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구 싶어'지게 하기 위해

소설 <자몽살구클럽> 한로로 저, 어센틱, 2025

by OncoAzim

중학생 딸이 추천해서 읽게 된 책. 사실 작가인 한로로는 누구인지도 몰랐다. 가수이자 작가이며 소설과 같은 제목의 앨범도 내서 한번 들어보았다. 자몽살구클럽. 상큼한 과일향이 나는 듯한 제목이다. 가수의 목소리도 비슷하게 맑고 단아한 음색이다. 그런데 목차를 보니 살구가 그 살구가 아닌 모양이다.

주인공은 가정폭력에 시달리는 여중생이다. 학교에 아무도 없는 저녁 한때 동아리 모집 공고 게시판에 붙어있던 이 종이를 보고 다음날 오후 5시 음악실로 향하게 된다.

소하 너 우리 클럽 이름이 왜 자몽살구클럽인지 알어?" 고개를 저었다. 그런 나에게 태수 선배는 한트를 제공했다.
"자몽살구를 줄여 봐.“
“…..”
입술을 멈추거리자 웃음 빵 터뜨린 태수 선배의 손이 어깨 위로 올라왔다.
"뭘 쫄고 그래. 니가 생각하는 그 단어 맞아.
자살. 너 그거 하고 싶어서 여기 찾아온 거잖아.
그치?"


소설은 자살을 하고싶은 네 여중생의 이야기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고싶어하는 네 여중생의 이야기다. 네 명중 사실 가장 비참해보이는 이는 주인공인데, 알콜중독 아버지의 가정폭력에 시달리며 돌봐주는 이는 없고 어머니는 견디다 못해 가출한 지 오래되었다. "나의 울타리는 개박살난 지 오래다"라는 주인공의 독백은 마음이 아프지만 좀 작위적이고 식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이런 극단적인 설정은 파국적인 결말과 연결이 되는데 꼭 이래야 했을까 싶기도 하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 이런 처지에 놓인 아이들이 아직 적지 않을 것 같고 이렇게 말하면 잔인하게 들릴 지 모르지만, 보통의 독자가 감정이입을 하기에는 너무 자극적인 소재이니까.

하지만 주인공과 자몽살구클럽 친구들이 보여주는 존재의 고통과 그럼에도 살고 싶은 의지를 그만큼 강렬하게 드러내기 위한 장치라는 생각도 한편으로는 들었다. 바다에 널부러진 해초의 비린내에서 삶의 흔적을 발견하고 자신과 비교하게 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작가가 언젠가 해봤을 법한 경험에서 우러나온 섬세한 묘사같다.


바닷물 입자만큼 고운 모래 위에 두 발로 서 있는 상황이 내게는 신기할 따름이었다. 해변 군데군데 널브러져 있는 해초의 비린내는 트럭 짐칸에 남겨진 동태 핏물 비린내와 달랐다. 찬 바람을 배회하는 해초 냄새에는 분명한 생동감이 최선을 다해 꿈틀거렸다. 죽었다고 오해받기 쉬운 해초는 이 냄새로 본인이 살아있음을 증명해 왔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나는 무엇으로 내가 살아있음을 증명해 왔을까? 나는 해초보다 못한 삶을 살고 있는 걸까? 바다까지 와서 이런 생각을 하는 내가 싫었다. 좋은 마음으로 온 언니들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았다.


폭력을 쓰는 아버지를 피해서 학교로 달려가 자몽살구클럽 친구들에게 안겨 위안을 얻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나라는 존재가 위태롭게 느껴지고 그것을 온전히 의탁하고 싶은 대상을 갈구하게 되는 경험은 있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마침내, 또는 잠시라도 찾았다고 생각될 때 한편으로 몰려오는 불안감도 언젠가는 겪었었던 데자뷔같다.

자몽살구클럽 활동이 분주해질수록 커지는 행복은 모순적이게도 불완전한 감정들까지 데려 온다. 함께 몸을 키워가는 불안이 폭파하는 날이 온다면. 삶을 죄 뒤덮는 어마어마한 재앙이 찾아온다면. 그때의 우리는 오늘처럼 꾹꾹 뭉쳐 생존할 수 있을까? 오늘의 구원을 갚을 수 있는 미래가 나에게 존재할까? 존재하는 거라면,
그날의 바람이,
하늘이,
언니들이,
변함없이 오늘 같으면 좋겠다.


딸은 왜 이 소설에 끌렸을까? 그리고 왜 나에게 보라고 권했을까? 그것을 알기 위해 펼쳤지만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런데 그만큼 딸을 포함한 요즘 아이들이 많이 아프고 힘든 건 알겠다. 딸이, 아이들이 조금이라도 '살구싶어'지게 만들기 위해 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어떤 말을 해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