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민 Aug 17. 2023

명왕성의 비하인드 스토리

“그 별은 나에게 윙크를 하는 것처럼 보였어요. 눈이 마주치자마자 엄청난 희열을 느꼈답니다.“

1930년대, 미국 로웰 관측소의 클라이드 톰보는 명왕성을 처음으로 발견한다. 김연수 작가가 말하길 천문학적 발견이란 관측을 통해 어떤 별을 존재하게 만드는 일이며, 누군가가 지켜봐주는 순간부터 그 별은 반짝이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런 발견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우리 모두가 잘 알고있는 ‘수금지화목토천해명’ 태양계 행성 체계였다.


하지만 그 이후 우주에서 비슷한 크기의 소행성들이 수없이 발견되고, 학자들은 행성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할 필요를 느낀다. 크기가 작고 주변의 잡동사니 천체를 흡수하지 못하는 명왕성에는 ‘자격 미달’이라는 논란이 끊임없이 제기된다.


2006년, 국제천문연맹(IAU)은 76년간 태양계 아홉 번째 행성으로 불렸던 명왕성을 투표로 퇴출, 소행성으로 강등시킨다. 그 후 2015년, 클라이드 톰보의 뼈가루를 싣고 발사된 무인 탐사선 뉴 호라이즌스는 명왕성의 표면에 거대한 하트 모양이 그려져 있는 걸 발견한다. 이는 명왕성이 자신을 잊지 말아달라는 짝사랑을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몇 달 전 알쓸인잡을 통해 명왕성 퇴출에 얽힌 자세한 이야기를 접했다. 나는 비록 T이지만, F인 RM과 김영하가 말한 것처럼 명왕성이 불쌍하다고 생각했다. 그 이후 관련 영상들을 찾아봤고, 결국 펜을 들어 명왕성을 의인화한 비하인드 스토리를 쓰기 시작했다.



***

1.

‘체격이 너무 작다.'

‘수퍼스타가 되기에는 존재감이 부족하다.’

‘주변을 잊게 하고 흡수할 만큼의 독보적인 아우라가 없다.'

일반인과 전문가로 이루어진 424명의 심사위원 중 90% 이상이 플루토를 탈락시킨 최종 심사평이었다. 20주 간의 치열한 합숙 훈련을 통해 우주에서의 데뷔가 결정되는 오디션 프로그램. 그 곳에서 그녀는 그룹 Solar로 데뷔하지 못하고 추락했다. 광활한 우주에 이름을 알릴 수 있는, 어쩌면 돌아오지 않을 마지막 기회였는데.


타인의 인정이 삶의 원동력이었던 그녀에게 실패의 충격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익명의 수많은 사람들에게 가치를 평가당한다는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모멸감을 느끼게 했다. 심지어 그들은 이름까지 빼앗아갔다. 그녀에겐 플루토라는 예명이 있었지만, 데뷔에 실패한 이후엔 단지 참가번호 134340의 도전자가 되었을 뿐이었다.


"너는 이제 이름 없는 자가 되었다. 다시 너의 이름을 얻기 위해서는 무언가를 이뤄내야 한다."


그녀가 탈락한 이후, 8명의 나머지 멤버들은 모두 데뷔에 성공했다. 19세에 알아버린 냉혹한 현실은 인생은 경쟁의 연속이고, 앞으로 어디에 속하더라도 반드시 우열 관계에 놓이게 될 거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번처럼 패배자로 분류되면 더 이상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세상에서 잊혀져야 한다는 것. 무언가 단단히 고장나버린 것을 느꼈다. 다시 이름을 얻고 싶은 건지, 아니면 이대로 영영 물러나 쉬고 싶은 건지 모르겠다는 생각이었다. 마음 깊은 곳을 들여다보기도 힘들 만큼 무력감에 시달렸던 것이었다.


“혹시 뉴 아일랜드에 한 번 가보는 게 어때?"


친하게 지냈던 머큐리가 조심스럽게 이야기를 꺼냈다. 몇 초 간 정적이 흘렀다.

“마음에 상처가 있는 이름 없는 자들이 머물고 있는 곳이야. 잘 알려진 곳이 아니라 정보가 많이 없는데, 예전에 거기서 머물다 온 사람을 만났었어. 그 섬에는 치유 효과가 있어서 모든 걸 새로 시작하며 다시 이름을 얻은 사람들도 많대."


하루하루 짙어지는 우울의 수렁 속에서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어 그 말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추방당하듯 최소한의 짐을 꾸려 뉴 아일랜드로 도망쳤다.


2.

입국 심사원은 플루토의 뇌를 스캔해 마음 속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살펴봤고, 그녀를 섬 안으로 들여보냈다. 그들은 뉴 아일랜드의 핵심 지역으로 가기 위해 함께 드래곤을 타고 장시간 비행해 윤슬이 반짝이는 파란 바다를 건넜다.


착륙할 즈음 그들이 마주한 풍경은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고요한 무의 공간이었다. 칠흑 같은 어둠이 깔려있었고, 입국 심사원은 그 곳을 향해 나지막히 속삭였다.


"빛이 있으라"

그러니 빛이 생겨났다.


"청명한 보라색의 하늘이 있으라"

곧, 범고래가 미끄러지듯 유영하는 라벤더 색의 하늘이 눈 앞에 나타났다.


“봤죠? 여기서는 당신이 생각하는대로 세상이 만들어지게 될 거에요. 말하자면 당신이 이 곳의 창조주인 거에요. 부디 여기서 원하는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기를 바랄게요. 이 곳에서는 더 이상 아프지 않길 기도하겠습니다."

그는 따뜻한 응원을 건네며 작별인사를 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내 마음대로 되는 세상이라니. 나는 어떤 걸 좋아했더라?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곧 그 곳은 그녀의 상상에 따라 채워지기 시작했다. 매일 새순으로 다시 태어나는 여린 연두색 나무들, 밤이면 푸르른 강 위로 떠오르는 선홍색 달, 서정적인 음악들.


그 곳에서 한 달을 보내자 미소를 띨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꿈 같이 아름다운 세계를 그려내며 오감을 건드리는 몽환적인 아름다움을 만끽했다. 가끔 그녀가 만든 공간에는 다른 사람들의 상상들이 찾아오기도 했고, 그 때마다 기꺼이 캔버스를 내주며 사람들과의 예술적 교감에 몸을 맡겼다.


뜨거운 태양이 내리쬐는 낮이면 하늘에서부터 미끄럼을 타고 내려와 바다 속으로 풍덩 빠졌다. 에메랄드 빛 바다 깊은 곳에서는 물의 파동에 따라 섬세하게 흔들리는 아쿠아 플라워를 중심으로 풍성한 생태계가 펼쳐졌다. 저녁에는 강변에 앉아 호박색 빛을 뿜어내는 루미너스 페어리들을 지켜봤다. 그 강 저편에서는 밤마다 작은 소녀가 돛단배를 타고 나타나 밤하늘에 한 주먹의 별가루를 뿌리고 사라졌다. 강 위에서는 남자아이가 피아노로 만물을 깨우는 리드미컬한 선율을 연주했다. 플루토는 그에 맞춰 자신만 들을 수 있을 정도의 작은 목소리로 노래했다. 깊은 새벽에는 노스탤지어를 자아내며 느리게 걷는 새하얀 유니콘을 쫓았다. 그리고 태양이 비치기 시작할 무렵엔 황금색 스완들이 우아한 자태로 노니는 걸 하염없이 바라봤다.


그 곳은 완전히 그녀를 사로잡았다. 저마다의 이유로 지친 사람들을 안아주는 우주 상의 낙원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이 상상하는 저마다의 유토피아를 한 조각 한 조각씩 떼서 모두 합쳐 놓은 곳이 바로 이 곳이라고. 삶이 이렇게 많은 아름다움으로 차있다는 걸 지금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 속에 온전히 소속되어 보고, 듣고, 느끼는 능력을 회복했다. 비록 슬픔으로 얼룩져 가려져있었지만 그녀 본연의 순수함은 결코 더럽혀진 적 없던 것이었다.


3.

"당신은 왜 이름을 잃어버렸어요?"

강 위에서 매일 밤 피아노를 치는 남자아이가 어느 날 다가와서 물었다. 그는 카론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정말 놓치고 싶지 않은 기회가 있었는데, 놓쳐버렸어요. 수많은 사람들에게 안 좋게 평가당했고, 그 이후로는 숱하게 나 자신을 의심하게 되었어요."

그녀는 한 시간에 걸쳐 오디션 프로그램 참여와 탈락에 대해 털어놓았다.


"음, 정말이지 많이 힘들었겠어요... 근데 있잖아요, 그런 실패가 더 좋은 변화로 이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요“


그는 조금 더 생각하다가 말을 이어갔다.

"세상과 부딪치고 아파하고 교감할수록 자기가 거느리는 정서와 지혜가 많아진대요. 그러니 당신은 이미 엄청나게 커다란 세계를 갖고 있는 거에요. 그 이야기를 세상에 노래해봐요. 어떻게 슬픔을 대면했는지, 어떻게 이겨냈는지 말이에요. 모두의 기억은 겹쳐져 있다고 하니 사람들도 그 속에서 자기와의 접점을 발견할 거에요. 그리고 뉴 아일랜드를 배경으로 뮤직비디오를 찍어서 퍼트려보면 어때요? 여긴 일반적인 우주와는 달라서 사람들이 열광할 만한 아름다운 곳이에요. 아이돌 그룹을 넘어서 전세계적인 프로듀서로 성공해 보자고요!"


그 말을 들은 이후 그녀는 수개월에 걸쳐 영상을 찍어 크리스탈 병에 담기 시작했다. 무언가에 홀려 작품을 만들어내는 예술가 같았다. 수많은 병에 음악과 함께 뉴 아일랜드의 하늘, 바다, 생명체들이 작은 세계처럼 담겼다. 이들은 우주를 건너 여러 방향으로 보내졌다. 크리스탈 병이 도달한 불특정 다수의 사람들은 코르크 마개를 열고 그 속에 뭐가 담겨있는지 살폈다. 그러자 뉴 아일랜드의 선명한 색깔이 프리즘처럼 쏟아졌다. 이는 360도로 확장되며 사람들의 눈 앞에서 커다란 세상으로 펼쳐졌다. 플루토의 음악은 아픔과 치유, 성장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줬고, 그 안에서 외부의 소리는 차단되어 들리지 않았기에 내면에 침잠할 수 있었다. 사람들은 각자의 고통과 대면하고, 사유하고, 극복해냈다. 그리고 그 곳에서 만난 다른 사람들과 기꺼이 자신의 이야기를 나누며 위로 받았다. 현실로 돌아온 다음에는 뉴 아일랜드의 몽환적 아름다움을 떠올리며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그 곳을 그리워했다.


크리스탈 병들이 담고 있는 영상과 음악은 조금씩 달랐기에, 사람들은 수소문하여 여러 가지 버전을 모으기 시작했다. 이들은 곧 경매처에서 수 천만원에 팔리는 등 희소성까지 얻었다. 보도 자료에서는 플루토의 이름이 끊이지 않고 등장했다. 이 모든 게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밤까지 쉬지 않고 계속해서 자신의 세계를 재창조해냈다.

  


1년 후.

'차원이 다른 음악 세계관'

'작사 작곡, 컨텐츠 기획 능력까지 갖춘 천재 프로듀서‘

'치유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할 차세대 솔로 가수‘

플루토는 전 우주에서 어마어마한 팬층을 보유한 가수로 데뷔한다. 뉴 아일랜드를 모티프로 한 몽환적인 무대로부터 그녀의 목소리가 하늘을 뚫고 나와 전 우주에 울려퍼진다. 이 모든 일련의 과정에서 회복한 건 무엇보다 자신에 대한 믿음이었다. 그녀는 이제 자유로웠다. 그 어떤 것도 두렵지 않았다.

***


여기까지 집필한 후 생각했다. 명왕성의 이야기는 우리 모두의 이야기가 될 수 있다고. 사랑에 실패한 사람, 대중의 선택을 받지 못한 사람, 원하는 위치까지 올라가지 못한 사람. 우리 모두는 살면서 가끔 이처럼 원하지 않는 ’강등‘을 당하게 된다.


그런데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란 말이 있지 않던가. 어떠한 순간에도 놓지 말아야 할 것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믿는 자존감일 것이다. 방향을 바꿔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용기 역시 큰 힘이 되어줄 것이다.


실패는 우리를 자라게 한다. 마주한 당시에는 온 세상이 비극으로 얼룩지지만 한 발 물러선 후엔 나를 재건할 수 있는 기회. 모든 것은 흐르기에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저 멀리서 돌이켜보면 분명 희극일테니까. 때로 내게도 매서운 바람이 불어오겠지만, 도망치지 않고 담담하게 마주하리라고 다짐한다.



'지금 쓰러져 울고 있는 땅 아래에 자신이 모르는 가능성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원한다면 얼마든지 그 세계를 실현시킬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면 합니다. 오직 이유 없는 다정함만으로 말입니다'  -김연수, 너무나 많은 여름이 中


매거진의 이전글 이터널 선샤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