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2014년, 서울의 한 신축아파트 청약당첨을 시작으로 내집마련을 했다. 그 당시에는 대출이 매우 완화적이어서 분양당시 계약금만 내면 중도금대출을 잔금때까지 할 수 있었다. 몇천 수준의 계약금을 저축과 마통으로 냈다. 잔금 때도 전세를 줘서 잔금을 내는 것도 가능했기에 우리같은 신혼부부가 덜컥 청약에 당첨되도 중도금을 구하러 뛰어다닐 필욘 없었다.
누군가는 나에게 운이 좋다고 할 것이다. 하지만 당시에는 용하다는 점집에 가서 부동산을 팔아야할지 물어봤을 정도로 부동산 시장이 침체되어 있었다. 신문기사에는 앞으로는 사는(buy) 것이 아니라 사는(live) 개념으로 부동산이 변한다고 했다. 요새는 욜로가 대세라서 저축해서 집을 사는 수요가 없다고도 했다. 심지어 금융 전문가 집단이라는 나의 직장에서도 분양가가 비싸다고 많이들 말렸고, 돈이 많은가보다고 빈정대는 상사도 있었다. 니가 지금 아파트 분양의 설거지를 담당하고 있다고 한 사람도 있었다.
당시 부동산카페에서 우리 아파트를 찾아보면 주로 욕을 먹고 있었다. 그들에 따르면 그 아파트를 분양받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멍청이들이고, 망할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운명이었다. 그리고 실제로 우리 아파트는 1년은 미분양 상태였다. 그런데 왜 그 아파트를 계속 들고있었냐고?
그냥 배운 멍청이었기 때문이다. 학교공부는 잘했을지언정 금융아이큐는 없었다. 미분양이 뭔지, 그리고 지금 우리의 처한 상황에 대한 인사이트는 거의 없다시피 했다. 그저 새 아파트이고 집에서 회사와 남편 병원을 걸어갈 수 있다는 점이 끌렸다. 사실 그 주변이 광화문이었기 때문에 네임밸류 있는 좋은 직장들이 주변에 많으니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라는 생각도 어렴풋이 있었다. 그냥 "집값이 1억이 떨어지면 어때, 우리가 살면 되지" 라는 생각으로 편히 지냈다.
다행히 멍청이에게 망할 날은 오지 않았다. 지금 그 집을 전세를 주고 있는데, 지금은 전세가가 분양가를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시장에서 분양가 이상의 실거주 가치를 인정한 셈이다. 그리고 우리는 8년의 시간동안 부동산 시장을 보는 눈, 미분양과 하락을 견뎌내는 마음의 근육 그리고 자산을 보는 안목을 장착하게 되었다. 그 시간동안 내가 얻은 인사이트 몇 가지를 공유한다.
남의 눈에 좋은 집을 골라야 하는구나
나는 서울에 있는 대학을 다녔지만, 지방이 본가였기에 세를 참 다양하게 살았다. 정말 이사를 가기가 지긋지긋해서 집을 사고 싶었던 마음도 컸다. 세를 살 때에는 철저하게 내 입장에서만 집을 고르면 그만이다. 먼저 학교로 가는 버스 정류장이 가까운 곳, 그리고 친한 친구들이 많이 사는 곳, 맛있는 김떡순을 파는 분식집이 가까운 곳을 삼각형으로 연결했다. 그 삼각형의 중심에 위치하는 집 중 보증금과 월세가 싸지만 반지하가 아닌 곳을 고르면 족했다.
하지만 이제 내 집을 산다고 생각하니 시각이 달라졌다. 내 입장만 생각하면 좋은 집이지만, 나중에 팔고 나간다고 생각하면 남의 눈에도 좋은 집을 골라야 했다. 직주근접이라는 단어는 내 직장을 의미하는게 아니고 절대다수의 직장을 말하는 것이다. 내 회사가 외진데 있으면 내 회사에 가기 편한 곳이 아니고 남들 회사에서 가까운 곳을 골라야 한다. 특히 그 회사들의 연봉이 높으면 더욱 좋다.
내가 애가 없더라도 애 있는 사람 입장에서 집을 고르는 것 역시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주택을 주로 수요하는 계층이 40대에 애가 2명 정도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애가 없거나 어려도 일단 학군을 고려해서 집을 골라야 한다. 특히 학교 배정도 중요하지만 갈수록 워킹맘이 늘어나기에, 좋은 학원가에 걸어갈 수 있는 곳이면 좋다. 퇴근하고 라이딩 하는 것이 힘들 수 있기 때문이다.
남의 눈에 좋은 집을 사야 나중에 그 집을 쉽게 팔고 다른 집으로 옮겨갈 수 있기 때문이다. 또, 사정이 생겨 잠시 해외로 주재원을 나가거나 지방으로 발령이 났을 때 전세를 주더라도 금방 나가는 것이 또 그런 집이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분양받은 집의 가장 큰 장점은 직주근접이었다. 광화문에 도보로 10분이면 갈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우리 부부의 직장에서 가까워서 선택했지만, 다행히 다른 사람들 특히 연봉이 높은 전문직 직장인들의 직장에서도 가까웠기에 투자에서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상승장에서는 다주택이어야 유리하구나
이후 수도권에서는 엄청난 상승장이 펼쳐졌다. 눈을 뜨면 1억, 2억이 올랐다는 소식이 들렸다. 좋으면서도 다급한 마음이 들었다. 상승장에서는 매수포지션이 많을수록 유리하겠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그래서 일단 돈이 없는 대로 예산에 맞춰 상대적으로 매수가와 전세가의 차이가 작았던 지방광역시의 부동산을 공매로 한 채 더 매수하게 되었다.
그 부동산은 여러모로 우리에게 개고생과 뼈저린 교훈을 안겨준 아파트이다. 일단 사택으로 사용되던 아파트를 공매로 받은 것이기에 낙찰받고 나서 평생 안가본 지방에 가서 택시를 타는 등의 수고를 해서 계약을 마무리했다. 그리고 집 상태가 안좋았기에 싱크대와 화장실 공사를 하는 등 손을 전체적으로 본 뒤 매도를 했다. 당시에 돈이 별로 없던 시절이라서 남편이랑 둘이 그 지방까지 중고 소나타를 타고 가서 간단한 수리나 페인트칠, 청소는 직접 했다.
이게 말이 간단한 수리, 페인트칠, 청소지 정말 이틀을 꼬박 그곳에서 고생을 했다. 추운 겨울이었는데 난방도 들어오지 않는 집에서 낡은 돌리는 문고리도 손수 다 갈고, 곰팡이로 더러운 베란다를 환기하고 방수페인트칠을 했다. 화장실과 베란다도 손수 빡빡 청소했다. 너무 추워서 손이 곱을 지경이었건만 전세를 비싸게 놓겠다는 그 마음가짐 하나로 열심히 했다. 서울로 올라오면서 남편이랑 휴게소에서 7천원짜리 김치찌개 먹고 올라오는데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와이퍼로 아무리 쓸어도 앞이 안보여서 이대로 죽을지도 모르겠구나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이후에는 전세도 잘 놓고 임차인이랑도 잘 지냈다. 이후에 팔았는데 문제는 이게 눌림목에서 거래량이 터지면서 팔아서 우리는 남는것도 없이 팔고, 이후에는 가격이 많이 올라서 얼마나 속상했는지 모른다. 그때 꼭 공급량에 집값이 연동(peg)되는게 아니라는 걸 알았다.
고생한 보람은 다 돌아오더라,
전세금 돌려주고 내 집에 들어오던 날
우리는 처음에 분양받은 아파트에 처음 6개월 살고 세를 주게 되었다. 남편이 당시에 근무하던 병원이 아니고 다른 곳에서 근무하게 됐기 때문이다. 그간에 쌓은 다양한 경험들을 토대로 이번에는 정말 제대로 내 집을 장만하자고 남편과 둘이 결심을 했다.
일단 장기적으로 좋은 일자리가 늘어날 지역에 집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그 지역의 주택수요가 늘어나지 않을까? 또 30년이 거의 되가면 재건축이든 리모델링이든 호재가 나올것이라는 생각에 그 부분도 고려를 했다. 무엇보다 처음에 오피스텔 단칸방에서 살 때에는 꿈꿀 수 없었던 자녀계획을 세우게 되면서 우리는 학군을 새로운 변수로 넣었다.
그리고 지금의 집을 매수하게 되었다. 물론 처음부터 이 집에 거주하기에는 예산이 많이 들기에, 거주와 투자를 분리해서 생각하기로 했다. 거주는 좀 더 싼 곳에서 월세를 살면서 하고, 이 집은 전세를 주기로 했다. 그리고 이전에 월세를 줬던 신축 아파트 역시 전세로 돌렸다. 주식투자, 공모주투자도 적극적으로 했다. 이런 저런 노력들 끝에 3년이 지난 지금 나는 내 집에 거주하고 있다.
이런 저런 흑역사를 양산했지만,
결국 상승흐름을 탔다
나는 이 글에도 일부 언급했지만 이런저런 재테크 흑역사를 많이 양산했다. 하지만 결국에는 상승흐름을 탄 자산을 매수했기에 다행히도 그런 실수와 흑역사들이 내 인생 전체를 바꿀 정도의 영향력을 미치진 못했다. 20대에 집을 산 뒤 8년의 시간이 지나고 나에게는 처음의 시드머니보다 훨씬 커진 순자산, 그리고 그보다 중요한 좋은 자산을 보는 안목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