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하치 이야기>
새벽에 노란 가로등 불빛이 깔려 있는 길을 걷다가 웬 커다란 털 뭉치 같은 것을 본 적이 있다. 미동도 없이 누워 있던 그것은 내가 유심히 살피는 기척을 느끼자 슬그머니 고개를 들었는데, 마치 대걸레를 뭉쳐놓은 것처럼 털이 북실북실한 커다란 개였다. 어느 가게 앞에 누워 있는 이 개가 과연 이 가게에서 키우는 개인지 의문이었다. 도움을 주어야 하는 걸까? 나는 한동안 머뭇거렸지만 노란 불빛을 담담하게 받고 있는 무던한 눈길을 결국은 슬그머니 피하며 돌아섰고, 그 눈빛이 떠올라 오래도록 마음이 불편했다.
사람의 본성은 본래 착하다는 성선설의 근거 중 하나가 측은지심이라면, 그 마음은 우물에 빠질 뻔한 어린아이를 볼 때뿐만 아니라 길 잃고 헤매는 강아지를 볼 때에도 해당되는 것 같다. 얼마 전 동네 골목길을 지나가는데 강아지 한 마리가 찻길과 인도 사이에서 어슬렁어슬렁 돌아다니고 있었다. 이 동네에는 어쩐지 목줄 없이 강아지를 데리고 다니는 분들이 많아서, 예쁘게 미용하고 옷까지 입고 있는 강아지가 당연히 산책 나온 아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잠시 후에도 여전히 그 자리에서 맴돌고 있는 것이었다. 주변에 이 강아지의 반려인이 있는지 살피며 내가 걸음을 멈추었을 땐 이미 짐을 잔뜩 들고 걸어가던 아주머니 한 분과, 자기네 강아지를 데리고 산책하던 한 커플도 그 강아지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들 이 녀석이 주인 잃은 강아지임을 감지하면서 얼굴에 난감함이 번졌다. 매일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주민과도 인사하지 않는 사회에서, 강아지 한 마리를 가운데 놓고 있으면 왜 이리 말을 트기가 쉬워지는지, 주변 가게에도 물어보고 각자 상황파악을 공유하다가 결국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커플이 임시 보호하겠다며 주변에 연락처를 남기고 데리고 갔다. 그 길에 있는 가게 아주머니 말로는 바로 어제 누가 자기 언니네 강아지라며 데려가는 걸 봤다고 하니, 아마 그쪽도 강아지를 잃어버리고 애타게 찾고 있을지 몰랐다. 다들 이 집 잃은 강아지와 안면 없는 사이인 것은 물론, 서로에 대해서도 털끝만큼의 공유점이 없는 사람들이 순식간에 강아지에 대한 걱정으로 마음을 모으는 건 낯설면서도 친숙한 감정이었다. 이게 아무래도 동물에 대한 사람의 본능적인 측은지심 같은 것이 아닐까, 싶은 것이다.
불쌍한 동물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사람들이 길 잃은 동물을 만났을 때는 사실, 우선은 난처하다. 왠지 내가 도움을 주어야 할 것 같고, 일면식도 없는 사이인데도 불구하고 묘한 책임감이 느껴진다.
<하치 이야기>의 파커 교수가 어느 날 귀갓길에 길 잃은 어린 아키견을 발견했을 때 느낀 감정도 처음에는 난처함이었을 것이다. 집에서는 강아지를 키울 수 없다고 반대하고, 마땅히 강아지를 맡아줄 사람도 없고, 유기견 보호센터는 이미 만석. 파커 교수는 이 어린 유기견을 품에 안고 이곳저곳에 위탁을 부탁하다가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데려온다. 주인을 찾아야 하니 전단지도 붙여보지만 연락 오는 곳은 없다.
이 길 잃은 강아지를 키울 수는 없다, 다른 주인을 찾아주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파커 교수는 어느새 이 개를 키워야 하는 이유를 찾고 있다. 가끔 마음은 의지와 상관없이 혼자서 모든 결정을 내려버릴 때가 있다. 강아지를 키우는 걸 완고하게 반대하던 아내는 결국 이 아키타견이 어느새 가족이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강아지의 목줄에는 ‘하치’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다.
아키타견은 우리나라의 진돗개 같은 일본의 대표적인 견종이다. 처음에는 투견으로서 길러졌다고 하는데, 투견이 금지된 지금은 충성심 강하고 듬직하며 자기 주관이 강한 반려견으로 알려져 있다. 영화 <하치 이야기>가 워낙 유명해 사실상 하치는 아키타견의 대명사가 되었다. 하치는 공 물어오기 따위의 재롱은 피우지 않지만 자신을 데려온 파커 교수를 아침저녁으로 배웅하고 마중 나가며 따른다.
파커 교수가 어느 날 갑작스러운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은 이후에도 하치가 매일 변함없이 그를 마중 나갔다는 감동적인 줄거리가 실화라는 사실은 이미 너무나 잘 알려져 있지만, 영화 속에서 내레이션 한 마디 없는 하치의 묵묵한 기다림은 줄거리를 모두 알고 봐도 가슴을 무겁게 짓눌러온다. 여느 날과 다를 바 없는 어느 아침, 하치는 언제나처럼 출근길을 배웅하지 않고 그날따라 그를 붙잡는다. 한 번도 하지 않던 공 물어오기를 하자며 놀이를 조르고, 제자리를 빙빙 돌며 걸음을 늦춘다.
하치가 그의 죽음을 예감하고 파커 교수를 붙잡는 에피소드까지 실화인지는 알 수 없지만, 강아지가 반려인의 질병을 미리 알아채는 것은 놀랍게도 실제로 가능하다고 한다. 사람보다 22배 이상 발달되어 있는 예민한 후각 탓이기도 하지만 사람과 그만큼 긴밀한 교감이 이루어지는 동물인 덕분이기도 할 것이다. 파커 교수와 하치의 교감은 고마워, 사랑해, 하는 대사 없이도 그 밀도가 느껴지며 그 자체로 백 마디 이상의 말을 전하고 있다. 결국 하치가 기차역까지 물어온 공을 그대로 들고 출근한 파커 교수는, 수업 중에 갑자기 쓰러져 그대로 죽음을 맞이했다.
반려동물이 먼저 무지개다리를 건넜을 때 느끼는 상실감과 우울감을 ‘펫로스’라고 한다. 이때의 허전함과 슬픔은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개중에는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로 심각한 펫로스를 겪는 사람들도 있다. 반대로 어떤 노부부는 자신들이 먼저 죽을 것을 염려해 키우던 강아지를 안락사시키는 것을 원했다고 한다. 갈 곳 없는 강아지가 걱정된 나머지 차라리 강아지의 죽음을 지켜보는 쪽을 선택하려던 것이다. 이런 종류의 원치 않는 사별은 남아 있는 쪽이나 남겨두는 쪽이나 본인들이 아니면 섣불리 위로하기도 어려운 문제인 것 같다. 나 역시, 내 강아지의 수명이 15년여밖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 안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내가 반려견의 마지막까지 함께할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기도 하다고 종종 생각한다.
반려동물이 사람을 먼저 떠나보냈을 때에 그들의 마음은 어떨까? 가끔 방송을 통해, 반려인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나지 않는 강아지를 보면 그 마음이 감동적인 것보다 오히려 가슴이 아프다. 강아지는 사람의 죽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하치는 파커 교수의 죽음을 깨닫지 못했기 때문에 10년 동안 변함없이 기차역에 마중을 나간 걸까?
오지 않는 파커 교수를 기다리는 하치의 마음은 어쩌면, 그의 죽음과는 상관없는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애초에 그것은 마음이 이끄는 일이었으며, 그가 세상을 떠났다 해도 하치의 일상은 늘 파커 교수를 기다리는 일이었으니. 우리를 마음 아프게 하는 것은 하치가 파커 교수가 죽었다는 설명을 이해할 수 없으리라는 점 때문이 아니라, 그럼에도 변함없이 수년 전 길에서 처음 만나 가족이 된 파커 교수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는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파커 교수가 등장하는 영화 <하치 이야기>는 일본의 원본이 미국에서 리메이크된 버전인데,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각 나라마다 있는 걸 보면 강아지의 이러한 일편단심은 사람과 강아지의 특수한 친밀성을 말해주는 근거인 것도 같다. 영국에서 스코틀랜드까지 팔려갔다가 돌아온 명견 래시(하치가 아키타견의 대명사가 된 것과 마찬가지로 래시는 콜리라는 견종의 대명사가 되었다), 우리나라 진도에 동상이 세워져 있는 진돗개 백구도 첫 주인을 잊지 못하고 산 넘고 물 건너 되찾아온 대표적인 견공들이다.
하지만 하치 같은 대표적인 충견도 예외 없이, 내 눈에 띈 유기견은 어쨌거나 우리를 난처하게 만든다. 낯선 존재와 인연을 맺는 시점에는 고민이 필요하기 마련이다. 우연히 집 앞에서 서성거리는 강아지를 만났을 때에도, 길고양이를 입양할 때에도, 지인의 강아지를 맡게 되었을 때에도, 어떤 경로든 갑작스럽게 예기치 못한 존재를 책임지게 되는 것은 난감하다.
그러나 일단 함께하기로 결심하고 가족이 되었을 때, 그 이름 모를 개가 나의 반려동물이 되어 어떠한 종류의 애정과 행복을 가져다줄지는 긁지 않은 복권처럼 기대하는 즐거움을 보장해주는 것 같다. 이는 사람과 사람 사이의 신뢰와는 또 다른 종류의 맹목적인 애정임이 분명하다.
10년 동안 주인이 오지 않는 기차역 앞에서의 기다림이 아니더라도, 반려동물과 함께하고 있는 많은 이들이 이 영화를 보고 감동한 것은 하치에게서 느껴지는 마음과 비슷한 종류의 공감 덕분이 아니었을까. 그때 너를 키우기로 결정해서, 이렇게 큰 사랑을 거리낌 없이 쏟아주는 너를 만나서 다행이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