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여 페이지 영문 매뉴얼 세 권에 부가적인 수업자료 대여섯 권을 받고 바로 다음 날부터, 대학 기말고사 전날밤처럼 노트에 수십 번 써가며 주문 외듯이 소리 내서 읽고 통째로 외우는 생활이 두 달여간 이어졌다.
내용을 하나하나 차근차근 이해하는 건 사치였다. 오늘 처음 배운 건데 당장 내일 시험 본대니까 항상 시간이 부족하게 느껴졌다.
일단 통째로 외우고, 다 외운 다음에 틈틈이 무슨 내용인지 구글링 해서 찾아보곤 했다. 시험 보고 나서야 내용을 이해한 경우도 더러 있었다.
훈련 기간 동안 공부하다 울었다는 친구들도 상당수 있었는데 굳이 왜 그런지 설명하지 않아도 다들 이해할 수 있었다.
모국어로도 자세히 본 적 없는 정보들을 매일매일 새로 배우고, 바로 다음날 시험 보고, 시험 결과 안 좋으면 회사 짤릴 수도 있다고 하니 다들 고역이었다.
(한참 나중에 다른 배치였던 분들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이지만, 시험을 한 번에 통과하지 못했다고 해서 바로 짤리는건 아니었고 따로 불러서 재시험 기회를 줬다고 한다. 물론 재시험을 무한정 계속 볼 수 있는 건 아니고 한두 번 더 기회를 줬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 인스트럭터는 이런 말을 전혀 안 해줘서 나를 포함한 우리 배치 전원은 두 달을 초긴장 속에 살았다.)
회사에서 8시간가량 수업 듣고 숙소에 돌아와서는 거실 테이블에 온갖 매뉴얼과 필기노트들을 펼쳐놓고 밤 12시까지 복습하며 외우곤 했는데
비행 갔다가 퇴근한 룸메가 유니폼 입은 채 내 옆을 쓱 지나서 자기 방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보면,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일 수가 없었다.
뭔가 캐리어 바퀴도 지나치게 매끄러워 보여.
뭔데... 멋있어.... 부럽게.....
맨날 낑낑거리는 신입이 안쓰러웠는지 몇 번은 룸메가 내가 공부하는 자리에 와서 잠깐씩 봐주기도 했는데, 내가 이해 안 되는 내용을 물어보면 한치의 막힘없이 대답하는 모습이 또 어찌나 멋있던지.
하기사 그분이야 당시 15년간 거의 매일 보던 내용이었으니 막힘없이 대답한 게 당연한 거였겠지만, 아직 견습 승무원도 되지 못한 삐약이한테는 그저 창공을 가르는 독수리 같은 자태로 보였다.
크.... 부럽다.
나도 저렇게 멋진 크루 되고 싶다! 고 다짐하며
또 꾸역꾸역 하나씩 외워나갔다.
승무원들이 숙지해야 하는 매뉴얼 중 하나는 SEP (Safety and Emergency Procedures; 안전 및 비상절차 매뉴얼)로 불린다.
SEP에서는 현재 회사에서 운영 중인 항공기 기종, 각 기종별 소화기, 산소통, 비상의료키트, 구명조끼, 구명정 같은 안전장비와 비상탈출 장비들의 위치 및 사용법을 배운다.
단순히 이런 기종이 있다, 이런 장비가 있다 정도가 아니라 우리 회사 특정 기종엔 무슨 장비들이 총 몇 개가 있고 어떤 위치에 어떤 장비가 몇 개씩 있으며 어떤 크루가 그 장비 체크를 책임지고 실제 사용 시엔 어떻게 다루며 사용 완료 후 어떻게 보고하는지까지 외우는 것이다.
전철로 비유하자면
네 번째 칸 오른쪽 세 번째 문 앞에 소화기 하나와 산소통 하나가 있고, 왼쪽 첫 번째 문 인근 머리 위 짐칸에는 비상의료키트가 있으며, 이 키트 안에는 무슨 아이템들이 있는데 그중 OO 아이템은 사용 전 기관사님의 승인을 받아야 하고-.... 이런 식이다.
그리고 이렇게 외워야 하는 디테일이 비행기 기종마다 모두 다르다.
그래서 공부하다 보면 "아까 본 기종은 여기 분명 소화기 두 개였는데 여긴 또 하나야? 같은 회사 항공기인데 왜 이렇게 헷갈리게 해 놨대??" 하는 순간들이 온다.
어디에 소화기 몇 개 있는지 외우는 게 그렇게 중요해? 그냥 ‘소화기가 있다’를 알면 된 거 아냐?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나도 처음엔 그랬으니까.
그런데 비행기에서 실제 불이 나면 '어디'에 소화기 '몇 개'가 있는지를 정확히 알고 있는게 신속 대응에 얼마나 중요한지를 뼈저리게 느낄 수 있다.
이걸 왜 아냐면
내가 실제 비행 중에 화재 진압을 해봤기 때문이다.
안전 규정은 괜히 쓰인 게 하나도 없다는 말을 절감했었다. 이건 나중에 따로 썰을 풀어보기로 하고...
SEP 매뉴얼 제일 첫 장에 나오는 게 소화기(BCF) 사용법이었는데, 이건 그야말로 안전 매뉴얼의 기본 중 기본이라 비행 전 브리핑룸에서 항상 언급하기 때문에 지금도 툭 치면 당시 매뉴얼 내용을 줄줄 읊을 수 있다.
이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어느 항공사든 크루로 유니폼을 입어 본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그럴 것이다.
크루들이 기내에서 대응해야 할 메디컬 응급상황 중 가장 마주하기 싫은 상황은 출산 아닐까.
정확히는 싫다기보다 겁난다고 표현해야 맞을 것이다. 산모와 아기의 목숨을 제대로 책임질 수 있을까 싶은.
비상착륙을 아무 때나 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크루들은 비행 중 여러 메디컬 응급상황에 대응할 수 있도록 기초적인 훈련을 받는데, 그중에는 출산 상황도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출산 상황을 대비한 훈련과정에는 모자이크나 편집 없는 실제 출산 녹화영상을 처음부터 끝까지 보는 절차도 있었다.
출산 시 어떻게 대응하는지 매뉴얼로 내용을 배운 다음 바로 영상을 보여줬는데, 흔히 방송에서 보는 식으로 일부 가려지고 편집된 영상이 아니라 그냥 처음부터 끝까지 아무 편집도 되지 않은 날것의 영상이었다.
산모의 고통스러워하는 얼굴, 남편의 초조한 모습, 의료진의 진중한 눈빛 이런 건 단 한 번도 안 보여주고 그냥 말 그대로 '출산 과정'만 보여줬다.
정작 출산하는 산모 당사자들은 볼 수 없는, 그 과정 그 장면 말이다.
배치마다 다르겠지만 당시 우리 배치는 전원 다 출산 경험 없는 20대 초중반 여성들이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그런 영상이 모두에게 상당히 쇼킹한 것이었다. 출산이 저런거냐며 영상 보다가 여러 감정에 눈물이 그렁그렁 해지는 친구들도 있었고 무섭고 보기 힘들다고 자리를 뜨는 친구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편하게 볼 수 있는 영상은 아니긴 했다.
그런데 누군가가 자리를 뜨거나 고개를 돌릴 때마다 인스트럭터는 영상을 다시 처음으로 돌려놓고 기다리고 있다가, 전원 다 다시 착석해서 자세를 바로 하면 다 같이 처음부터 다시 시청하게 했다. (모든 인스트럭터들이 이러지는 않았는데 우리 배치 인스트럭터는 이런 스타일이었다.)
"비행 중 실제 출산 상황이 닥치고 기내에 의료진이 없을 경우 산모와 아기의 목숨을 살리는 건 온전히 크루들이 할 일이다. 너희들이 제대로 할 줄 알아야 하는 일이니 처음부터 끝까지 피하지 말고 집중해서 봐라."
알겠습니다 선생님.
근데 전 다 외운 거 같아요.
이제 그만 보면 안 될까요.
으아아....
난 졸지에 자세하기 그지없는 출산 영상을 10회가량 연속으로 시청했고, 그 자리에서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가 실제로 비행 나가면 출산하는 상황만큼은 마주치지 않게 해 주세요. 제발. 제발.
그리고 전지전능한 존재께서 내 간절함을 들어주긴 하셨는데, 직독직해를 하신 것인지, 난 실제 비행 중 출산하는 상황'만' 빼고 그 외 나머지 훈련받은 메디컬 상황은 거의 다 겪었다.
어떤 부사무장들은 7, 8년 차인 자기들도 한 번도 못 겪은 상황을 1년 차인 네가 벌써 겪었냐고 신기해하며 나한테 물을 정도로, 난 메디컬 응급처치 매뉴얼에 있는 대응방법들 어지간한건 실전으로 거의 다 해봤다.
그러니까 사람이 뭔가 목표를 세우거나 간절히 바랄 땐 좀 넓게 생각하고 구체적이어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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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내 장비들 중에는 난동 승객 대응을 위한 제압용 수갑도 있고 비상 탈출시 사용할 도끼(!)도 있다. 수갑 대신 포승줄이 있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당연히 모든 신입 승무원들은 훈련기간에 모든 장비들을 실제로 사용하며 연습을 한다. 그 말인 즉, 나를 포함한 전현직 크루 언니오빠들이 한때 도끼 좀 휘둘러봤다는 뜻이다.
이 사실을 알고 나면 '비행 중에는 항상 승무원의 지시사항에 잘 협조하여 주십시오.'라는 방송문구가 좀 다르게 들릴지도 모르겠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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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있을까봐 덧붙이자면 도끼는 비상시 문이 열리지 않을 경우 문을 부수는 용도로 있는 것이다.
사람 제압용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