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모든 세상과의 이별

애니메이션 <당신이 버린 개에 관한 이야기>

by 소곤

헤어짐은 어떤 형태로든 그 사람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쿨하게 털어버릴 만큼 사소한 것이든, 한두 달쯤은 허전함에 몸부림쳐야 할 만큼 무거운 것이든 마찬가지로.


반려동물과의 헤어짐은 대체로 일방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어 더욱 가슴이 아프다. 그들은 우리에게 먼저 이별을 고하는 법이 없다. 우리보다 수명이 짧아 주어진 삶을 다한 경우가 아니라면, 대부분은 사람의 실수나 의도에 기인한 이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나와 상대를 잇고 있던 무엇이 끊어져버리는 건 언제나 조금씩은 슬프고, 가끔은 한 존재의 삶을 바꿔버릴 만큼 처연한 일이다. 오로지 당신이 세상의 전부였던 존재에게 주어진 이별이라면 더욱이.




노들섬이라는 곳이 있다. 서울 이촌동의 한강 가운데에 있는 섬이다. 그곳, 노들섬에 유기된 떠돌이 개들이 사회 문제로 제기되었던 적이 있었다. 개들이 한강을 헤엄쳐 섬까지 들어갔을 리는 없으니, 물론 누군가에게 버려진 개들이다. 아마 누군가 차에 함께 태워 나들이를 나왔다가, 돌아갈 때는 그대로 남겨두고 돌아갔을 것이다. 양심의 가책으로 마음 한 구석이 따끔따끔하더라도, 이내 어쩔 수 없었다고 스스로를 위안했을 것이다. 혹은 방심한 채로 뛰어놀다가, 너무 신이 나서 어딘가로 질주해버린 녀석을 눈에서 놓치고 말았을 수도 있다. 해가 질 때까지 찾아다녔지만, 결국 발견하지 못하고 차에 빈자리 하나를 둔 채 돌아와야 했을지도 모른다.


이유가 어찌됐건 보통의 경우 개들은, 진돗개 백구나 명견 래시처럼 산 넘고 강 건너 집까지 찾아갈 수는 없다. 그러면 그저 그곳에서 그들의 시간은 멎어버린다. 집에는 늘 보드라운 이불과 사람의 온기가 있었지만 섬의 강바람은 부드럽지 않다. 어느 순간 문제가 생겼다는 걸 깨닫고 주저앉아 있다 보면 노을이 내려앉을 것이다. 깜깜한 밤이 오고, 밤을 보낼 곳을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배운다. 익숙한 냄새는 더 이상 없고, 누군가 뿌리고 간 체취를 맡아볼 뿐이다. 누군가 그들을 발견하고 어디에서 왔느냐고 물어도 대답할 수가 없고, 앞으로 어디로 가야 할지도 정해지지 않았다. 버려진 음식을 뒤져야 하고, 다른 개들과 다툴지도 모르고, 예쁨을 받고 싶어 다가간 낯선 사람에게 더럽다는 비명을 듣기도 할 것이다. 머릿속에 그런 장면을 떠올리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버려진 개에게는 많은 선택이 존재하지 않으니까.


김혜정 작가의 ‘당신이 버린 개에 관한 이야기’는 5분가량 되는 짧은 흑백 애니메이션이다. 대사는 없지만 이 애니메이션에는 애초에 그다지 많은 언어가 필요 없다. 소리 없는 물음표를 듣는 것도, 보이지 않는 표정을 상상하는 것도, 그에 가슴이 먹먹해지는 것도, 모두 보는 이들의 몫이다.


키 큰 나무가 자란 숲의 초입에 승용차 한 대가 오더니 강아지 한 마리를 내려놓고 떠난다. 강아지는 승용차가 떠난 방향을 바라본다. 그리고 그 자리에 앉아, 하염없이 기다린다. 해가 지고 또 해가 뜨는 동안 그 강아지가 하는 일은 기다리는 것뿐이다. 아니다, 아무도 기다린다고 설명해주진 않았으니 기다리는 게 아닐 수도 있다. 그냥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고 싶어도 그 모습은 역시 기다리는 것으로 보인다. 가족들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을까? 자신을 두고 간 가족들을 원망하고 있을까? 혹은 왜 가족들이 사라져 버렸는지 의아해하고 있을까?


슬픔을 과장한 장면이었으면 싶은 이와 비슷한 이야기를 실제로 한 TV 프로그램에서 본 적이 있다. 한 곳에 내내 머무른 채 하얀 자동차를 쫓아가는 강아지의 사연이었다. 이 강아지는 한 마을에서 항상 같은 자리에 서성거리고 있다가, 유독 하얀색 자동차를 보면 그 뒤를 쫓아 달려가는 것이었다. 강아지는 자동차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하고, 자동차는 어느덧 무심히 멀어진다. 알고 보니 하얀 자동차를 타고 온 강아지 주인이 이곳에 강아지만 내려놓고 떠났다는 것이다. 강아지는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마지막 잔상이 다시 눈앞에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하릴없이 자동차 뒤를 쫓다가 제자리로 돌아오곤 했다. 강아지는 주인이 자신을 데리러 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걸까?


시간이 흐를수록 모든 추측은 의미를 잃고 메말라 바스러진다. 그곳에는 그저 개를 버리고 떠난 이들의 부재와, 기다리는 개가 있을 뿐이다. 여태까지 속해 있던 세상과 갑작스레 이별하고 홀로 남은 자리에는 텅 빈 우주만 하나 생겨난다. 정착할 곳도 없고, 당연히 가족들도 없는 공허한 세계가.




어릴 땐 작았던 몸집이 점점 커지는 것도, 털이 온통 젖어버리는 목욕을 싫어하는 것도, 낯선 소리에 우렁차게 짖어서 집을 지키려는 것도, 배변을 가릴 줄 몰라 아무 데나 볼일을 보는 것도 실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다. 사람과 사람이 룸메이트가 되어 함께 사는 데에도 규칙과 조율이 필요한데, 종이 다른 생명체와의 동거가 쉽고 간단할 리 없다. 짖어서 도저히 못 키우겠어, 오줌을 아무 데나 싸서 안 되겠어, 라고 하기 전에 인내심을 가지고 가르쳐야 한다. 서로 규칙을 정하고 납득하고 인정하는 시간을 포기하는 건, 하던 일을 중간에 그만두는 것과는 다르다. 그만두는 것에 대한 책임은 대개 자신이 해결하면 되지만, 동물을 버리는 것은 그들에게 모든 걸 짊어지게 하는 일이다. 버려진 건 그들의 잘못이 아닌데, 끝나지 않는 기다림의 시간은 온전히 그들이 감당해야 한다.


특히 강아지가 짖는 것은 공동주택 형태가 많아진 오늘날의 사회에서 많은 반려인들의 고민거리이며 심지어 강아지를 버리는 주요 원인이 되고 있지만, 사실 강아지는 원래 짖기 위해 키워졌다. 강아지의 본능적인 의사소통 표현인 것은 둘째로 하고, 옛날에는 강아지가 집을 지키기 위해 짖는 것이 사람들이 원하는 일이었다. 정확히 확인된 바는 없지만, 그래서 강아지는 사람들과 살면서 잘 짖도록 진화되었거나 혹은 원래부터 잘 짖는 종이 사람들과 함께 살기 시작한 것이라는 설도 있다. 그러나 지금은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강아지들은 버려진다. 사람들이 원하는 대로 빠르게 본능을 억누르지 않으면 사랑받을 수 없는 일들이 생겼다.


김혜정 작가의 애니메이션과 한 컷의 일러스트들 앞에서 수많은 애견인들이 비슷하게 눈물을 참고, 비슷한 먹먹함을 느꼈을 것이다. 자신의 전부였던 세계와 원치 않는 이별을 겪은 아이들에게 우리 중 누군가는 다시 손을 내밀어주어야만 하는 것이 아닐까. 버려진 강아지의 눈앞에 펼쳐져 있는 끝없이 먹먹한 우주를, 누군가가 새로운 세계로 채워준다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일까.


가끔은, 버려진 개들이 차라리 사람을 원망했으면 좋겠다. 그게 아니라 그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몰라 의아해하고 있다면, 돌아오지 않는 누군가를 기다리고만 있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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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버린 개에 관한 이야기' 동영상은 아래 링크에서 보실 수 있어요.

https://www.youtube.com/watch?v=0dV721igQoc