니 꽤 그럴듯하게 묘사해주었습니다. ㅎ


응급실 콜을 기다리는 사이  DALL-E를 통해 생성한 이미지입니다.

어제는 밤 11시 정도 선잠을 자다가 지방에서 온 전원문의 전화에 깨었습니다. 우리병원에서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 환자인데 기흉이 생겼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흉관을 넣으셨나요?"

"흉관삽입 권유했는데 치료받던 병원에 가시겠다고 하면서 흉관삽입 거부하고 계십니다."

"아.. 선생님 기흉상태에서 흉관도 안넣고 전원오시는 건 못받을 것 같습니다. 전원 자체가 위험하고 저희가 수용이 어려울 것 같은데요."

"네 알겠습니다."


수화기 너머의 선생님은 별다른 이의없이 전화를 끊었습니다. 아마 막무가내로 전원을 원하는 환자를 설득하기 위해 저의 거부가 필요했던 것 같습니다.  적절한 응급치료를 지방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데도 서울에 가겠다며 억지를 부리는 환자를 설득하는 것도 힘드셨을 것 같네요.


그 이후로는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아 밤을 홀딱 새어버렸습니다. 2시, 4시, 6시에 각각 환자가 노티되었습니다. 노티를 받았다기보다는 전산으로 저희 과에 어사인이 된 것을 먼저 보고 #3333 연락이 오기 전에 응급의학과 선생님에게 메신저를 날렸습니다.


" 선생님 이 환자 저희과에 노티하실거죠?"

"아.. 네 안그래도 연락드리려고 했는데"

"네 알아서 볼테니 호출하지 말아주세요 저는 #3333 이 너무 싫어요..."

"네...T-T"


호출 이전에 선제적으로 환자를 보도록 만들어주다니 #3333 기계여자는 자신의 소임을 충분히 다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고보니 이건 왜 여자음성일까요. 역시 부정적인 감정을 받아내는 역할은 실제 인간 뿐만 아니라 기계음성도 여성이 해야 하는 것이 현실인가 봅니다. 문득 AI가 그려준 차가운 기계여자가 안쓰러워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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