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일간 진행되는 취업지원프로그램을 참가한 적이 있다. 취업에 도움이 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 중 첫날 진행된 사군자에 빗댄 적성 검사 결과가 매우 흥미로웠다. 적성별로 사군자로 나누고 다시 외향과 내향으로 나누어 총 8가지 부류로 성격을 분류해놓은 검사였다. 나는 15명의 수강생들 중에서 유일한 내향대나무였고 내가 생각하는 나와 흡사했다.
대나무형 인간의 특징이 대략 이러했다.
대나무처럼 곧고 의지가 강하며, 냉정하고 딱딱하게 보일 수 있다. 스스로 알아서 독립적으로 일하고 다른 사람에게도 홀로서기를 기대한다. 수많은 아이디어를 쏟아내지만 경제적 이득과 연결 짓는 것을 어려워하고, 다가가기 힘들고 잘난 척하는 사람으로 보인다. 선호하는 일의 특성은 일상적인 잡무를 하지 않아도 되고 독립적인 공간에서 개인 연구나 기존의 절차를 개혁하는 일, 합리성과 공정성을 최우선으로 하는 일 등이다.
이런 유형의 사람이 취업할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일반 사무직이 자신만의 공간을 배정받거나 개혁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업무를 맡기는 회사는 없을 것이라고 확신하다. 다가가기 어렵고 곧아 보이는 성격은 대부분의 회사에서 꺼려하는 유형이기도 하다.추천 직종은 대부분 박사나 연구 전문직종이어서 다시 대학을 가서 석사 과정부터 밟아야 할 것 같은데 학비는 둘째치고 나이가 걱정되었다. 다행히도 구직 상담 시 적성검사 결과는 반영하지 않았고 그저 원하는 직종과 조건만 확인해서 알아봐 준다는 것이 전부였다.이런 유형은 어떤 직업을 소개해줄지 궁금했는데 차라리 참고하지 않는 게 나을 것 같다.
휴식시간에 다른 참여자들의 사연을들을 수 있었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결혼과 출산으로 인한 경력단절 여성들이었는데 기존에 하던 직무가 있었지만, 재취업을 위해 다른 분야의 자격증을 따고 교육과정을 이수하고 계셨다. 그리고 나보다 어린 나머지는 이제 막 취업준비생이 된 사회초년생들이었다.
구인의 조건에서 많이 벗어난
결혼과 출산을 거치지 않았고 경력이 단절된 적 없으나 나이는 그들 못지않은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부류였다. 계속해서 일은 해왔으나 지원 성격의 업무만을 해왔고 OS를 능숙하게 다루지만 시험에는 잼병이라 자격증은 하나도 없었다. 토익점수는 지원 기준을 넘지만 외국인과 대화해본지가 너무 까마득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하고 싶은 직종이나 업무가 딱히 없었다.
정해진 업무 범위가 있는 사무직 중에 내가 아는 직종이 회계/경리뿐이라 그렇게 지망한다고는 했지만 전산회계 자격증을 딸 자신도 솔직히 없을뿐더러, 취업상담사도 말했듯 20대 초반의 어린 사회초년생들 대부분이 그 직종을 원하기 때문에 경쟁이 어려울 것이다.최저시급을 주고 회계 경력이 없는 신입을 뽑는다고 하면, 그래도 사회경험을 좀 해봤고 회사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 것 같은 중고 신입을 선호할 것 같은데 세상은 그렇지 않다. 이왕이면 다홍치마라고 하는데 왜 더 많은 경험보다 더 어린 나이가 "다홍치마"인지 알 수가 없다.
나보다 나이가 많으신 분들은 각기 다른 경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재취업을 위해 준비하는 것은 사회복지사와 요양보호사, 그리고 직업상담사로 진로가 비슷하게 정해진 듯했다. 운전과 체력, 그리고 살가운 성격이 필수인 그 직종들은 단 한 번도 내 진로 선택지에 올라온 적이 없는 것들이었다.적성에 맞지 않아도, 체력이 부족해도 결국 나에게도 저 선택지 밖에 남지 않은 것인가 라는 생각이 들었다. 4~50대가 주를 이루는 분야에서라면 나도 젊은 피니까 유리한 면이 있을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사람 자체가 업종에 맞지 않으니 그렇지도 않겠다라며 금세 생각을 접었다. 결혼과 출산 전에는 각기 다른 일을 해왔던 분들이 재취업을 위해 선택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는 현실 앞에 한숨을 쉬는 모습에 먹먹함이 남았다.
3일간의 프로그램이 끝난 후에도 여전히 내 진로를 생각하면 막막하기만 하다.
경력을 살리자니 정신적으로나 체력적으로 더 이상 일을 지속하기는 어려울 것 같고, 새로운 일을 하자니 사무실에 앉아 컴퓨터로만 업무를 하는 정적인 일을 연결받기에는 자격증은 둘째치고 나이가 너무 많다고 한다. 업무 범위를 줄이고 희망연봉을 최저시급으로 낮추어도 내가 원하는 직무는 어린 취준생들의 몫이었다.
내가있을 수 있는 곳이 있을까요?
세상이 정해놓은 길에서 조금씩 멀어지다가 정신 차려보니 외떨어진 섬에 나 홀로 서있는 기분이었다. 저 멀리 육지가 보이는데 그곳에는 공부 하랄 때 하고, 취업해야 할 때 하고, 결혼해야 할 때 하고, 출산해야 할 때 한 사람들이 모여 있다. 그리고 그들의 앞에는 또 정해진 길들이 있었다.
나 혼자 있는 이 섬에는 아무것도 없는 것 같다. 무언가 있었는데 세상이 그런 건 필요 없다며 지워버리고 남겨진 것도 없이 맨 손으로 다시 시작해야만 하는 기분이었다. 분명 나같이 다른 섬에 홀로 남겨진 사람들도 있겠지만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보이지 않았고, 오로지 세상이 정해놓은 스케줄을 잘 따라간 사람들만 보였다. 물론 그들도 자신들 앞에 남겨진 협소한 선택지에 만족하는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매번 갈림길에서 나를 위하고 나에게 잘 맞는 선택을 해 왔다 생각했고 그게 세상에 피해를 주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세상이 정해놓은 규격에서 벗어난 인간이 되어 버린 것 같아 당황스럽다. 하지만 나 또한 그들이 정해놓은 대로살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막막한 기분이 들지만 어쩌면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하는 때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돈 버는 재주가 딱히 없는 인간인지라 또다시 적당히 규격에 맞는 척하면서 일단 생계를 이어갈 궁리를 하는 수밖에 없다.
김정연 작가의 혼자를 기르는 법에서 전원코드들이 자신이 꽂힐 수 있는, 자신에게 맞는 모양의 콘센트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나온다. 맞는 곳이 없으면 적당한 어댑터를 찾아서 적당히 맞는 척하는 것이라고 하는데, 지금 나에게는 적당히 사회에 나를 끼워 맞춰줄 어댑터를 찾거나 맞는 척 일단 들어가서 합선이 날 때까지 버티다가폭발하는수밖에 없는 걸까?
구인하는 회사 중에서 내 구직 조건 중 맞는 부분이 있는 곳을 찾고 거기에 맞춰 나의 구직 기준을 조정하고, 회사가 원하는 인재상에 맞는 나의 특성을 정리하고 부각해서 적당히 맞는 인재인 양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작성해서 지원할 것이다. 또 그렇게 맞는 척하며 매달 찍히는 월급을 보며 안 맞는 부분에서 눈을 감으면서 몇 달, 혹은 몇 년을 지낼 것이다. 하루 몇 시간씩 나란 존재를 지우거나 가끔 너무 힘들 때는 차라리 진정한 나를 가사상태에 빠지게 만들면서 말이다.
취업지원 프로그램에서 구직에 대한 새로운 기술을 배웠다기보다는, 현재 나와 비슷하게 보일 수 있지만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다른 구직자들이 어떻게 준비하고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 만나 볼 수 있었던 자리였던 것 같다. 그리고 대인 업무가 힘들고 육체노동도 어려우며 전문적인 분야의 경력을 갖지 못한 인간은 취업 시장의 규격에서 너무나도 멀리 떨어져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 기회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