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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우주가 내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걸까

우주의 신호를 발견하다

by 돈냥이


아무렇지 않게 있다가 문득 늪에 빠진 듯 기분이 서서히 가라앉고 있음을 느낄 때가 있다. 오늘 오전에 그 순간이 갑자기 찾아왔다. 몇 달 전에 그만 둔 회사 일로 고객센터와 통화를 반복해야 했는데, 개인정보 확인을 위해 생년월일을 몇 번째 불러준 끝에 겨우 마무리 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짜증이 치밀어 올랐고 그것이 기점이 되었는지 근래 일이 제대로 안 풀리는 이유에 대해 태어난 순간까지 거슬러 올라가 나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들이 분수처럼 걷잡을 수 없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이럴 때는 그 반복되는 생각에 사로잡히기 전에 걷는 것이 그 기분에서 제일 쉽게 빠져나오는 방법이기에, 햇볕에 내리쬐는 바깥 온도가 29도임을 확인하고도 짐을 싸서 무작정 나왔다. 갈 곳을 정한 것은 아니라서 일단 근처 공원 그늘에 앉아서 어디로 갈지 생각하려 했는데 이미 사람들이 거리두기를 준수하며 앉아 있었다.



어디로 갈지 고민하면 또 나의 부정적인 되새김질에 비료를 주는 격이라 제일 먼저 떠오른 장소인 도서관으로 바로 출발했다. 버스를 타고 가는 중에 점심을 어찌할까 생각했다. 도서관에서 멀지 않은 곳에 가보고 싶은 카페가 있었는데 사람도 많을 것 같고, 가격이 비쌀 것 같아 미처 가보지 못한 곳이었다. 기분을 전환 할 겸 큰 마음 먹고 그 곳으로 가기로 마음 먹었는데, 문득 어제 읽었던 책의 내용이 생각났다.


"우주에는 기적의 에너지가 있다"는 책인데, 여기서 저자가 집을 구할 때의 이야기가 나온다. 원하는 집을 찾은 듯 했지만 확신이 없었던 저자는 친구의 조언을 빌어, 이것이 답인지 우주의 신호를 요청하면서, 만일 우주의 보살핌이 있다면 올빼미를 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 집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들른 카페 앞에 주차된 차의 범퍼에서 올빼미 스티커를 발견하고 이 집이 옳은 선택임을 확신했다는 이야기였다.


이것을 보고 나도 가볍게 기도를 했다. 지금 내가 내 상황에 불안할 필요없이 잘 하고 있는 것이라면 당근 다섯개를 보여달라고...


버스에서 내리니 바로 앞에 야채 가게가 있었다. 혹시나 하고 살펴보았는데 당근은 없었다. 여름 당근이 나올 시기는 지났고, 가을 당근 수확 시기도 아니니 없을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마트에 가면 항상 볼 수 있는 당근이 내가 기도한 다음날 야채 가게에서 보이지 않음에 조금 섭섭한 마음이 들었다. 하필이면 기분도 가라앉아 있는 지금 그 흔한 당근 하나 안 보이나 싶었다.




다행히 카페에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첫 손님인 듯 했고, 가격도 저렴한 편이었다.

화분이 가득한 카페 한 켠에 자리 잡고 즐겨보는 드라마를 시청했다. 큰 빵과 넉넉한 양의 커피와 좋아하는 드라마가 함께하니 기분이 점점 나아지는 것 같았다. 그런데 화면에 계란 거품으로 만든 당근 모양이 나오는 것이 아닌가!


설마 이게 우주의 신호인가

라는 오해는 잠깐이었고, 무의식 중에 당근에 집착하고 있었나보다 하고 웃어 넘겼다. 거품으로 만든 당근보다는 웃는 것이 기분에는 더 도움이 되는 듯 했다.

점심도 먹었고 도서관에 잠깐 들려서 볼만한 책이 있나 둘러보다가 스터디 카페에 가서 할 일들이나 마무리하자 싶어서 돌아왔다. 돌아오는 길에 버스를 갈아타야 했는데 평일 낮시간에 배차간격도 긴 버스들이 어쩜 기다릴 틈도 없이 바로 오는지 신기했다.

하지만 진짜 신기한 일은 그 다음에 일어났다.


스터디 카페 옆에는 야채과 과일을 판매하는 상점이 있는데 늘 스터디 카페의 입구에까지 상품을 진열해 놓아서 지나는 길에 무심코 보게 된다. 거기서 발견한 것이다.

당근 다섯개



너무 놀라서 그 자리에 멈춰서서 그 바구니를 자세히 보았다. 딱 한 바구니 안에 정확히 다섯개의 당근이 놓여져 있었다. 다른 야채와 과일들은 두세바구니씩 있는데 오직 당근만 한 바구니 있는 것도 신기했고 다섯개라는 갯수도 신기했다.





"결국 해내는 사람들의 원칙" (앨런 피즈, 바바라 피즈 저)에서 망상활성계라는 뇌의 한 부분에 대해 이야기한다. 뇌에 중요하다는 신호를 보내면 이 망상활성계 RAS에서는 그에 관한 정보를 더 적극적으로 인식하게 된다는 것이다. 어떤 차를 사기로 고려하고 있다면 갑자기 길에서 그 종류의 차가 자주 눈에 띄게 된다든지 하는 현상이 바로 이 RAS 때문이라는 것이다.


당근 다섯개도 어쩌면 나의 RAS가 활동한 결과일수도 있다. 무의식 중에 당근 무더기를 볼만한 곳인 마트의 푸드코트에서 점심을 먹지 않았고 무의식 중에 야채 가게를 꼼꼼하게 둘러보지 않았거나 갯수가 다른 당근을 미처 보지 못 한 것 일수도 있다. 어쩌면 시크릿에서 이야기하는 끌어당김의 법칙이 작용한 것일수도 있다.


하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나에게 지금 필요하고 믿고 싶은 것은 나의 지금 일상이 내가 바라는 곳으로 가고 있다는 확신이다. 당근 다섯개를 보여달라 말하고 그것을 보게 된 것에 어떤 작용이 있었든지 간에 나에게 기댈 곳이 있다는 마음의 평온을 준 것으로 충분하다.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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