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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속도로 살아간다는 건

다양한 노선이 있고 다양한 목적지가 있는 세상

by 돈냥이



토끼와 거북이 스티커 발부 기준


뭐든지 빨리 끝내는 것이 1등이라고 생각하는 조카의 교육을 위해 언니는 토끼와 거북이 스티커를 이용했다. 급하게 행동했을 때는 토끼 스티커를 주고 차분하게 행동했을 때는 거북이 스티커를 주어, 거북이가 이기면 원하는 만화를 한 편 볼 수 있는 보상을 주는 것이다. 먼저 10개가 모아지는 동물 쪽이 이기는 것인데 어렸을 때는 양 측이 비슷하게 모여지더니 점점 거북이가 압승하기 시작했다.


빨리 끝내는 것이 좋은 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치던 시절을 지나 적정 속도로 적당한 결과를 내는 것이 중요한 시대가 온 것이다. 익숙해지면 속도를 올릴 수 있지만 속도를 먼저 중시하면 나중에 작업의 질을 높이는 것이 어렵다. 반드시 그렇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경우, 어떤 일이 손에 익어서 빠르게 해도 일정 수준 이상의 결과물이 나오게 하려면 작업의 질을 먼저 일정 수준 이상 나오게끔 숙달시키는 것이 먼저여야 한다. 그리고 숙달된 작업을 반복하면 속도는 자연스럽게 올라가게 된다.


토끼도 그렇지만 거북이도 결국 세상이 원하는 속도라는 점에서 아쉽기는 하다. 어느 쪽이건 세상이 원하는 속도로 움직여야 한다는 점에서 말이다. 이전의 세상이 조금 낮은 수준으로 빠른 것을 추구하는 성향이었다면 지금은 조금 더 높은 수준을 위해 초반 속도를 늦추는 것을 요구하는 세상이 되었다고나 할까... 종국에는 토끼를 요구하면서 더 높은 수준도 같이 요구할 것이다. 결국 달라진 것은 "세상의 기준"일뿐, "세상의 기준에 맞추어야 한다"라는 명제는 변함이 없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규정속도 이하 저속 주행 중


대학을 졸업하고 공무원 시험 준비를 1년 했었다. 공부를 잘하는 머리도 아니고 끈기를 가진 궁둥이도 아니라서 1년 만에 접고 취업시장에 뛰어들었다. 친구들은 몇 년을 더 공부하다 취업 시장으로 들어왔는데, 나는 취업 준비도 실패해서 워킹 홀리데이를 2년 다녀온 뒤에 첫 직장을 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시작한 시점이 비슷해졌다.


그 뒤로 우리가 사는 모습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내가 퇴사와 공백기와 이직을 반복하는 동안 한 직장을 꾸준히 다니는 친구가 있었고, 결혼 후 전업주부로 살면서 부동산과 주식 투자를 공부한 친구도 있었다. 다른 친구들의 모습을 보면서 한 직장에 오래 버텨보기도 하고 투자 공부를 하기도 했다. 그렇게 항상 친구들에 비해 뒤쳐진 듯한 인생을 살았다. 그리고 지금, 계속되는 취업난에 공무원 공부를 시작하려고 한다.


남들은 열심히 공무원을 준비하다가 안돼서 포기하고 취업을 한 뒤 자리를 잡고 정착했을 시기에, 반대로 취업을 하고 안정된 삶을 살아야 할 시기에 퇴사를 했고 취업이 안되어 어쩔 수 없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한다니 대체 사회적 기준에서 얼마나 뒤처진 것인지 감도 잡히질 않는다. 늦깎이 수험생이 된 사람들의 후기에는 대부분 기혼자로 생활비를 벌어다 주는 반려자가 있었고, 어느 정도 자란 자녀들이 있었다. 그야말로 날백수에 부양해야 하는 부모와 함께 살고 있는 나는 얼마나 모자라고 뒤쳐진 인간인지 현타라는 말로도 부족한 충격에 오히려 아무런 아픔도 느끼질 못 했다. 자책할 시간조차도 아껴야 할 만큼 늦어버린 현실에 아플 자격조차 잃어버린 듯했다.






고속도로와 국도, 그리고 시내 주행


언젠가 시내버스로만 전국일주를 했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도시가 점점 커지면서 시외버스가 아님에도 바로 옆 도시로 이어지는 노선을 달리는 시내버스가 생겼던 것이다. 도시와 도시를 연결하는 시내버스를 이용해 전국을 한 바퀴 도는 노선이 공유되면서 방학을 이용해 도전하는 사람들의 후기가 속속 올라왔었다. 자가용이나 시외버스, 기차 등을 이용한 것보다 비용이 저렴했으나 시간은 오래 걸리는 그 도전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었다. "시내버스만을 이용해 전국을 돌아다닌다" 그 자체가 목적이었다.


시내버스를 이용하니 각 도시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게 되고 기차역이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이동하기 편한 관광지를 벗어나 관광객보다는 현지인이 자주 이용하는 음식점과 카페, 놀이공간 등이 소개되었다. 숙소 또한 호텔이나 펜션이 아닌 개성 있는 모텔과 민박 등을 이용하였다.

얼마나 빨리 목적지에 도착하고, 유명한 관광지를 얼마나 효율 있게 방문했느냐는 그들의 여행기록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같은 노선을 이용해도 다른 맛집을 찾았고 다른 숙소에서 머물렀다. 기존 여행과의 공통점이라고는 "다른 곳으로 이동"이라는 것 외에는 없다시피 했다. 그것은 이상하거나 비효율적인 일탈이라고 할 수 없는 그저 그런 종류의 여행이었다.






어쩌면 인생도 속도나 효율만 존재하는 것이 아닌, 이렇게 각기 다른 노선을 움직이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들자 마음을 짓누르던 조바심과 긴장감이 사라졌다. 기차를 이용하면 단 며칠 만에 전국을 돌 수도 있지만 그것은 최단기간 내 전국을 일주하고픈 사람에게 필요한 노선이다. 인생은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지고 있고, 또 같은 목적을 가지더라도 다른 노선을 선택할 수 있다. 얼마나 걸릴지 기간에 대해서도 어떤 사람은 빨리 도착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주요 관광지를 돌아보며 중간 도착지마다 휴식시간을 가지는 것에 중점을 두어 언제 도착하는지는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나는 인생에서 다양한 도로를 달려왔다. 신호등에 매번 정지해야 하는 시내 도로를 브레이크와 엑셀을 번갈아 밟으며 달리기도 하고, 거대한 배송차량들이 달리는 국도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달리기도 하고, 때로는 속도를 줄일 필요가 없는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는가 하면 어느 세월에 도착하나 싶은 심정으로 꾸역꾸역 내 발로 걸어서 간 적도 있었다. 그런 인생길에서 마음에 드는 구간도 있었는데, 배가 고프지 않아도 휴게소에 들러서 쉬어가고 유명 관광지가 아니어도 풍경이 좋아서 그냥 차를 세우고 뜨는 해와 지는 해까지 모두 지켜보는 그런 생활을 좋아했다. 누군가 빠른 속도로 목적지로 데려다주는 기차를 탄 기억이 없어서 아쉽기는 하지만 아마도 내가 원하는 여행에 맞는 기차 노선이 없었던 것이라 생각한다.


강인선 기자의 "힐러리처럼 일하고 콘디처럼 승리하라"에서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는 말은 곧 로마로 가는 길은 많다는 뜻도 된다는 말이 나온다. 거기에 생각을 하나 더해보면 꼭 로마로만 가야 되는 것도 아니다. 어디로든 갈 수 있고 어떤 방식으로든 갈 수 있고 어떤 속도로든 갈 수 있다. 언젠가 느리게 갔다고 해서 속도를 바꾸어 빠르게 달리지 말라는 법도 없다.


인생에는 빠름도 늦음도 없이 그저 무엇을 어떻게만 있음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다가 취업을 하든, 취업을 했다가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하든 그저 순서만 다를 뿐이지 결코 후자가 전자보다 늦은 것은 아니라는 생각과 함께 늦은 것이라 할지라도 뭐 어때라는 마음도 함께 가져본다.


내 속도와 내 방향, 그리고 이 순간의 선택과 다음에 할 일에 집중하는 것이다. 지금 나는 KTX를 타고 있는 것이 아니라 시내버스를 타고 일주하고 있다. 내릴 정류장을 선택해서 내렸고 다음 버스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것은 내 선택의 결과이지 세상이 나에게 시킨 것이 아니라는 것에 책임감을 더하고 불안감을 내려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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