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Marketer 정민 Sep 08. 2023

헤어질 결심

Feat. 동물농장


대한민국에서는 몇 마리의 동물들이 모이면 곧 감옥이 생기곤 했다. 적으면 3마리부터, 많으면 50마리, 더 많으면 500마리 정도까지의 동물이 수감되어 있는 감옥. 모두가 모두를 감시하는 그 감옥은 세상에서 가장 작은 감옥이라 할 수 있겠다.


감옥에서 모든 동물들이 동등하게 발언권을 얻는 건 아니었다. 특히 말을 많이 하는 빅마우스가 방마다 존재했다. 심지어 어떤 방은 가장 세거나, 가장 나이가 많은 동물의 독백 만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그런 곳에서는 정말이지 귀에서 피가 나는 듯 했다. 토끼나 다람쥐 같은 초식 동물은 끝끝내 발언권을 얻지 못하거나, 포식자의 눈치를 보며 말을 아꼈다.

최악의 경우, 불편한 상대를 반드시 마주해야 하는 감옥도 있었다. 예를 들면 구남친이라든가… 지금은 절교한 예전 베프라든가… 그런 방은 안에 들어가 있기만 해도 기가 빨렸다. 그 곳에서 죄수들은 간절하게 탈옥을 꿈꾸곤 했다.


보통 감옥이라 하면 빛이 한 줄기도 들지 않는 어두운 방을 연상하고는 하는데. 이 감옥의 벽은 역설적이게도 발랄한, 마치 병아리 같은 샛노란 색으로 칠해져 있었다. 각각의 방으로 들어가는 문에는 방의 이름이 표기된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그리고 그 이름표는 초콜릿 색의 말풍선 모양이었다. 방의 이름은 방에 수감된 동물들이 직접 창의력을 발휘하여 지은 것일 수도, 그 그룹이 형성된 배경을 직관적으로 나타낸 경우이기도 했다. ‘경영학과 방탄소년단’, ‘OO고등학교 132기’, ‘H그룹 2020년 입사동기’ 등.


.

.


이쯤 되면 독자 당신은 눈치 챘을 지도 모르겠다. 아직도 눈치 채지 못했다면 당신은 이 글을 읽고 미어캣과 논할 자격이 없다. 이 감옥의 이름은 바로 ‘카톡방’이다.


그리고 마침내. 2023년 6월, 미어캣은 13년 간의 기나긴 수감 생활을 끝내고, 탈옥할 결심을 끝냈다. ‘카톡방 조용히 나가기’ 기능이 생겼기 때문이다. 앱 화면 우상단의 톱니바퀴를 누르면 이 기능을 활성화시킬 수 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이제 나는 불필요한 감옥들과 영영 헤어질 것이다. 당신들은 내가 나간지도 모를테지. 다시는 나를 찾지 말아달라. 나는 꽃잎이 떨어지는 것처럼 사뿐히, 조용히, 그리고 우아하게 나갈 테니. 증거는 하나도 남기지 않을 것이다. 아무도 보지 않는 까만 밤, 아름다운 보름달이 뜨는 날, 나는 야반도주할 것이다.



Scene #1

전략기획 1팀 카톡방. 이 방에는 육식동물과 초식동물이 평화로운 듯 평화롭지 않은 듯 함께 하고 있다. 이제 막 대리로 진급한 치타는 새벽마다 크로스핏을 한다. 그런 그녀는 가끔 자기 팔 근육이 얼마나 대단한지 사진을 찍어 보낸다. 막내인 족제비는 약삭빠르고 쇼잉을 잘 한다.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일을 잘하며 인정을 받고 있는지 카톡방에서도 틈틈이 과시한다. 눈이 땡그랗고 억울하게 생긴 가여운 토끼는 한 번 그 방에서 말실수를 한 적이 있다. 나무늘보가 함께 들어있는 방과, 그를 제외한 다른 동물들만 들어있는 방이 있는데, 전체 카톡방에서 나무늘보의 뒷담화를 해버린 것이다. 당황한 토끼는 그 와중에 ‘헉 이 방이 아니네!’를 뱉어 버렸고. 미어캣과 품바는 땀을 삐질 흘리며 재빨리 끌어올리기 스킬을 시전했다. 의리 있는 그들은 메시지를 삭제할 시간을 벌어주며 토끼를 지켰다. 심성이 착한 미어캣은 그 날 얼굴이 하얗게 질린 토끼에게 술을 사주며 함께 소주잔을 기울였다고 한다. 우리 팀에게 슬기로운 감빵 생활이란 과연 존재할 수 있는 걸까?


Scene #2

미어캣의 예~전 남친이 들어있는 카톡방. 모임에서 만난 도베르만은 그 집단에서 꽤 영향력이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고작 도베르만 때문에 나머지 사귄 동물들을 모두 버리자니 아까워 미어캣은 방을 나가지 않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헤어진 후 어느 순간부터 새로 들어온 여우 년이 도베르만에게 대놓고 들이대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니 지금 미어캣은 안읽씹 스킬을 시전하고 있는데. 며칠 간 읽지 않으려니 카톡방 옆 872라는 숫자가 무지무지 신경 쓰였다. 그래서 오랜만에 읽으려고 들어갔는데 여우의 프로필 사진에 도베르만의 뒷모습이 보이는게 아닌가. 이런 ^%*$¥# 상도덕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다니. 여긴 기필코 탈출한다!


Scene #3

얘들아 나 이거 살까, 저거 살까? 너구리는 립스틱 사진을 여러 장 보냈다. 하지만 미어캣이 보기엔 모두 똑같은 색이다. 아무도 답장을 하지 않았다. 1시간 뒤 오소리가 친구 때문에 짜증나는 일이 있었다며 수십 개의 카톡을 보내왔다. 미어캣이 보기엔 오소리 역시 잘못했다. 하지만 오소리의 화를 돋우느니 미어캣은 말을 아꼈다. 그런데 이번엔 읽고도 답장을 해주지 않는다고 화낸다. 1시간 뒤 렛서팬더는 가십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내 친구가 소개팅을 했는데~ 남자가 1차를 사고 2차는 친구보고 내라고 해서 빡쳤다는거야~ 너네는 어떻게 생각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든 말든.. 요즘 ‘집단적 독백’이 유행이라는데. 미어캣은 쉴 새 없이 모든 걸 공유하는 이들과의 카톡방이 가끔 힘들다. 미어캣은 피로감에 지쳐 채팅방 조용히 나가기를 눌러봤다. 1초 뒤, 그녀는 탈출에 성공했다. 맙소사 ! 이렇게 쉬운 건데 지금까지 못 했단 말야?!



30분 뒤.


카톡!

렛서팬더 님이 미어캣을 채팅방에 초대하셨습니다.

야 미어캣 너 없어졌길래 다시 초대했어 ! 왜 나가?!

그치.. 단톡방에도 추노는 존재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미어캣은 오늘도 좌우를 살피며 눈치를 보고 있다. 그리고 오늘도 그녀는 사라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린다.




*이 글은 최인준 기자의 <“특사 된 기분” 13년 만의 단톡방 탈옥… 그래도 시월드방은 못 나오더라> 칼럼을 참고하여 썼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불의 양면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