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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Sep 10. 2023

호랭이

*우리집 고양이, ‘호랭이’의 시점에서 쓴 글입니다.


# 여기까지 오는데 우연은 하나도 없었어

2021년의 새해 첫날, 나는 새로운 주인을 만나게 되었다. 길고양이 보호소 주인은 일단 몇 주 키워보고 계속 키울지 결정해도 된다며 나를 정민의 집으로 데려왔다. 사람들은 집을 보러다닐 때 ‘이 집은 우리집 같아’ 느낌이 올 때가 있다고 한다. 신기하게 나도 그랬다.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곳곳에 배치된 고양이 피규어들이었다. 고양이 친화적으로 보이는 정민의 가족들이 마음에 들었고, 왠지 내가 진심으로 이들을 사랑하게 될 거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들을 집사로 간택했다. 짧은 시간 동안 매력을 발휘하려고 전략적으로 행동했다. 수면 양말을 신고 있던 정민의 발바닥에 머리를 들이밀고 가르릉 가르릉하고 애교를 부렸다. 그 소리가 매우 우렁차 사람의 귀에는 모터소리처럼 들렸다고 한다. 활력소를 찾고 있던 그들에게 내 귀여움이 먹혀 그 날부터 나는 ‘호랭이’가 되었다.



# ENFP

정민의 집에는 화분이 아주 많은데 가끔 무성하게 자란 식물이 있으면 사람들은 분갈이를 한다. 그들이 더 큰 화분으로 식물을 옮겨 심을 때면 나도 앞발로 흙을 꾹꾹 밟고 식물이 자랄 바닥을 다져준다. 다 생명에 도움되려고 하는 행동인데 집사들은 내 마음을 몰라준 채 더럽다며 나를 저 멀리로 보내버린다. 그래도 나는 쉽게 포기하지 않고 다시 돌아가서 분갈이에 참견한다. 사람들이 나를 기르듯이, 나도 무언가를 기르고 사랑을 듬뿍 주고 싶기 때문이다.


한편, 정민은 나한테 알록달록한 공을 한아름 선물해줬다. 구슬이 들어가서 딸랑딸랑 울리는 공, 내 머리만 한 묵직한 오렌지색 공, 솜사탕 같은 질감을 가진 공 등 모양과 크기가 다양하다. 공만 보면 나는 너무나 설레고 행복해진다. 사람들도 이렇게 단순하게 살면 더 행복할텐데. 하지만 사람들은 가끔 고민과 생각이 너무 많아 괴로워 보인다. 그럼 나는 그들의 무릎에 올라가 기꺼이 머리를 내어준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나를 쓰다듬기만 해도 사람들의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으니 그걸로 됐다. 나는 사랑 받고 사랑을 주기 위해 태어난 존재이니까!



# 사람은 사랑할 존재 없이 살 수 있나요?

정민의 가족에게는 몇 년 전까지 다른 놈이 있었던 것 같아 질투가 난다. 젖소 무늬에 기품 있어 보이는 자태를 가진, 야옹이라는 녀석이다. 정민의 가족들이 그를 얼마나 예뻐했냐면, 연필로 직접 그린 초상화가 걸려 있을 정도이다. 19년 동안 동고동락했던 그 친구를 안락사 시킨 날엔 온 가족이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허전함을 이기지 못해 나를 데려오기로 결심했다고.


사람들은 정말 이상하다. 누군가가 떠나면 다른 존재로 빈 자리를 채우고, 떠난 존재를 완전히 잊지는 못하더라도 슬픔은 조금씩 극복한다. 동물이 떠나도 이렇게 큰 슬픔을 느끼는데 하물며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어떨까? 사람들은 부모가 세상을 떠나면, 그들에게 받았던 사랑과 헌신을 슬하의 아이들에게 다시 전달하며 쓸쓸함을 달래는 것 같다. 결국, 사람들 역시 나처럼 누군가를 계속 사랑할 수 밖에 없는 존재인가 보다.


혹자는 반려동물이 먼저 세상을 떠나는게 슬프고 겁나서 키우지 못한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가 함께 하는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내가 언젠가 떠나면 남아있는 나의 사진과 영상들이 사람들을 위로하고, 내가 그래왔던 것처럼 다정하게 말을 건넬 것이다.



‘우리는 사랑해야 한다. 사람은 사랑할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 –에밀 아자르 , <자기 앞의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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