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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곤 May 08. 2018

어버이날 행사, 며느리가 주관해야 하나요?

모든 며느리가 리더가 될 수는 없다

어버이날이 다가오자 우리 부모님보다 먼저 떠오르는 것이 시부모님이었다. 우리 부모님은 내가 언제든 편하게 연락할 수 있고, 혹 어버이날을 잘 챙기지 못하고 넘어가도 바쁜 딸이라고 이해해주실 테지만 시부모님은 그에 비해 뵌 지가 얼마 안 된 ‘어려운 어른’이기 때문이다. 시부모님은 내 부모님과 달리 내가 예의를 갖추어야 하는 분들이고, 잘못했을 때 이해를 구하는 과정이 조금 더 복잡할 수밖에 없는 분들이다.


결국 결혼 3년차의 새내기 며느리에게 어버이날은 나를 낳아주고 키워주신 부모님에게 감사를 전하는 날이라기보다, 결혼이라는 제도적 약속으로 맺어진 (아직)낯선 어른들에게 예의를 갖추는 날에 가깝다는 느낌이다. 하지만 막상 어버이날이 되면 시부모님에게 문자라도 보내려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남편을)사랑으로 키워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쑥스러워서 안부 인사 정도로 대신하고 있다. 그래도 왠지 마음이 쓰여서, 어버이날을 잊고 있을 것 같은 남편에게 넌지시 말해두었다.


“저번에 어머님이 배낭 필요하다고 하셨잖아. 이번에 어버이날이니까 자기가 하나 골라서 사드려, 아니면 용돈으로 보내드리든가.”


내 딴에는 남편이 미처 챙기지 못하는 효도에 대하여 신경써주는 것이지만 남편은 대수롭지 않게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는 것 같다. 그는 매 가족 행사를 챙기기보다 ‘신경 쓰지 마’ 하는 편이라 처음에는 다소 마음이 불편했다. 서로의 집은 각자가 챙기기로 했지만, 시댁에 그가 하지 않으면 결국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우리 집은 내가 챙기더라도 무신경한 남편이 시댁을 챙기지 않으면 그 섭섭함은 아들보다 며느리에게 돌아오는 경우를 많이 봤다. 하지만 그냥 섭섭해 하시면 섭섭한 대로 받아들이자, 그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좀 편해진다. 아들도 안 하는 걸 ‘남의 딸’이 굳이 하려고 혼자 아둥바둥하면 그게 무리가 된다.


시어머니는 매년 5월이 되면 나에게 ‘이번 달 며칠에 제사 지내잖니’ 하고 당연히 내가 알고 있어야 한다는 듯이 제삿날을 주지시켜 주셨다. 바쁘니 제사에는 오지 말라고 하시면서도 어김없이 시아버지에게 ‘못가서 죄송해요’ 하고 연락을 드리길 바라셨다. 한 번은 내가 ‘남편이 안 알려줘서 저는 몰랐어요’ 하자 제사 날짜를 줄줄 읊어주셨다. 나는 제사에 가거나 못 가는 건 남편이 주관할 일이라고 말했지만, 어머니는 ‘남자들은 무뚝뚝해서’라고 나를 설득하셨다.


그러나 나는 남편의 제사를 내가 그에게 알려주고(여보, 이번 달 며칠에 너희 집 제사야.) 참석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 변명하고(아버님, 바빠서 못 가서 죄송해요.) 싶지 않다. 그것이 며느리의 몫이라 생각하시는 시어머니와 세대의 간극을 한두 마디 대화로 좁혀나갈 수는 없을 것이다. 결국 마지막에는 메시지로 내 생각을 한 문장으로 정리해 말씀드렸다.


“가족 행사나 제사 같은 건 서로 각자 챙기고 배우자는 도와주는 역할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어머니는 결국 ‘너희들이 알아서 정하고 해나갈 일’이라며 이해해주셨지만, 사실 제사 때 며느리가 무언가 제스처를 취해주길 바라는 마음을 모르는 것도 아니다. 시어머니가 ‘결혼은 원래 불편한 것도 해야 하는 것’이라고 내게만 강요하시는 게 아니라는 걸 안다. 시어머니가 실제로 그런 삶을 살아오셨기 때문에 어련히 그래야 하는 줄로 생각하시는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댁 행사 일정을 외우지 않는다. 친정 부모님 생신 때에는 내가 그때그때 남편에게 말해준다. 서로의 원가족과 연관된 날짜를 외우지 못하는 것에 대해 조금도 서운하지 않다.




최근 어버이날을 ‘빨간 날’로 지정하자는 논의에 대한 뜻밖의 반대 목소리가 높았다. 30대 초반인 내 주변에는 자영업자나 CEO보다 일반 직장인이 많아 휴일을 환영할 만도 한데 그랬다. 어느 날 만난 결혼한 친구도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유는 간단하다. 결혼한 며느리들은 어버이날 쉬면 ‘시댁에 가야 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며느리들이 자연스럽게 어버이날과 시댁 방문을 연상시킨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어버이날과 환갑이 겹쳤다든가 어버이날과 시부모님 생신이 겹쳤다고 좋아하는 것도 대부분 며느리들이다. 1년 내내 챙겨야 하는 각종 집안 행사에 대한 부담감을 은연중에 혹은 대놓고 늘 짊어지고 있는 탓이다.


함께 결혼했는데도 왜 집안 행사의 날짜를 헤아리고 식사 메뉴를 고민하는 것에 대해 비교적 아내들의 부담감이 클까. 며느리들은 결혼하는 순간 암묵적인 ‘며느리 도리’와 마주친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것을 해야 할 일로 여기게 된다. 그 자신뿐 아니라 남편, 시부모님, 친정 부모님, 주변 사람들, 온 세상이 그걸 당연한 일로 생각하고 있기 때문에 쉽게 그 틀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나는 안 할래.’ 그 말을 꺼내는 순간 온 세상이 나를 부적절한 인간으로 몰아갈 것 같다.


우리 엄마도 수십 년 동안 집안에 주된 일이 있을 때마다 고모들과의 연락을 도맡았다. 내 남편은 남자 형제가 없지만, 주변 친구들 중 동서나 형님이 있는 경우에는 여자들끼리 이야기해서 시부모님 선물을 정하거나 식사 자리를 예약하는 경우도 종종 보인다. 자기 집안인데도 많은 남편들이 가족 행사 일정의 조율을 아내의 몫으로 미룬다. 남편이 그렇게 하지 않아도,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전화를 건다.


나도 결혼 초반에는 만남이 있을 때마다 시어머니의 전화를 받았다. 그러나 남편에게 친정에 가는 일정에 대한 연락을 미룬 적은 없었다. 내가 우리 부모님과 남편의 일정을 각각 확인하여 ‘이날 괜찮아?’ 묻고 약속을 잡는다. 남편도 당시 시어머니에게 말씀드려서 집안 행사에 관련된 연락은 본인에게 해달라고 시스템을 바꿔주었다.


가족 행사 조율에 대해 ‘별 것도 아닌데 그 정도도 못 하겠다고 징징거리냐’고는 말하지 말자. 남의 몫에 대해 별 것 아니라고 하는 사람 치고 스스로 하는 사람을 못 봤다.




어쨌든 여러 명의 일정을 조율하여 약속 시간을 확정짓는 건 기본적으로 피곤한 일이다. 대학 땐 주로 과대나 학생회장이 그런 일을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면 모든 며느리가 모임의 ‘대표’ 역할을 맡다 보니 삶이 한층 피곤해진다. 그 리더 역할에는 명예도 없다.


우리는 온전한 1인분의 삶만을 책임지고 살아가는 것으로도 충분히 버겁다. 어느 집단의 대표가 되어 사람들을 이끌고 즐겁게 해주는 것이 적성에 맞는 사람도 있지만 여러 사람의 사이에 끼어 조율하는 역할을 맡는 것이 큰 스트레스로 다가오는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회사에서는 팀을 이끌고 자신이 맡은 일도 책임감 있게 해내는 남편들일 텐데, 맞벌이를 해도 양쪽 집안을 통틀어 관장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아내의 몫일 때가 많다. ‘돈을 벌어오는 것’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했다고 생각하는 외벌이 남편들도 있는 것 같다. 그러나 경제활동 말고도 우리가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노동과 노력이 필요하다. 삶의 균형을 맞춰가기 위해서는 서로 간의 배려가 필요할 수밖에 없다.


아마 남편들에게 시댁 행사에 대한 조율을 맡기고도 속이 터지는 아내들도 많을 것이다. 생신 날짜는 다가오는데 남편은 마음이 하나도 급한 것 같지가 않아서다. 자신의 부모님 일이라 그에게는 비교적 부담감이 적다. 식당 예약이 안 되면 집에서 제육볶음을 해 먹어도 노 프라블럼인 것이다. 성격상 차라리 아내가 나서는 게 속이 편하다면 그렇게 하면 되고, 바쁜 남편을 위해 덜 바쁜 아내가 연락 담당을 맡는다면 그것도 서로에 대한 배려가 될 것이다.


그러나 만약 그에 대한 스트레스가 크다면 나는 그냥 ‘기다리라’고, 분명한 역할 분담을 하자고 말하고 싶다. 당일 행사가 매끄럽게 진행되지 않아도 그건 며느리의 탓이 아니다. 행사 준비는 어렵다. 누구에게나 힘들다. 그래도 본인 부모님을 챙기고 싶다면 누군가에게 맡기지 말고 스스로 움직일 수밖에 없다. 물론 남편이 준비한 일정에 내가 참석하길 원한다면 기꺼이 내 몫의 역할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다. 그건 내가 시댁에 속한 며느리라서가 아니라, 남편이 나의 사랑하는 배우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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