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첫 번째 변곡점이라고 할 수 있는 아홉수는 19살, 고3 때였다. 2학년 때까지 공부에 취미가 없어 뒤에서 몇 등하던 나는 대학 진학보다는 취업을 하는 게 낫겠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시키는 공부도 안 하는 인문계 학생이 고졸로 취업할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부모님과 엄청나게 싸워야 했다. 백보 양보해도 전문대까지 밖에 못 간다라고 했으나 사실 그때 성적으로는 전문대도 힘들어 보였었다. 답답했던 부모님은 친척들이 모인 자리에서 하소연을 했고 그 많은 어르신들에게 야단과 회유와 잔소리를 맞았어야 했으나 그럼에도 천지분간 못하는 맹텅의 고2의 결심은 태산과도 같았다.
그 태산을 움직인 것은 다름 아닌 시트콤이었다. 논스톱에서 나오는 재미있는 대학 생활이 텅 빈 고집쟁이 고2의 머릿속에 꽃밭을 심어 놓았고 그런 대학 생활을 하고 싶다는 일념으로 전교 꼴찌에 가까웠던 그 학생은 단 1년 만에 수능 상위권에 진입하며 당당히 4년제 대학에 합격하였다.
논스톱의 배경으로 나왔던 그 교정으로 입학하기에 충분한 성적이었지만 스카이도 아닌데 야무지지도 못한 너를 서울로 홀로 보낼 수 없다는 부모님의 결정에 그나마 지방에서 괜찮은 대학의 높은 과로 진학을 했다. 알고 보니 과 선택만 잘했으면 스카이 진입이 가능했었고 지방대보다 커트라인이 낮은 인서울 대학을 나오는 것이 차라리 사회생활하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나중에서야 알았다.
그 당시 내 성향으로 봐서 혼자 서울에서의 자취 생활은 무리라는 것도 충분히 납득을 했기에 아쉬움은 아주 약간만 남았지만, 내 선택이 어른들의 심한 반대에 부딪혀도 그리 크게 잘못된 선택이 아니라는 근거 있는 믿음이 생겨버렸다. 그 믿음을 바탕으로 맨 몸으로 호주 워킹 홀리데이를 떠날 수 있었고, 귀국 후 타지에 첫 직장을 구하는 것도 과감히 실행할 수 있었다.
나의 첫 번째 아홉수 때 얻은 것은 나에 대한 믿음이었다.
스물아홉
두 번째 아홉수인 29살, 모두가 올해 안에 시집을 가야 되고 이직도 더 이상 못 할 거라고 이야기하는 그 나이가 되었다. 사실 28살에 결혼을 하고 싶었던 나는 이미 하고 싶은 게 너무 많아졌고 혼자 사는데 재미가 붙어버렸었다. 당시 원룸 월세에 살고 있었기에 신혼을 그렇게 시작해도 괜찮다 생각했고 나를 제외한 모든 사람들이 반대하지 않았다면 그때 결혼을 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어쨌거나 당시 남자 친구조차 반대하는 결혼을 할 수는 없었고, 서서히 혼자 사는 삶에 재미가 들리기 시작했다. 돈을 버는 것도 재미있었다.
하지만 일을 한 지 1년이 지나자 세상일이 내 마음 같지 않음에 인도로 여행을 다녀왔고, 거기서 깨달음을 얻어 이직을 준비했다. 말이 좋아 경영지원이지 온갖 사무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데 질려서 기술을 배우기로 했고, 평소 관심 있었던 인테리어 업계로 이직하기 위해 자격증을 따고 학원을 다니며 캐드와 3D MAX를 배웠다. 그리고 다음 해 인테리어 설계직으로 이직에 성공한다.
여기까지만 보면 거대한 두 번째 변곡점인 듯 하지만 사실은 U턴하는 도로였다. 100만의 월급을 받으며 자정까지 일하고 가끔은 아침 일찍 현장도 나가야 하는 생활을 반년 정도 한 뒤, 돈을 버는 것은 잘하는 일을 해야지 좋아하는 일로 하면 안 되겠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고 다시 사무직 일자리를 찾아 떠난다.
칼퇴 가능하고 주말이 보장되는 사무직 일자리를 찾아 입사하고, 업무가 늘어나면 연봉 인상을 요구하고, 연봉이 인상되면서 사생활이 점점 줄어들게 되어 결국 퇴사하고 다시 급여를 줄여 입사, 업무량 증가, 연봉 상승, 퇴사를 반복하며 30대를 보내게 된다. 소위 워라벨을 찾아 헤매는 시간이었던 것이다.
결국 원점으로 돌아간 듯했으나, 스물아홉에 했던 그 결심은 나는 언제든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서른아홉
드디어 올해 세 번째 아홉수인 39살이 되었다. 이 나이쯤 되면 내 명의로 된 아파트에 살면서 직장에서건 집에서건 똑같은 하루를 보내며 생각 없는 매일을 보낼 줄 알았는데 현실은 또 다른 워라벨의 실패 끝에 퇴사하고 백수가 된 지 7개월째이다. 너무 힘이 들어서 바로 이직할 용기도 내지 못하고 읽고 싶었던 책을 실컷 읽으면서 나의 내면으로 파고들었다.
더 이상 내 성향을 숨기면서 돈을 벌고 싶지 않다 생각했고, 나에게 많은 시간을 들이고 싶었다. 사람들과의 만남을 최소화하고 싶었고 일에서 보람을 느끼며 성장하고 싶었다. 지원한 이력서에 대한 응답이 없는 것과는 별개로 다시 고용되어 월급을 받는 생활이 간절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물론 돈은 간절했지만...
이력서를 넣을 곳을 찾고 지원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월급이 작더라도 일을 적게 시키는 곳이 별로 없었다. 남은 시간은 대부분 책을 읽고 영어 공부를 하면서 보냈다. 읽은 책들이 쌓이자 글을 쓰고 싶어 져서 블로그를 개설했다. 블로그로 수입을 창출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으나 내가 만드는 글의 결이 블로그와는 별로 맞지 않는다는 느낌이 들었다. 적극적으로 이웃 신청도 하고 이웃블로그에 가서 좋아요 열심히 눌러주고 해야 하는데 나의 낯가림은 온라인에서도 발휘되어 관심이 없는 블로그에 서로 이웃을 신청한다는 건 너무 무서운 일이었다.
그래서 브런치로 왔다. 그동안 한 번씩 작가 지원을 하다 떨어졌는데 이번에는 쓰고 싶은 글도 있는 데다 간절한 마음으로 지원해서 그런지 승인이 되었다. 그래서 지금 다시 한번,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은둔하면서 글로 먹고살 수 있는 인생을 꿈꾸기 시작했다. 아직은 어떻게 해야 그렇게 살 수 있는지 몰라 그저 열심히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게 전부이지만, 지금껏 그래 왔듯이 또 원하는 길로 가고 있는 것이라 믿는다.
의도하지 않았지만 아홉수 때마다 새로운 결심을 하고 지금까지와는 다른 인생을 준비했다. 올해도 딱히 서른아홉이 되기를 기다린 것도 아니었는데, 한 번도 해보지 않은 글로 먹고살고 싶다는 소망을 갖고 보니 서른아홉이었던 것이다. 이것은 별 주술적인 의미가 있는 것도 아닌데 이 소망에 힘을 실어 결심이 되게 만들어 주었다. 어쩌면 생계를 위해 직업을 구해야 할지도 모르고 그래서 구직은 계속하고 있다. 그래도 글을 쓸 여유가 있어야 한다는 구직 조건만은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이다.
조금씩 모양은 달랐지만 지나고 보면 내가 원했던 모습으로 살았었고, 하나마나한 일이었다 생각했던 경험들도 결국 한 번쯤은 겪었어야 할 일들이었다. 지금 보내는 이 시간이 남는 것 없이 허무한 것 같아도 다음 아홉수가 되었을 때 돌아보면 40대를 위한 도약으로 기억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