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정민 Aug 04. 2023

이터널 선샤인

사랑할 결심

한 아이의 부모가 될 남녀가 앞의 대형 스크린을 통해 태어날 아기의 운명을 지켜보려 한다. 아이의 세상이 뚜렷하게 펼쳐지기도 전에, 여성은 남성에게 걱정스럽게 이야기한다.   

“나는 아무래도 걱정돼. 살면서 누구나 겪는 인생의 불행들이 있잖아. 그 터널을 지나오는 게 얼마나 힘든지 우리 어른들은 누구나 다 아는데. 내 아이가 그 고통을 겪는 걸 어떻게 옆에서 지켜봐.. 우리가 그 삶을 대신 살아줄 수 있는 것도 아니잖아”

남성은 몇 초 동안 생각한 후 대답한다.

“응 맞아. 누구나 인생에서 겪는 아픔이 있지. 우리 아이의 아픔은 과연 뭐가 될런지..“


그들은 침묵한다. 다시 남성이 말을 꺼낸다.

“근데 있잖아. 세상에는 소소한 행복도 참 많잖아? 봄에 피는 벚꽃은 찬란하고, 겨울에 눈이 예쁘게 내리면 보고만 있어도 참 좋잖아. 가끔 노을 질 때 붉은 빛이 아름답게 번지는 하늘도. 좋은 사람들과의 대화로 마음이 충만해지는 것도. 그리고 밤에 먹는 야식도 맛있잖아. 그런 거 다 보여주고 싶지 않아? 세상은 아직 따뜻하고 살 만 하다는 거 아이에게 보여주고, 함께 경험하고 싶지 않아?”


여성은 남성의 말에 피식 웃는다. 남편의 말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 그들은 함께 태어날 아기의 운명이 담긴 영상을 지켜본다.


영상이 끝난 뒤, 그들은 한 여자아이를 마주한다. 형체도 확실하지 않은 그 아기를 보면서 부모는 이미 무한한 사랑을 느낀다.


"잘 들어 아가야. 지금부터 우리가 영상을 통해서 미리 보고 온 너의 삶을 요약해서 말해줄 거야. 너는 우리의 이야기를 듣고 태어날지 말지 선택할 수 있어.


태어나기로 결심한다면 너의 이름은 ’정민’이 될 거야. 너는 특유의 반짝거림을 가지고 태어날 거야. 너의 밝은 에너지로 인해 사람들에게 둘러싸일 거고, 넘치는 사랑을 받고 자란 다정한 아이가 될 거야.

감수성이 풍부한 너는 영화를 보면서도, 공연을 보면서도, 앞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도 잘 울어. 친구의 얘기를 들으며 너무 깊이 공감해 울어버리는 너는 존재만으로도 그들에게 위로가 되어줄 거야. 그리고 너만큼이나 진심을 투명하게 보여주는 사람들에게 너는 언제나 감동하고 고마워해. 그래서 눈부신 사랑도, 우정도 정말이지 많이 경험하게 될거야.


이번엔 조금 다른 얘기를 해볼까? 네가 듣기 힘들겠지만 아무래도 부모인 우리가 솔직하게 해줘야 할 말 같아서..


세상은 가끔 너의 여리고 따뜻한 마음을 외면해 고통을 줄거야. 가끔은 너에게 다가온 나쁜 사람들도 겪게 될 거고. 그럴 때는 사람 보는 눈이 이렇게 없었나하고 너는 너 자신을 자책하며 울게 될 거야. 그런 기억들 때문인지 너에게 사랑은 한동안 두렵고 가장 시작하기 어려운 난제가 되어버려.


누구에게나 부럽다는 소리를 들으며 너를 중심으로 돌아갔던 세상은, 성인이 된 이후 산산조각 날거야. 어릴 때부터 외국어 감각이 남달랐던 너는 영문학을 전공으로 선택하게 돼. 그런 너는 해외에서 5년, 10년 동안 살다 온 다른 학우들에게 둘러 쌓여, 원어 수업에서 기죽게 될 거야. 면접에서 청산유수로 말하는 동갑내기 여자애를 마주했을 때도 너는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버릴거야.


120:1의 경쟁을 뚫고 너는 너의 드림 컴퍼니에 입사하게 돼. 해맑고 밝은 게 장점이었던 너는, 그 회사에 들어가자마자 웃음을 모조리 다 잃어버리게 될 거야. 툭 하면 소리지르면서 화내고, 인신공격까지 하는 최악의 상사를 만나 화장실에 숨어서 몇 번이나 울게 될 테니까.


화끈하게 놀면서 온갖 즐거운 것들은 다 경험해본 너는 세상의 모진 부분을 알게 된 후 해맑음을 많이 잃어버리게 돼. 그리고 더 이상 단순하게 살지도 못하게 될 거야. 세상의 현실적인 면에 대해, 차라리 모르는 게 좋았을 거라 생각하며 한숨짓게 될 거야.



그런데 확실한 건, 너는 이 모든 걸 눈부시게 이겨낼 거라는 사실이야.


너는 겁내지 않고 다시 눈부신 사랑을 하게 될거야. 너만큼이나 다정하고, 전적으로 너를 신뢰해주는 사람을 만나 사랑하는 능력을 되찾게 될테니까. 그 어떤 상황 속에서도 너의 안식처가 되줄 그로 인해, 너의 세계 속에서 더 이상 두려움은 없을거야.


부족한 네 모습을 마주할 때마다 자극받는 너는, 너 자신을 더 성장시킬 수 있는 경험에 계속 뛰어들게 돼. 그리고 배우고 싶은 사람들을 따라다니면서 온전히 물들며 배워. 어느 날 돌아보면 그 길은 꽤나 험난하고 어려웠지만, 정말 즐거웠다는 생각도 들거야.


매일 너를 울렸던 악명 높은 상사한테 실력으로 인정 받고, 사람들이 박수칠 때 그의 곁을 떠나게 될 거야. 너의 일을 좋아해서 업계에서 묵묵하게 너의 자리를 지켜온 너는 그로부터 몇 년 후, 수십억, 수백억짜리 비딩을 네 손으로 따오게 될 거야. 당당하게 목소리 높여 연봉 인상도 요구할 거고. 너만의 영역, 너만의 입지도 찾게 될 거야.


해맑음을 잃는 대신, 너는 조금 더 깊어지고 단단해질거야. 재미보다는 안정감을 추구하는 온화한 어른이 될 거야. 세상이 네 뜻대로 되지 않아도 흔들리지 않고 웃을 수 있는 여유도 생길 거고. 네 마음을 잘 들여다 볼 수 있고, 또 누군가를 진심으로 위로하고 어깨를 내어줄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될 거야.“



정민은 한참을 말 없이 듣고 있다가 대답한다.

"네, 저는 태어날 거에요. 해주신 이야기를 들으며 이미 내 부모가 될 당신들을 사랑하게 된 걸요. 나의 성장하는 모습을 들으며, 때때로 겪게 될 내 아픔까지도 받아들이게 된 걸요. 살면서 가끔 겪게 될 어떠한 어려움, 불행도 나는 두렵지 않아요. 먼 훗날, 내 삶을 돌아볼 때 행복한 삶이었다고 느끼도록. 내가 만들어 갈 거에요.”


정민의 부모는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훔친다. 그녀가 태어난 이후에는, 그들이 영상을 통해 미리 봤던 긴 인생의 기억은 모두 사라질 것이다. 하지만 운명을 예측하지 못하더라도 괜찮다. 옆에서 사랑하는 사람들이 항상 함께 할테니까. ‘나’를 찾는 여정은 아름답고, 돌아보면 그녀의 인생은 꽤 괜찮은 인생일테니까.


"그래. 정말 잘 생각했어. 태어나기를 선택해줘서 고마워. 세상에 온 것을 환영해 정민아."


마침내 아기가 세상에 태어난다.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선명한 선홍색 햇빛이 쏟아지며 그들을 축복한다.



‘새는 알에서 태어난다. 알은 하나의 세계이다. 태어나려는 자는 하나의 세계를 깨뜨려야 한다.

늘 어려워요, 태어나는 것은요. 그런데 돌이켜 생각해 보세요, 그 길이 그렇게 어렵기만 했나요? 아름답지는 않았나요?’

- 헤르만 헤세, <데미안>



* 맨 앞의 대화는 한강 작가님의 에세이에서 일부 차용하여 재구성하였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여름, 유럽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