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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Jan 22. 2018

결혼 후 엄마의 보호자가 되었다

나에게 다 써버린 엄마의 삶 

엄마는 요즘 나를 볼 때마다 아기를 낳으면 얼마나 좋은지 모른다고 은근슬쩍 어필하려 한다. 엄마의 은근한 압력과 잔소리가 귀찮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렇게 말해주는 엄마에게 고마운 마음도 든다. 자식 낳고 키우느라 고생했다고 생색을 내기는커녕 자식이라는 게 참 좋은 거라 하니 내가 엄마에게 그만큼 기쁨이고 행복이었을까 싶은 것이다. 특별히 그런 의도로 하는 얘기는 아닌 것 같지만. 


나는 어릴 적에 엄마에게 시시콜콜 살갑게 말을 거는 딸은 아니었다. 엄마와 함께 살았던 10대 시절을 떠올리면, 엄마가 나 때문에 가슴을 치며 화내고 답답해했던 기억이 제일 먼저 난다. 만나기만 하면 싸우는 아빠와 나 사이에서 엄마의 새우등이 터지기도 했다. 나는 잔소리 듣는 것은 질색인 사춘기 여고생이었고, 당시 제일 싫어했던 것 중 하나가 부모님이 휴대폰을 뺏는 것이었다. 아주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했지만 휴대폰을 부모님 돈으로 샀고, 요금도 부모님이 내주고 있으니 나의 권리를 강하게 주장할 수 없었다. 


나는 대학에 가자마자 아르바이트를 해서 휴대폰 요금부터 내 앞으로 바꿨다. 아무 일도 하지 않아도 부모님이 용돈을 주던 학생 신분이 끝났지만 오히려 해방감이 느껴졌다. 스무 살이 된 이후부터는 엄마에게 무슨 조언을 구하거나 엄마의 말대로 행동해본 적이 별로 없다. 대학을 갈 때도, 취직을 할 때도, 독립하겠다고 원룸을 계약할 때도 엄마에게 말도 하지 않고 혼자 덜컥 행동한 뒤에 보고를 했다. 엄마는 어차피 비슷한 잔소리만 할 테니까, 혼자 알아서 하는 것이 편하고 좋았다. 


그 무렵에는 나도 마찬가지로 엄마가 답답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내가 혹 엇나갈까 가슴 졸였을 엄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엄마도 여고생 딸을 키우는 건 처음이었을 테니까. 그때 엄마에게 가장 많이 했던 말이 ‘내가 알아서 할게!’였다. 보호자가 거추장스럽게 느껴지는 치기 어린 마음이었을까? 엄마와 나 사이에 소통이 충분히 되지 않아 서로가 힘들었던 시간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그런데도 엄마는 자식이 얼마나 좋은 줄 아느냐고, 자식을 키우는 건 행복하고 기쁜 일이라고 이야기한다. 


엄마의 삶은 어떻게 됐어?


내가 이십대 후반에 비교적 일찍 결혼을 하겠다고 하니 엄마는 몇 년 더 있다가 하라며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결혼 준비를 시작하고 있었다. 나는 엄마가 결국에는 나에게 져준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해 보면 엄마는 아직 나를 엄마 품에서 떠나보낼 준비가 안 되었는데, 내가 먼저 파닥파닥 날갯짓을 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릴 때는 부모님으로부터, 사실 그 무엇으로부터든 그저 독립하고만 싶었다. 엄마의 존재가 든든한 한편, 내가 엄마를 만족시킬 수 있는 좋은 딸이 되어야 할 것 같은 부담감도 있었다. 내 인생이 실패한다 한들 그게 누군가의 슬픔이 되지 않는다면 나는 더 자유로울 텐데. 그러나 엄마는 내게 일어나는 좋은 일을 누구보다 기뻐해주고, 힘든 일을 누구보다 슬퍼해줄 사람이었다. 내가 어떻게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 나만의 몫이 아니라는 게 때로는 다소 무겁게 느껴졌다. 큰딸로서 엄마에게 느끼는 묘한 책임감, 미안함, 부담감, 애틋함 같은 오묘한 감정들이 버무려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우리도 다 컸으니까 엄마에게도 엄마의 인생이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자식과는 별개로 엄마만의 삶과 즐거움 같은 것이 있었으면 했다. 여건만 됐다면 엄마도 요즘 애들처럼 여행도 다니고, 취미 생활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으면서 청춘을 보낼 수 있었을 텐데. 어릴 때를 어렴풋이 기억해 보면 항상 엄마 것은 사지 않고 아끼면서도 가족들에게는 부족함 없이 해주려던 엄마의 모습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무엇을 누리기보다는 늘 희생했던 엄마가 안쓰러운 마음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자식만 바라보고 키워준 엄마에게 무언가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되어 보답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엄마가 자식을 위해 희생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에는 엄마에게 미안해하고 싶지 않은 내 이기심도 들어 있었다. 엄마가 보답 같은 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말이다. 



난 여전히 엄마 딸이니까 


하지만 막상 결혼을 통해 실제로 내가 공식적으로 독립을 했더니 그냥 엄마의 근황이 자꾸 궁금했다. 오히려 집에 남아 있는 엄마를 내가 더 걱정하게 된 것 같다. 엄마 역시 불완전한 어른이었으리라는 걸, 결혼과 출산을 통해 엄마의 삶의 중심도 변화했으리라는 걸 점차 실감하게 되어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자꾸 엄마의 삶을 떠올려보게 된다. 엄마는 어떻게 살고 싶었을까, 엄마는 내 앞에 놓인 길다란 길을 앞서 걸으면서 어떤 마음이었을까. 


보통 아기를 보고 예뻐하면 결혼할 때가 됐나 보다, 하는데 오히려 부모님의 마음을 헤아리게 되면서 어른이 되는 것도 같다. 엄마에게는 받은 것밖에 없는데, 30년 가까이 베풀기만 하고도 엄마는 나와 통화할 때면 자꾸 ‘결혼하기 전에 더 잘해줄걸’ 한다. 결혼했어도 나는 변함없이 우리 엄마아빠의 딸인데, 엄마가 허전해하는 것 같아 더 엄마를 찾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오히려 내가 엄마의 보호자가 된 것처럼 자꾸 잔소리를 하게 된다. 어릴 때 엄마 손을 붙잡고 복잡한 수원역을 돌아다녔던 기억이 어렴풋하게 있는데 지금은 엄마가 혼자 지하철을 탄다고 해도 괜히 마음이 불안하다. 버스에서 우리 엄마 같은 아주머니가 있으면, 나 같은 누군가가 내 엄마한테 자리를 양보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자리를 양보하곤 한다. 한 번은 내 잔소리에 엄마가 귀찮다는 듯 ‘아, 내가 알아서 할게!’ 하는 것이었다. 맞다, 엄마도 어른이었지. 뭔가 황당하면서도 웃음이 났다. 엄마의 간섭이 매사 귀찮았던 어린 시절과 달리 지금은 도리어 엄마를 간섭하고 있다. 어쩔 수 없이 우리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서로의 보호자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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