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꾸는 당신을 지켜보는 고양이의 시선

W '만화가의 사려 깊은 고양이'

by 소곤

W가 정직하고 담담한 멜로디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목소리는 담백하다. 노래 '만화가의 사려 깊은 고양이'를 들으면 그 만화가의 현실이 너무나 짐작되어 마음이 무거워진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는 쫑긋한 귀의 사려 깊은 시선 덕분일까, 아침이 올 때까지 잠들지 못하는 만화가의 밤도 그리 짓누르듯 무거운 우울감을 전하지는 않는다.




이맘때쯤 너는 항상 조금씩 말이 없어지네

날 위한 생선 한 조각도 너는 잊어버린 걸까?

밤새 펜촉 긁는 소리

좁은 방 온통 어지러운 스크린 톤

차마 눈치 없이 너를 조를 수 없었네

비 내리는 아침 어느새 가득 웅크린 채

잠든 너의 곁에 가만히 난 누웠네

반짝 빛나던 네 손 끝에 흘러가는 꿈 한 자락

나는 너를 믿을게 나는 널 기다릴게

높게 귀를 세우고 동그란 나의 눈으로

변함없이 착하게 나는 널 기다릴게


가사에 귀 기울여 노래를 듣다 보면, 생선 한 조각도 조르지 않고 만화가를 지켜보는 고양이의 시선을 따라가게 된다. 그리고 그 사려 깊은 시선 끝에 있는 젊은 만화가의 고독이나 고뇌 같은 것을, 고양이처럼 오도카니 지켜보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고양이로서는 알 수 없을 그 우울감의 뿌리를 우리는 그 시선을 통해 알아차릴 수 있다. 정말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되는 것일까, 가진 건 꿈밖에 없는 시절의 먹먹함을 상상하거나 혹은 돌이켜보는 것은 어렵지 않다. 어둠 속에 등불 하나를 켜두고 펜과, 어지러운 스크린 톤과, 그리고 홀로 자신과 싸우는 만화가의 밤은 길고 또 초조했을 것이다.


꿈, 이 한 글자를 앞에 두고 고민해보지 않은 청춘이 있을까. 하고 싶은 일과 해야 하는 일의 괴리를 느껴보지 않고 30대가 된 어른이 있을까? 꿈이 뭐기에 이렇게 나를 괴롭게 할까. 그저 일을 하고, 음식을 먹고, 오늘 하루도 별 탈 없이 마무리하면 되는 것을. 무엇이 입안에 까슬까슬하게 들어와 있는 모래알 같은 존재감으로 남아, 그걸 신경 쓰지 않고는 못 배기게 만드는 걸까. 꿈을 꾸는 것이 나를 이토록 괴롭게 만든다면 꿈을 꾸는 데에 어떤 의미가 있는 걸까?


그래도 우리는 또 펜을 든다. 언제 만날 수 있을지 모를 꿈의 옷깃이라도 스치기 위해. 꿈을 만나러 가는 그 길고긴 과정 자체가 우리를 달콤하게 유혹하기 때문에, 먹지 않아도 되는 사과의 맛을 기대하다가 이미 입 안에 침이 가득 고였기 때문에.


고양이는, 아침이 되어서야 잠든 만화가의 웅크린 청춘에 대해서 이해했을 수도, 어쩌면 몰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때에 사람에게 필요한 건 그저 적절한 순간에 몸을 맞대어주는 일이라는 것을, 고양이는 아마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고양이는 사람을 그저 밥 주는 덩치 큰 친구 정도로 생각한다는 말도 있지만, 가끔 나는 내 고양이가 내게 위로가 필요한 순간을 누구보다 재빨리 눈치챈다는 느낌이 든다.


고양이는 개에 비해 반려동물로서의 역사가 길지 않지만, 사람과의 교감은 그에 못지않은 것으로 보일 때가 많다. 강아지처럼 사람을 졸졸 쫓아다니거나, 스킨십을 먼저 요구하거나, 발라당 누워 애교를 부리는 고양이들도 많다. 만약 우리 집 고양이가 유난히 수다스럽고 말이 많다면 그건 고양이의 명백한 관심 표현이라고 한다. 고양이는 자기들끼리는 말로 의사표현을 하는 동물이 아니다. 고양이가 야옹거리며 자꾸 말을 건다는 건 사람의 의사표현을 따라하는 것, 즉 사람에게 무언가 할 말이 있다는 뜻이란다. 고양이 입장에서는 사람의 방식을 표방하여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나와 소통하기 위해. 그런 점들을 생각해 보면 고양이가 주인을 못 알아본다든가, 사람에게 관심이 없다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표현하는 방법은 다르지만, 고양이도 그 나름대로 나를 주의 깊게 지켜보고 감정의 무게를 나눠준다는 걸 느낄 때가 많다.


고양이의 시선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보일까? 어쩌면 우리는 고양이의 만화가처럼, 모두 각각 길고 어두운 새벽을 보내고 있다. 새벽의 시간은 일그러진 채 흘러서 길이를 가늠할 수 없을 때가 많다. 그 짙은 공기를 어찌할 바 몰라 잠을 청하고 마는 새벽이 나에게도 몇 번인가 있었다. 오즈를 따라가는 도로시의 노란 벽돌 길처럼, 눈앞에 또렷하게 보였다가도 갑자기 끊어지기가 일쑤였다. 평범한 도로시들은 지혜로운 허수아비나 용감한 사자, 마법을 부려줄 뾰족한 모자 없이 다시 홀로 길을 찾아내야만 한다.


냥.jpg


때로 어떤 격려는 너무 부담스럽고, 어떤 위로는 오히려 짐을 얹어준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다른 사람에게 내 고민거리를 털어놓지 못했다. 그런 것이 나의 약점과 빈틈을 드러낼 것 같았다. 내가 사실은 보잘것없고 시시하다는 것을 보여주기 어려웠다. 반대로 너는 잘 할 수 있어, 라는 믿음이나 기대를 얹어주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고민을 말할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이유는, 누군가가 나의 고민이나 사소한 문젯거리에 진심으로 관심을 가질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좁은 방에 온통 어지러운 스크린 톤 같은 고민은 내가 아니라도 누구나 가지고 있는 것이므로, 굳이 그것을 나눌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바로 그런 순간에, 구구절절 털어놓지 않아도 좋은 단호한 믿음과 침묵의 응원이 주는 힘이 있었다. 사람과 나누기 어려운 것을 스스럼없이 펼쳐 보이기에 반려동물만큼 적절한 파트너는 없었다. 경계심 많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운 이 동물이 내 앞에서 배를 다 드러내고 자거나 목덜미를 쓰다듬는 내 손길에 눈을 지그시 감는 것을 보면 문득 가슴이 벅찰 만큼 기뻤다. 단단하고 의심할 여지없는 나에 대한 믿음이 실체가 되어 보이는 듯했다. 그 자체가 하나의 기둥이 되어서 나를 지탱해주었다.


가끔은 그래서 멋대로 생각해본다. 내가 널 좋아하는 것보다도 훨씬 더, 네가 날 좋아하고 있는 것 아닐까 하고. 안으려고 다가가면 휙 자리를 옮겨 딴청을 피우는 건 그저 부끄러움을 타고 있을 뿐이고, 일단 나를 사랑하기 시작했으니 그 마음의 색깔은 앞으로도 변함없을 것이 틀림없다고.


그러니 분명한 건 이 만화가의 앞에 구만 리쯤 놓인 길이라도 그가 오롯이 홀로 걷지는 않으리라는 것. 손끝으로 그려내는 꿈 한 자락을, 만화가의 고양이는 내내 지켜보리라는 것이다.


긴 걸음에 지쳤을 때는 너무 밝고 신나는 멜로디보다, 오히려 마음을 가라앉혀주는 차분한 소리가 초조함에 두근거리는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것 같다. ‘만화가의 사려 깊은 고양이’는 쓸쓸한 목소리 탓에, 비 오는 날 창문을 열어놓고 들으면 더욱 촉촉하게 젖어들 것 같은 곡이다.


고양이의 만화가가 가끔은 책상 위에서 고개를 들고 기지개를 폈으면 좋겠다. 그리고 방의 한 모퉁이에서 잠자코 그를 지켜보는 고양이의 시선을 마주했으면 좋겠다. 그를 무조건 좋아한다고 약속하며 꿈을 함께 걷고 있는 고양이에게 생선 한 토막을 챙겨주며 힘을 얻고, 고개를 끄덕여준 뒤 다시 펜을 사각사각 움직였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내 모든 세상과의 이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