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비행 전에 크루들은 브리핑룸에 모여서 그날 비행에 대한 브리핑을 진행한다.
내가 경험한 캐빈 크루 브리핑 시간은 크게 세 가지 파트로 진행됐었다:
크루들이 돌아가면서 간단히 자기소개하는 시간.
사무장/부사무장님들이 크루들에게 질문하는 시간.
사무장/부사무장님들이 각 크루별로 그날의 담당 포지션을 정해주고, 해당 노선의 일반적인 승객 프로필, 그날 비행에 더 특별히 케어해야 하는 손님 (VIP, 환자, 임산부 등)이 있는지 등을 설명하는 시간.
자기소개 시간에는 본인 이름, 국적, 소통 가능한 언어를 말했다.
그날 같이 일하게 된 크루 명단은 미리 볼 수 있지만 전 세계에서 모이다 보니 영어 스펠링만 보고는 발음이 헷갈리는 경우가 많다. 비행 중에 계속 "저기..." 이렇게 부를 수 없으니까 서로 이름 발음을 정확히 알아야 한다. 난 보통 스펠링만 봤을 때 헷갈리는 이름은 체크 표시 해두었다가 브리핑룸에서 자기소개하는 걸 듣고 이름 옆에 한글로 발음을 적어두었다.
소통 가능한 언어도 중요한 정보였다.
예를 들어, 프랑스 파리로 가는 비행에 중국인 단체 관광객들이 탔는데 그중 한 분이 갑자기 아픈 상황에서 영어로 소통이 잘 안 되는 경우, "오늘 비즈니스 클래스에 있는 독일 국적 남승무원이 중국어 한다고 했으니 그 친구한테 도움을 요청하자" 이런 식으로 활용되곤 했다.
사무장/부사무장님들이 크루들에게 질문하는 시간.
사실상 브리핑의 하이라이트이자
신입들에겐 가장 살 떨리는 시간이다.
그날 오퍼레이팅 하는 노선과 기종을 기준으로 크루들이 해야 하는 서비스 절차, 해당 기종의 안전장비 사용법, 메디컬 응급처치 방법 중에서 아무 질문이나 랜덤으로 하나씩 받게 된다. 사무장/부사무장님들이 한 명 한 명씩 사번이나 이름 부르고 지목해서 다 다르게 질문한다.
브리핑은 그날 담당할 업무를 배정받고 유의해야 할 사항들을 듣는다는 측면에서 중요한 시간이지만, 이건 오피셜 한 설명이고.
오퍼레이팅 크루로서는 이 질문시간이 또 다른 의미로 정말 중요했다. 이 시간에 크루들이 서로 영어 실력을 가늠했기 때문이다.
만약 질문받고 나서 뭔가 어버버한 모습을 보였다면 그날 비행은 피곤할 각오를 해야 했다. 비행 내내 크루들 사이에서 그냥 무시도 아니고 X무시당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영어 발음, 목소리, 태도, 답변내용.
이 모든 게 생각보다 정말 중요했다.
영어 네이티브들 유리하겠네? 맞다.
비행 오래 한 사람들이 유리하겠네? 맞다.
뭐야, 신입들한테 너무한 거 아냐? 맞다.
서로 같이 챙겨주고 해야지 왜 그러느냐고?
서비스든 안전 점검이든 모두 정해진 시간 안에 끝내려면 팀 전체가 일사불란해야 하는데, 어버버하는 친구가 있으면 그날 구멍이 있다는 소리기 때문이다.
브리핑룸에서 답 하나 제대로 못한 걸로 지나친 비약 아니냐고? 아니다.
"브리핑룸에서 어버버한 친구들은 항상 그날의 비행에서 골칫거리였다. 골칫거리인 수준이 심각하냐 아니냐의 정도 차이만 있을 뿐이다."
내가 한 말이 아니라 나보다 훨씬 비행 오래 한 사무장/부사무장님들로부터 들었던 말인데, 처음에 들었을 땐 지나친 비약 아닌가 싶었지만 비행하면 할수록 이 말에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브리핑은 그냥 편하게 들어가서 정보 듣고 나오는 게 아니라, 나도 오늘 크루로서 한 사람 몫을 할 수 있다는 걸 증명해야 하는 시간이었다.
브리핑룸에서 누군가가 제대로 답을 못해서 분위기 싸해지는걸 한번 보고 나면, 열심히 준비 안 할 수가 없다. 단순히 쪽팔린 문제가 아니라 거의 살벌함이 느껴진다.
난 처음 세 달가량은 (겁나서) 비행 전에 잠자는 시간도 줄여가면서 몇 시간씩 브리핑을 위한 공부를 하곤 했었다. 그래도 매번 그렇게 하다 보니 공부시간을 조금씩 줄일 수 있었고, 반년쯤 지나자 편하게 브리핑룸에 입장하는 게 가능해졌다.
매뉴얼 수백 페이지 몇 권씩이나 있는 것 중에 랜덤질문인데 순간 기억 안 날 수도 있는 거 아니냐. 맞다.
그런데 답이 생각나지 않을 때
“어..................”라고만 하는 것과
“아, 제가 잠시 헷갈리는데요. 지금 일단 떠오르는 것은-...”하는 것은 천지 차이다.
쫄지말고 뭐라도 떠들면 된다.
잘 들어보면, 다른 크루들도 대답할 때 틀려서 비행 전에 매뉴얼 다시 보라고 지적받는 경우도 있고 위에 예시처럼 답 말하기 전에 주절주절 떠드는 경우도 있다.
뭐라도 떠들 줄 알면, 무시당하지 않는다.
하지만 “어...... 모르겠습니다.”만 하는 건 의도치 않게 최악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당연히 우린 모두 사람인지라 정말 아무것도 생각 안나는 순간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최소한 그냥 모르겠습니다만 할게 아니라 "지금 제가 생각이 나질 않는데, 비행 전에 매뉴얼 다시 보겠습니다. 죄송합니다."라는 식으로 자신이 무슨 액션을 취하겠다는 멘트라도 해야 한다. 그냥 모르겠다 아엠쏘리 하면 상대방은 '그래서 어쩌라고?'가 된다. 상사들은 그 말 듣는 순간 팀에서 내치고 싶을 것이다. 할 수만 있다면.
브리핑룸에서 “어.......... 모르겠습니다.”까지만 하는 분들을 몇 번 보았는데 정말 안타깝게도 모두 한국인이었다. 나도 한국인이니 그렇게 말하는 심정을 왜 모르겠냐마는, 정답이 생각 안 난다고 포기하듯이 말하면 동료들도 당신을 포기한다. 그러니 우리 모두 그러지 말았으면 한다. 비행기에서든 사무실에서든.
우린 이미 모두 무언가를 통과해서 브리핑룸(회의실)에 들어선 사람들이니까. 기세로 밀어붙이면 된다.
이걸 좀 고상하게 표현하면 '스스로를 믿어라'라는 것이고, 그냥 날것으로 얘기하면 '괜찮아 쫄지마!!'인 것이다.
브리핑하면 처음 떠오르는 단어가 '긴장감'인데 반해, 내 첫 견습비행 브리핑은 정반대였다.
일단 브리핑룸에 들어서자마자 사무장님 텐션이 장난이 아니었다.
"신입!? 오늘 크루로서 생애 첫 비행?! 와우!! 어서 와!!"
난 이 이후로 이 정도 텐션을 보여준 사무장님을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했다. 대부분 점잖으시다.
어색 뻘쭘하게 웃으며 브리핑룸 소파에 앉아있는데, 그날 같이 비행하는 크루들이 들어올 때마다 사무장님이 "헬로! 저기 앉아있는 친구 오늘 생애 첫 견습비행날이다. We have a baby today! 잘해주자!" 이러는 바람에 진짜 부끄러웠다.
그리고 대망의 질문시간이 되자 사무장님은 거의 놀리다시피 하며 나한테 제일 쉬운 질문을 하셨다.
"우리 신입~ 소화기 사용법 말해볼까요~?"
"Remove the safety pin,..."
"Yes!"
"Hold the unit upright,..."
"Yesss!"
"Aim the nozzle at the base of the fire,..."
"Yehesss!"
"......;;;"
"Come on! You can do it!"
아니 답이 생각이 안 나는 게 아니라 님이 좀 부담스러운데요...;
끝까지 다 대답하니 사무장님이 다른 크루들에게 외쳤다.
"얘들아, our baby knows everything! 박수!!"
"와아아아!! Unbelievable!!"
난 결국 뻘게진 얼굴을 가리고 눈물 나도록 한참을 웃었다.
내 첫 견습비행 크루들의 하이텐션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비행기 탑승하고 나서 사무장님은 나를 조종실로 데려가서 파일럿분들에게 인사시켰다.
그런데 나랑 악수하던 기장님이 "크루 첫날 축하합니다. 만나서 반가워요. 내 이름은 얽!!" 하더니 갑자기 점프싯에 털썩 쓰러지시는 게 아닌가.
난 순간 당황해서 이게 무슨 일인가 했는데, 옆에 부기장님이 "앗.기장님이.기절.하신것.같아!" 라고 이상한 톤으로 말하신 덕분에 금방 상황파악 할 수 있었다.
기장님: 으.으.윽.
부기장님: 오! 의식.있으셔! 이제.어떡.하면.좋지?
사무장님: 저런! 우리 신입의 활약이 필요해 보이는군요!!!
........ 주섬주섬 산소통 꺼내서 기장님 쪽으로 가져갔더니 기장님이 눈 감고 으.으.윽. 하는 상태에서 알아서 산소통 끌어안으며 산소 마스크까지 착용하셨다.
곧이어 기장님이 산소 들이마시는 소리를 셀프로 내시더니 눈을 뜨고선 "오.오.오.당신이.절.살렸군요." 이러시는 바람에 난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주저앉아서 웃었다. 기장님 부기장님은 서로의 연기력이 문제였다며 지적하다가 다 같이 빵 터져서 또 한참을 웃었다.
한참 웃고 긴장이 풀려서였을까.
견습비행은 별 탈 없이 무사히 끝났다.
유머라는 게 이렇게까지 사람을 편하게 만들어주는구나, 하는 걸 그날 처음 실감했다.
한없이 쫄아 있던 신입의 첫 견습비행을 마냥 즐거운 기억으로 만들어준 선배 크루분들이 지금도 고맙기만 하다.
하지만 그 연기력은 좀....
그것도 기세인거다. 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