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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Jan 01. 2018

'시집가도 되겠다'는 칭찬, 사양할게요

 남자라서 집안일 할 줄 모른다고요?

시집가도 되겠다는 칭찬을 많이 들어보지는 않았다는 점을 먼저 고백한다. 오히려 아주 어릴 때에는 친척들로부터 종종 들었다. 엄마 옆에서 부엌일을 꼼지락거리며 도와주고 있으면 누군가 ‘어이구, 시집가도 되겠다’고 웃었다. 집안일을 잘할 것 같은 ‘싹수’가 보이는 것만으로도 칭찬을 받았던 시절이었으나, 커서는 꼼지락거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던지 아무도 나에게 ‘시집가도 되겠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시집갈 때 됐다’는 말은 했어도.


예쁘게 요리하고 세팅한 테이블 사진을 인스타그램에 올리거나 지나가는 아기를 보고 예쁘다고만 말해도 ‘어머, 시집갈 때 됐나보다’는 말을 쉽게 들을 수 있다. 요즘은 별로 쓰지 않는 말이지만 내가 어릴 땐 ‘신부 수업’이라는 말도 흔했다. 집안을 돌볼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여자는 결혼을 해도 된다는 의미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요즘도 초등학교 교사, 즉 맞벌이를 하면서도 일찍 퇴근해 저녁밥을 차릴 수 있는 여자가 소개팅 선호 조건 1순위인가?


집에 사는 사람은 누구나 집안일을 해야 한다


집은 가만히 두기만 하면 절대 사람 사는 공간의 형태를 유지할 수 없다는 걸 독립하고 나서 깨달았다. 집은 혼자서는 굴러가지 않았다. 바닥에는 머리카락이 수없이 떨어졌고, 조금만 방심하면 빨랫감이 바구니에서 튀어나와 집안을 어수선하게 만들고, 먹었으면 설거지를 해야 하고 무심코 벗어둔 양말을 세탁기에 넣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냉장고 안에서 최초의 형태를 잃은 흐물흐물한 채소를 버리고 하수구에 끼는 머리카락을 빼는 것도 나의 일이었다. 아무리 집에서는 잠만 자는 생활이라고 해도 실제로는 최소한의 ‘돌봄’이 필요했다.


집안일을 배우는 것은 사회에서 일을 배우고 직업을 갖는 것과는 또 다르다. 적어도 우리는 초중고 시절에 지식을 쌓고 최종적으로는 그로 인해 사회 구성원으로서 일을 할 수 있도록 10년이 넘게 교육받는다. 남자든 여자든 마찬가지다. 그런데 집안일은 엄마가 시키지 않는 한 자진해서 관심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엄마와 살 때 가끔 설거지를 하고 가끔 빨래를 널었지만 그게 집안에 매일 발생하는 일이라고는 실감하지 못했다. 독립해서 혼자 자유롭게 산다는 사실에 신이 났다가도 5평짜리 원룸조차 이토록 손이 많이 가는 공간이라는 데에 나는 아연하며 놀랐다. 물론 이제야 엄마에게 미안해졌고…….


약 27년 만에 맞닥뜨린 집안일은 정말이지 재미가 없었다. 결과가 확연히 나오는 직업적인 일과 달리 집안일은 그저 생존을 위해서 해야만 하는 귀찮은 일로 느껴졌다. 내 공간을 스스로 꾸미는 것이 나름대로 로망인 줄 알았지만 그것조차 실제로는 별 흥미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나만의 공간이 생기면 예쁜 가구도 사고, 소품도 채워 넣고, 인터넷에서 본 수많은 셀프 인테리어 요령을 따라해 볼 줄 알았는데 그냥 귀찮았다. ‘시집가도 되겠다’는 칭찬이 뚝 끊긴 건 당연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집안일 못하는 여자에게는 이제 '결혼하면 어쩌려고 그래?', '그래서야 누가 데려가겠니?' 같은 말이 따라온다. 


하지만 예능 프로그램에서는 종종 남자 혼자 사는 집이 어질러져 있거나, 옷이 옷장이 아니라 바닥에서 구겨져 있거나, 밥 대신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걸 보고 ‘빨리 결혼을 해야지’ 하고 혀를 차는 모습이 나온다. 집을 관리하는 것은 어딘가에 거주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싫더라도 누구나 해야만 하는 일이다. 깔끔하게 잘하는 사람도 있고, 못해도 그럭저럭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걸 잘 해내지 못하는 사람은 누군가에게 그 일을 떠맡겨도 된다고, 도대체 누가 정한 걸까?



여자에게도 '처음'이 있다


결혼 이전에 자취하는 경우도 있지만 부모님과 함께 살다가 결혼할 경우 결혼은 곧 독립이기도 하다. 엄마가 모든 걸 해주던 시절에서 빠져나와 이제 집을 내 손으로 꾸려 나가야 한다. 신혼부부의 갈등 중 상당 부분이 바로 이 지점에서 파생하는 것 같다.


결혼하기 전, 상견례 때 시아버지는 “우리 아들은 집안일 아무것도 시킨 적이 없다, 할 줄 모른다”고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하면 앞으로도 안하겠다는 선언 같지 않느냐며 남편이 민망해하며 말렸다. 결혼하기 위한 준비, 즉 독립을 위한 집안일 능력치가 제로라는 사실을 여자 측에서는 미안한 듯 말하고 남자 측에선 자랑스럽게 말하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집을 집답게 유지하기 위해서는 수없이 많은 노동이 필요하다. 그것을 두 사람이 시행착오를 거칠지라도 함께 해나가야 하는 것은 당연한 얘기다. 부모님과 살 때 해본 적이 없다고 ‘나 이런 거 할 줄 몰라’를 당당하게 말하는 건 사실 부끄러운 일인데, ‘엄마가 했던 일이니까 같은 여자인 아내는 당연히 할 줄 알겠지’라고 생각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 것 같다. 여자라고 집안일 패치를 장착하고 태어났겠는가. 집안일 능력 시험 합격자 한정으로 결혼 자격증이라도 나오는 줄 아는 걸까? 


‘시집가도 되겠다’는 어쩌면 이전 세대가 여성에게 할 수 있는 최대의 칭찬이었던 셈인지도 모른다. 돈 잘 버는 좋은 남자 만나서 안정적인 가정을 꾸리는 것이 여자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행복이라고 모두가 믿었던 시절이 있으니까. 어느 목사가 “어디 여자가 기저귀 차고 강단에 올라와?”라고 말했던 것이 겨우 2003년의 일이다. 그렇게까지 노골적이지는 않더라도 많은 여성들이 여전히 ‘유리천장’의 존재를 느낀다. 


그러나 그들의 세계에 순응하여 내가 사회에서 남성들과 어울려 일하는 것을 그만두고 다른 한 사람 몫의 집안일을 짊어지기로 결정하는 것이 내 행복을 책임질 리 없다. 둘 중 한 명이 전업주부가 된다 해도 그건 ‘시집/장가를 잘 간 것’이 아니라 배우자와 가정을 유지하기 위한 총량을 분담하는 일이다. 그러니까 적어도, 요리와 청소를 잘하는 여자가 시집갈 준비가 되었다고 ‘칭찬’하는 말은 듣고 싶지 않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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