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곤 Jan 15. 2018

결혼 후 아빠에게 출가외인이 되었다

너무 다른 두 세계의 충돌 

친정 아빠와 사이가 좋았던 기억이 거의 없다. 어릴 때는 아빠가 나를 안고 코스모스도 보러 가고, 맛있는 것도 사주고 했다는데 너무 어릴 때라서 그 기억은 낡은 앨범 속 사진 속에만 있다. 아빠가 집안의 가장이라는 책임감을 안고, 주말 가족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아빠처럼 몇 십 년을 성실하게 일하는 동안 나는 엄마의 손에서 착실하게 자랐다. 아빠는 온 힘을 다해서 나를 키웠겠지만 나는 ‘아빠가 나한테 해준 게 뭐가 있느냐’고 화내는 딸이 됐다. 아빠는 내가 응당 아빠의 말을 따르고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겠지만, 내게 아빠는 내 의견은 듣지 않고 오로지 아빠의 말만 옳다고 강요하고 화내는 존재였다.


사춘기가 왔을 때 아빠와의 갈등이 극에 달했다. 고양이처럼 조용한 환경을 좋아하는 성향의 나로서는 화가 나면 거친 말을 하거나 언행이 격해지는 아빠와 도저히 대화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유독 예민한 감성의 딸과 투박하게 지시하듯 말하는 방법밖에 모르는 아빠의 대화가 잘 통할 리 없었다. 내가 스무 살 남짓한 나이가 되자 더 이상 밥상머리에서 잔소리하거나 휴대폰을 뺏을 수 없게 된 아빠는 ‘시집 갈 때 한 푼이라도 주나 봐라’를 무기로 내세우기 시작했다. 물론 나는 ‘그럴 생각도 없다’로 맞받아쳤다. 워낙 그 소리를 많이 들어서, 결혼할 때 부모님으로부터 금전적인 도움을 받고 싶다고 생각한 적도 없었다.


딸 가진 아빠는 약자였다 


나는 점점 더 독립적인 딸이 되어갔고 아빠가 내게 내밀 수 있는 카드는 점점 줄어들었다. 그간 아빠한테 제일 많이 했던 말은 ‘내가 알아서 해!’였다. 아빠의 의견은 항상 나와 부딪쳤고 나는 그냥 내가 알아서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일이 점점 많아지는 성인이 된다는 게 반갑기만 했다. 모든 걸 알아서 할 수 없기 때문에(혹은 할 수 있음에도 의지하고 싶을 때) 관계가 생기는 법이다. 결국 자신이 결정해야 할 진로나 연애를 친구에게 상담하고, 혼자 묶을 수 있는 머리카락을 연인이 대신 묶어주면서 서로의 인생에서 중요한 존재가 된다. 아빠와 나의 관계는 그만큼 빈약했다.


그러던 아빠의 태도가 달라진 건 내가 결혼하고 나서부터였다. 신랑은 내가 아빠와 사이가 안 좋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했다. 신랑이 보기에는 독불장군이기는커녕 친절하고, 싫은 소리 할 줄 모르고, 혹시나 사위가 피곤할까봐 안절부절못하는 부드러운 장인어른이었으니까. 아빠는 혹 신랑이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라도 담그려 하면 손사래를 치며 그릇을 뺏었다. 운전하느라 피곤할 텐데 밥 다 먹었으면 빨리 집에 가서 쉬라며 떠밀듯이 우리를 배웅했다. 첫 명절 때 시댁에서 '며느리 들이면 친정에 안 보내려고 했는데' 같은 농담을 억지웃음으로 흘려버렸던 기억이 떠올랐다. 새로 들인 가족을 대하는 친정과 시댁의 분위기 격차를 나는 멍하니 체감했다.


다만 아이러니하게도 나는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고 아빠의 삶을 조금 이해하게 됐는지도 몰랐다. 우리의 결혼은 두 집안의 결합이기도 했는데 그 관계에서 아빠는 약자였다. 나에게 큰소리치던 아빠는 이제 혹 사위가 처갓댁에 와서 불편할까봐, 내가 시댁에서 예의바르게 행동하지 않을까봐 그게 걱정이었다. 딸을 다감하게 대하는 매뉴얼은 전혀 배운 적 없었던 아빠지만 사위가 백년손님이라는 사실은 알고 있었고, 딸이 시집가서 시댁에서 예의바르게 행동해야 한다는 사실만큼은 중요했던 것이다. 그 시대에서 그게 옳은 것이라 생각하고 살아온 아빠로서는 그런 식으로밖에 생각하고 표현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도, 귀한 딸이잖아요


하지만 아빠의 가치관을 들여다봤다고 해서 아빠를 받아들이게 된 건 아니었다. 오히려 아빠와 내 세계가 얼마나 다른 위치에 있는지 객관적으로 알게 되어갔다. 


한 번은, 친정에서 15년 동안 키우던 반려견이 요 며칠 밥을 전혀 먹지 않는다고 엄마에게 연락이 왔다. 결혼한 지 5개월쯤 됐을 무렵이었다. 이미 노령견이라 신혼집으로 데려오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 친정집에 남아 있었는데,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에도 막상 그 순간이 다가오니 가슴이 덜컥 했다. 퇴근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고, 내 삶의 절반을 함께해준 반려견의 마지막 순간에 당연히 내가 곁에 있어주어야 했다.


그날 아빠는 집으로 달려온 나를 보더니 자고 갈 거냐며 대뜸 화를 냈다.


"이 서방 밥은 어떻게 하고? 내일 아침밥도 안 차려줄 거야!"


집에 밥 있다고, 다 큰 성인이 혼자 밥도 못 먹겠느냐고 하니 아빤 너 같은 애가 세상에 어딨느냐며, 남편이 불쌍하다고 화를 내며 한탄했다. 시집 간 딸이 친정집에서 신랑 없이 자고 간다는 것을 아빠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아빠가 강아지를 싫어했던 것도 아니다. 오히려 제일 많이 챙기고 예뻐한 사람이 아빠였다. 또 내게 강압적이었을 뿐 아빠의 삶이 그리 가부장적이지도 않았다. 빨래나 청소 등 집안일도 했고, 신랑과 친정에 오면 출근한 엄마 대신 교대 근무하는 아빠가 백숙을 끓여주기도 했다. 식사도 스스로 잘 챙겨 드신다. 그런 아빠면서 나한테 왜 그렇게 엄격한 아내로서의 역할 잣대를 들이댔던 걸까. 지금까지도, 아무리 여러 방면에서 생각해봐도 나는 아직도 아빠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다.


내가 사랑하는 강아지의 죽음을 앞두고 있는데도 남편에게 밥을 해주지 않고 친정에서 자고 가겠다는 나를 제 역할을 하지 않는 불성실한 아내로 치부하는 아빠의 이런 태도는 남편과 나의 동등한 관계를 단숨에 일그러뜨린다. 나의 결혼을 대하는 아빠의 모습은 늘 내게 ‘(요리나 살림을)제대로 못 가르친 딸을 시집보내 죄송하다’고 고개 숙이는 친정 부모님의 입장을 연상시킨다. 결혼 초에 친정집에 올 때마다 멋쩍은 듯이 신랑에게 ‘딸이 밥은 잘 먹이느냐’고 몇 번이고 묻던 아빠의 모습이, 명절에 우리 집은 안 와도 되니 시댁에 오랫동안 있으라던 아빠의 말이 그랬다. 우리 부모님도 시부모님과 동등한 대우와 효도를 받는 것이 마땅하지만 아빠는 자꾸 당연한 대접을 사양했다. 차라리 ‘우리 딸을 책임질 수 있나’ 하고 듬직한 신랑의 역할을 요구하는 일명 ‘딸 바보’ 아빠들의 시선이 부러웠다. ‘우리 아들 귀하게 키웠다, 설거지가 웬 말이냐’는 우리 시아버지의 태도와 극명히 비교되어서 더 그랬다.


나는 지금은 아빠를 미워하지는 않고, 아빠가 나를 생각하는 마음도 이해하고 있다. 다만 며느리에 대한 사회적 압력에서 내 편이 되어주지 않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이 씁쓸하다. 그게 날 걱정하고 위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걸 끝내 모를 것 같은 아빠가 애잔하다. 결혼식 날 아빠는 눈이 빨갛게 충혈되어 있었다고 했다. 나는 아빠의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않아서 몰랐다. 나의 결혼이 아빠에게 어떤 감회였을지 나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 아빠는 나를 ‘시집보내고’ 전통적인 의미로 나를 기존 가족의 테두리에서 내보낸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내가 아내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이 아빠로서 내 양육의 최종 퀘스트라고 여기고 있는지도. 하지만 여전히 나는 내가 생각하는 대로 살아가고 있다. 아무래도 아빠가 옳다고 믿는 방식대로는 살 수 없다.

이전 13화 주기적인 안부전화는 무리예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