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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민 Aug 04. 2023

여름, 유럽

‘언젠가 아마도 나는 다시 여행을 떠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나는 다시 낯선 사람이 될테지. 그리고 그 낯선 사람은 다른 누군가를 만날 수 있기를 간절히 원하겠지.’ - 김연수, <언젠가 아마도>

 

‘여름’은 나에게 있어 곧 ‘유럽’이다. 그 곳은 상상하기만 해도 설렌다. 매일 밤 시간여행을 하며, 동경하는 1920년대 예술가들과 대화했던 미드나잇 인 파리의 주인공처럼. 나도 매년 6월, 유럽의 도시로 떠나 그 곳을 상징하는 옛 시대의 인물들과 만난다.

유럽의 도시들은 각각의 고유한 색채를 갖고 있다. 그들이 전해준 수많은 이야기들은 쌓여서 총천연색의 커다란 무지개를 이룬다. 그리고 그 속의 나는 조금 더 큰 세계 속에서 나아갈 수 있게 된다. 매년 여름의 유럽은 나의 세계를 더 다채로운 색깔로 확장시켜온 것이다.

 

 

Barcelona, Greenery

“우리가 지금 건축사라는 칭호를 천재에게 주는 건지, 아니면 미친놈에게 주는 건지 도저히 모르겠다. 이게 바로 내가 건축학교를 졸업할 때 학장으로부터 건네 받은 문장이었습니다. 내 이름은 안토니 가우디. 스페인 바르셀로나에 온 걸 환영합니다. 학교는 내 거대한 상상력을 담기엔 너무 작은 그릇이었죠. 어릴 때부터 류마티스를 앓았던 나는 외로움을 삼키던 날이 많았습니다. 그런 나에게 있어 자연이 나를 구원했고 내 유일한 친구가 되어주었습니다. 숲을 관찰하던 어린 시절의 경험이 쌓여 나의 기반이 되었죠. 그리고 나는 생동감 있는 자연을 건축물에 담아내는 건축가가 되었습니다.”

 

가우디가 남긴 건축물들은 반듯하지 않고, 자연을 닮은 둥글고 부드러운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가우디는 직선은 인간의 선이고, 곡선은 신의 선이라 믿었다고 한다. 인위적으로 재단한 듯한 서울 강남의 건물들만 보다가, 물결을 따라 유려하게 흐르며 어디로 튈 지 모르는 물고기 같은 카사 밀라를 보니 나 역시 상상력이 솟구치는 듯 했다. 한편, 울창한 숲 가운데 우뚝 서있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내부에까지 숲의 형상을 담고 있었다. 성당을 받치는 기둥들은 높고 곧게 뻗은 나뭇가지들이 서로 얽혀있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 나뭇가지들 사이사이로 주황, 초록, 파란색의 스테인드 글라스가 촘촘하고 은은하게 빛을 발했다. 깊은 숲 속에 살고 있는 반딧불, 또는 팅커벨 같은 요정 같이 보인다고 생각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앞에 걸터앉아 한참을 멍 때리며 생각했다. 가우디의 뮤즈가 자연이었듯이, 내게 영감을 주고, 슬픔으로부터 구원해주는 존재는 과연 무엇이었을지. 한 번이라도 세상에 없던 독창적인 시도를 해 본 적이 나는 있었는지. 아무도 걷지 않은 길을 걸어갔던 가우디의 상상력이 2019년의 나를, 자연을 닮은 찬란한 초록 빛으로 채웠다.

 


Vienna, Oscar Gold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내 이름은 마리아 테레자. 합스부르크 왕가 유일의 여제이자, 위대한 국모로 존경받았던 여인입니다. 나는 음악에 후원을 아끼지 않았죠. 그래서 나의 여름 별궁인 쇤부른 궁전에서는 수많은 연주가들이 탄생했습니다. 6살의 볼프강 아마데우스 모차르트 역시 제 앞에서 신들린 듯이 피아노를 연주했고 데뷔를 성공적으로 끝마쳤는걸요.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 오시면 꼭 클래식 연주회를 예약해 제가 사랑했던 아름다운 선율을 듣고 가시기 바랍니다.”

 

즉흥적으로 쇤부른 궁전에서 저녁에 열리는 클래식 연주회를 예약했다. 쇤부른 궁전은 700여년 동안 유럽을 통치했던 합스부르크 왕가의 위엄을 뽐냈다. 로코코 시대의 화려한 건축 양식을 갖고 있는 그 곳 내부의 존재감 역시 굉장했다. 대규모 궁정 행사가 열리던 연회장에서 공연을 보게 되었다. 방의 중심에서 거대한 샹들리에가 촛불을 닮은 오렌지 빛을 내뿜고 있었고, 벽은 디테일한 금속 공예로, 천장은 천지 창조 같은 멋진 벽화로 채워져 있었다. 한국에서는 클래식 알못인 내가 이렇게 멋진 곳에서 공연을 보게 되다니 놀라웠다. 돈을 열심히 벌어야 할 이유가 더욱 확실해졌다. 연주회가 끝난 후, 마리아 테레자에게 감정 이입이 되었다. 인재가 되는 것도 어렵지만, 재능을 알아보고 인재를 발굴해내는 것 또한 굉장한 능력이라고 하는데. 6살의 모차르트가 뿜어냈던 폭발적인 천재성을 마주했을 때 그녀가 얼마나 감격했을지. 그리고 그가 성장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얼마나 뿌듯했을지 상상해본다. 위대한 문화를 육성했던 마리아 테레자의 감수성이 2018년의 나를, 클래식하고 화려한 황금 빛으로 가득 채웠다.

 

 

Venice, Aquamarine

“물의 도시, 이탈리아 베니스에 온 걸 환영합니다. 나는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입니다. 실존 인물은 아니고, 셰익스피어 희극의 주인공이죠. 내 얘기를 들어본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친구 바사니오의 결혼 자금 마련을 돕기 위해 악덕 고리대금업자 샤일록에게 돈을 빌리며, 갚지 못할 경우 내 살 1파운드를 바치겠다는 계약을 했죠. 이 때문에 정말이지 목숨을 잃을 뻔했습니다. 하지만 내 살을 베어갈 때 계약 내용에 없던 피를 한 방울이라도 흘리면 샤일록을 사형에 처할 것이란 현명한 재판관님의 판결 덕분에 내 목숨과 우정 모두를 지킬 수 있었습니다.”

 

곤돌라에 타 일렁이는 베니스의 물결을 지켜봤다. 베니스의 상인 안토니오처럼, 해상 무역으로 지중해를 재패했던 베니스. 하지만, 과거의 사람들이 베니스에 정착하게 된 이유는 그렇게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게르만과 훈족의 침입으로 로마 제국이 멸망하자 바다에서 삶을 이어갈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막대한 부를 축적하는 데에 성공했고, 바다 위 아름다운 인공 섬들을 만들며 아기자기하게 도시를 키워나갔다. 과거의 영광을 잃고 삶의 터전에서 물러났는데도 다시 새로운 곳에서 영광을 재건하는데 성공한 베니스의 상인들. 아침, 점심, 저녁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물의 색을 지켜보니 그 당시 내가 하고 있던 고민들이 한결 가벼워졌다. 사실은 아무 것도 아닐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무거웠던 잡념들을 구겨 물 속으로 던져버렸다.넘실거리는 베니스의 생명력이 2016년의 나를 청량한 하늘색으로 가득 채웠다.

 

 

2023년의 나는 6월 중순, 크로아티아로 곧 여행을 떠나게 된다. 4년 만에 다시 만나는 여름의 유럽. 당연했지만 코로나로 인해 당연하지 않게 되었던,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나의 유럽. 하지만 유럽은 영감이 필요한 누군가를 위해 언제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올 여름 그곳에서 나는 또 어떤 생경한 풍경을 마주하고 어떤 시대, 어떤 사람과 만나게 될까. 지구 건너편의 도시들을 도장깨기하며 내 내면을 다채로운 색깔로 채워나가는 게 재미있다. 이러니 나는 또 다시 유럽과 사랑에 빠질 수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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