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는 해마에 저장된 단기 기억이 반복되면 중요한 정보라 인식하여 장기 기억으로 보존한다고 한다. 앞 글에서 이야기했던 RSA 또한 중요한 정보라고 인식한 것과 관련된 정보를 적극적으로 수집하게 된다. 따라서 어떤 기억을 장기 기억으로 저장하고 무엇에 관련된 정보를 수집할 것인지를 의도적으로 정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이다. 특히 적절하게 기간을 두고 횟수를 늘려 반복을 하면 장기 기억에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공부를 할 때에도 한 번에 적은 양을 완벽하게 암기하려고 하기보다는 가볍게 훑어보는 횟수를 늘리는 것이 많은 양을 기억하는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을 계속해서 되새김질하는 것은 결국 그 기억을 공고히 하는 것 밖에 되지 않는다. 그리고 무의식 중에 그와 비슷한 상황을 찾아다니게 될지도 모른다. 상대방은 기억조차 하는 못하는 일을 혼자 되내어봤자 치유할 수 없는 감정만 악화시킬 뿐이다. 게다가 과거의 기억이라는 것은 그대로 멈추어 있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왜곡되기도 하고, 그때 느꼈던 감정이 기억을 떠올리는 현재의 감정에 영향을 받아 더 심각하게 떠올려지기도 한다. 내가 알지 못하는 진실에 대한 확인도 없이 내 기준과 내 감정에 의해서 재생산될 뿐인 것이다.
시간이 이미 지나버린 기억은 사실 확인도 거의 불가능하다. 상대방과 나의 기억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대체로 자기 입장에서 유리하거나 불리하게 해석하기 때문이다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은 반성과 배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면 최대한 떠올리지 않는 것이 좋다.
하지만 과거의 안 좋았던 기억을 떠올리지 않기 위해 노력을 하기가 어려운 사람들이 있다. 마치 코끼리를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 즉시 머릿속에 코끼리가 떠오르 듯, 되풀이하는 안 좋은 기억에 대한 생각을 내려놓으려고 할수록 그 기억에 집중이 될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것과 관련된 다른 경험들까지 떠오르는 악순환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연쇄작용처럼, 문득 떠오른 어떤 기억에 연달아서 이어지는 부정적인 기억들과 감정을 끊어내는데 가장 효과적인 것은 정신을 현재에 고정시키는 것이다.
마음챙김 혹은 명상이라는 것은 현재의 감각에 집중하여 정신과 마음을 지금 이 순간에 두는 것으로, 생각을 줄이고 마음을 안정시키는데 도움을 준다. 무념무상의 상태가 가장 이상적이지만 초보의 경우, 떠오르는 생각을 의식하지 말고 그대로 지나가게 내버려 두면서 호흡에 집중하는 것부터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우울증이 한참 심했던 시기에는 이런 명상 상태에 들어가는 것이 어려웠다. 부정적인 생각이 머릿속을 꽉 채운 상태라는 것을 인지했을 때는 이미 거침없이 생각에 빠져들어 그냥 흘려보내기가 어려웠다. 회사처럼 많은 사람들과 함께 있는 외부에서는 특히나 마음을 진정시키고 내면에 집중하기는 불가능했다.
그럴 때 손쉽게 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다.
바로 언제나 나와 함께 하는 내 신체를 보고, 그것이 있음에 감사하는 것이었다.
급작스럽게 찾아온 무기력함과 우울감, 그리고 부정적인 기억들에 사로잡혀 갈 때, 그 순간의 그 감각이 나를 더 혐오스럽게 느끼게끔 작동하고 있을 때 우연히 내 두 손을 보게 되었다. 그리고 두 손이 있어서 감사하다는 생각을 의도적으로 하였다.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솔직하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던 것은 아니고, 그저 문장으로서, 왜 두 손이 있어 감사하고 행복한지, 그것이 있음으로써 내가 무엇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해 생각했다.
즐겁지 않아도 웃는 표정을 지으면 실제로 즐거운 감정이 생겨난다고 하듯이, 의식적으로 감사의 문장을 만들어내니 정말 내 두 손이 있음에 너무 감사한 마음이 들었고, 풍요로운 느낌이 마음 속을 채웠다. 두 손이 있는데 왜 가지지 못한 것만 생각하고 있었을까라며 내친김에 두 다리, 두 눈, 코, 입, 머리카락 등등 다들 평범하고 당연한 것이라 생각하지만 누군가는 분명 부러워할 신체기관들을 보며 감사한 이유를 찾았다.
그렇게 감사함에 한동안 집중하고, 내가 생각보다 정말 많은 것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머릿속이 맑아졌다. 늪처럼 찐득한 먹구름이 가득 차있는 상태에서 그것들이 걷히며 햇살이 비추는 듯 한 밝고 개운함이 남았다.
그 뒤로 그렇게까지 부정적인 기억과 감정에 사로 잡히는 일은 없었다.
현재에서도 가장 쉽게 내가 인지할 수 있는 좋은 것에 집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좋은 것은 언제나 쉽게 볼 수 있거나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좋다. 기분이라는 것을 아직 자유롭게 제어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언제든 우울한 기분에 빠져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반복하는 부정적인 기억과 감정은 정해져 있었고, 그것들이 스멀스멀 솟아날 때면 눈앞에 있는 내 손을 보았다. 지금 현재 내가 가지고 있는 제일 좋은 것이자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손을 보면 과거에 무슨 일이 있었든 그때 시절로 돌아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생긴다.
이렇게 과거의 부정적인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현재의 풍요롭고 감사한 기억으로 바꾸어 반복하게 되면 결국 RSA의 작용으로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드는 감사한 것들에게 집중하게 될 것이고 그런 것들로 채워나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마음을 현재에 두라고 해도, 현재의 상황이 좋지 않으면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도 있다. 어쩌다 지금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답을 찾기 위해 또 과거의 내 행적과 경험을 뒤적이며 우울과 자책의 늪에 빠져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