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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Mar 27. 2021

#38 그녀 마음에 덫이라도 심어 놓으리!

- 정적 -

아무리 태평공주가 황권 위에 군림한다는 말을 들어도 그의 손으로 하나뿐인 여동생을 죽이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나,

이제는 고모와 조카를 넘어선 정적이 된 사이. 


둘 중 하나는 결국 죽어야 끝날 것이라면. 그는 아들에게 하루라도 빨리 황제의 자리를 넘겨주고 싶었다.    

  

“소자는 받들 수 없사옵니다!”     


이융기는 무릎을 꿇고 머리를 찬 바닥에 조아리며 눈물을 흘렸다.

그러나 황제는 더 말문을 열지 않았다.      


함원전 문이 열리고 화려한 금빛 장식과 붉은 비단을 끌고 태평공주가 천천히 걸음을 했다. 

조정의 많은 인사가 그녀의 사봉관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스스로 알아서 그녀에게 길을 터주었다.      


“어쩐 일로 공주가 이곳까지 왔는가?”     


태평공주를 보는 황제의 음성은 건조했다.      


“신이 그동안 폐하를 뵙지 않은 불충을 저질렀나이다!”

“공주의 안부야 매일 서신으로 받아 보고 있지 않으냐.”     


이미 그녀의 속내는 뻔히 알고 있었다. 그녀는 매일같이 황제에게 서신을 보내 조정 인사에 관여해왔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본인이 나왔다는 것은 분명 얼마 전에 있었던 양위 문제 때문이리라.      


“장안의 떠도는 소문 중 너무 터무니없는 말들이 들려와 도무지 가만히 있을 수 없사와 이렇게 달려오지 않았겠습니까?”

“오! 그래? 무슨 소문 일꼬?”

“폐하께서 양위를 한다는 소문이 돌고 있사옵니다. 이는 태자의 불효를 만천하에 드러내는 것이 아니겠사옵니까?”     


황제가 했던 말을 장안의 소문으로, 이를 엮어 태자를 그 자리에서 몰아내기 위한 모함이었다.    

  

“짐은 그런 소문을 듣지 못하였구나.”     


황제의 예상밖에 말에 태평공주는 다급해졌다.


“폐하! 그것이….”

“소문이 아니니라! 내가 그리 말하였다.”     


황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태평공주는 풀썩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그리고는 닭똥 같은 눈물을 자리에서 뚝뚝 흘렸다.      


“폐하! 이 못난 누이는 두렵사옵니다!”

“공주는 눈물을 거두라!”

“하면 폐하께서도 태자의 불충을 말하는 이 누이의 충심을 헤아려 주소서!”     


난감한 상황이었다. 중신들이 모두 보는 앞에서 그녀를 끌어낼 수도, 그녀의 말을 들어줄 수도 없었다.      


“양위는 없었던 이야기로 하지! 그러나 지금부터 태자에게 감국을 명하노라.”     


눈물을 흘리던 태평공주의 안색이 사납게 변했다. 

그러나 이내 표정을 고쳤다. 저를 봐서 한발 물러섰으니 여기까지가 선임을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적당한 선.      


“현명하신 판단이옵니다. 폐하!”

“망극하옵니다! 폐하!”     


그녀가 황제를 향해 고개를 숙이자 좌우의 모든 대신이 그녀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황제는 속으로 쓴 침을 삼켜야 했으나. 이것이 지금의 현실.      


평강리로 돌아오는 태평공주의 심사는 있는 데로 뒤틀렸다. 태자에게 감국이라니. 

애초에 양위 문제를 갖고 나올 때부터 예상해야 했다. 


어쩌면 황제의 목표는 태자의 감국이 아닐까. 양위는 그다음이다. 황제가 한 발 내 준 것 같으나 결국 그는 물러나지 않았고, 자신이 한발 뒤로 물러난 꼴이 되고 말았다.      


“안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월루의 문지기가 그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태평공주는 귀찮은 표정을 지었다. 오늘은 또 누가 얼마만큼의 재물을 들고 올지 이제는 관심도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가 방문을 열었을 때 마주친 여인은 뜻밖의 인물이었다. 

절대로 이런 교방에는 절대 얼굴을 들이밀 것 같지 않은 여인.      


태평공주가 평강리에 월루를 차린 이유는 단 하나였다. 

찾아오는 귀부인을 상대하지 않고 그들의 남편들을 편하게 만나기 위해서. 


태평공주는 여인들의 아첨이나 아부에는 관심이 없었다. 

나이를 막론하고 조정의 대신들이 줄지어 찾아와 제 발아래 머리를 조아리는 것. 

그것이 정치고, 진정한 그녀의 힘이었다. 


딱히 월루는 기루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곳이었다. 그녀만을 위해 연회를 하고 공연을 하는 곳. 술을 팔지만, 조정 대신들의 은밀한 만남의 장소였다. 


그러나 이 평강리에 대부분 고급 기루들이 모여 있어 고관대작들의 귀부인들은 발걸음을 하지 않았다. 오로지 그녀들의 남편들만 드나들 뿐이었다.


그런데 지금 제 눈앞에 있는 여인은 부여 휘였다.   


“곧 왕비 책봉을 받아야 할 귀한 분께서 어찌 이런 곳에 다 발걸음을 하셨습니까?”     


태평공주는 대놓고 불편한 내색을 보였다.      


“공주께서도 이리 계시 온데 소인이 오지 못할 이유라도 있습니까?”     


태평공주에게는 그날의 기억이 아직도 불편하게 남아 있었다. 

일반 아녀자들과는 다른 사람이니 대하는 것도, 마주하는 것도 껄끄러웠다. 


게다가 그녀는 지성의 여인이었다. 

지금, 괵왕과 사이가 틀어지는 것은 보기 좋은 상황은 아니었기에, 최대한 불편한 기색을 내보이지 않으려 했으나. 애초에 그녀는 그게 불가능했다.      


“그래! 이 누추한 곳까지는 어쩐 일이시오?”

“공주께서 이곳에 계신다기에 인사를 드리러 왔습니다.”     


태평공주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인사라고? 순서니, 예법을 그렇게 따지는 여자가 어쩐 일로 제 발로 온 것이 영 마뜩잖았다.      


“이거 영광이로군요!”


태평의 말꼬리에 빈정거림이 가득했다. 


“황공하옵니다.”

“그래요! 비께서 예까지 오신 건 분명 용무가 있어서겠지요?”

“용무랄 것이 있습니까? 평소에 꼭 이런 기루에 와보고 싶었습니다.”  

   

기루!     

태평공주의 한쪽 눈썹이 한껏 추켜졌다. 


“공주께서 무얼 잘못 알고 계신 거지요. 기루라니! 말을 삼가세요!”

“송구합니다.”     


의외로 고분고분 태평에게 고개를 숙이는 휘였다.      


“그래! 장안 구경은 실컷 하셨소이까?”

“어디 하루 이틀 볼 수 있겠습니까? 이리 규모가 크고 웅장한 도시인 줄 몰랐습니다.”

“후후! 그렇지요. 어디 대당의 수도를 감히 견줄 만한 곳이 있겠습니까?”

“공주마마의 말씀이 옳습니다.”     


‘지금 뭐 하자는 거야?’     


태평공주는 불안해졌다. 황제 앞에서도 떨지 않는 그녀인데. 

이상하리만큼 이 여자 앞에만 있으면 불안감이 엄습해왔다.      


“유모께서 왕부를 나가셨다고요?”


그녀는 마치 처음 듣는 말처럼 말끝을 올렸다. 


“정확히 말씀드리면 끌려 나가셨습니다.”   

  

태평공주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다시 여유 있게 잔을 들었다.      


“무진 그 아이가 왕부에서 끌려 나갈 일이 있습니까? 지성의 누이를 구해냈던 여인인데?”

“반대로 왕부에 큰 위험을 끼치기도 하였습니다.”

“오호! 무슨 말씀인지.”

“그동안 왕부의 내부의 일을 밖으로 발설해 왔던 것이 이번에 발각이 되었지요.”

“그래요? 누가 감히 그런 일을 벌인단 말입니까? 간이 배 밖으로 나오지 않고서야….”

“그래서 말입니다.”     


휘는 짐짓 차를 마시며 딴청을 부리는 척했다.      


“혹시 공주마마께서는 아는 것이 있으신지요?”

“흠…. 무슨 연유로 묻는 것인가?”

“소인은 장안의 모든 소문은 평강방에서 나온다, 그리 들어 알고 있사옵니다.”   

  

태평공주의 손이 미약하게 떨리는 것이 보였다. 

재상으로 등극한 원진을 제 사람을 만들지 못했고, 지성에게 후궁으로 들이려던 모든 계획도 현재는 모두 무산됐다. 그러고 보니 일이 틀어진 것에 원인은 모두 이 여자 때문이었다.      


“허면, 비께서는 괵왕이 후궁을 들이지 않는 이유에 대해서 어찌 생각하시오?”

“후궁을 들이는 것은 왕부의 일이니, 공주께서 관여하실 일이 아니옵니다!”


탁! 태평공주가 신경질적으로 용 피선을 접었다.      


“황실의 혼인을 두고 관여하지 말라! 이 무슨 무엄한 언행인가?”


그럼에도 휘는 그녀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황실의 혼사는 폐하와 황후께서 관장하시는 일이지요.”    

 

이는 곧, 황제 위에 군림한다는 그녀의 존재를 단번에 무시하는 말이었다. 황제가 할 말이지 네가 할 말은 아니라고 꼬집고 있었다.  태평공주는 속이 탔다. 앞으로 자신이 하는 모든 언행에서 왕부의 일은 언급하지 말라는 무언의 경고 같았기 때문이었다.      


“후궁의 문제는 두고두고, 그대의 발목을 잡을 것이오. 왕비로서 그대의 부덕이 제일 먼저 오르내릴 것이니!”

“그전에 그동안 왕부와 해왔던 수많은 파혼에 대해 먼저 설명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태평공주는 정말로 당황했다.

지성의 반복된 파혼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될 역린이었다. 위후를 몰아내기 위해, 저와 지금의 황실이 권력을 잡기 위해 그녀는 지성에게 수없이 희생을 강요했다. 


게다가 그를 기어코 위황후의 여동생과 혼인을 치르게 하지 않았던가.      

태자의 위세를 꺾기 위해 사력을 다하고 있을 때였다. 절대 괵왕의 칼이 저에게 향하게 둘 수는 없었다.     


“그야 괵왕이 정할 문제니. 우리는 그저 지켜보면 되는 것이겠지요. 이리 비께서 본궁을 먼저 찾아와 주셨으니 아주 좋은 것을 보여드리리다!”   

  

태평공주는 쥐고 있던 용피선을 손으로 탁! 쳤다.      

그러자 마치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안쪽 방문이 열리며 악공들과 무희들이 쏟아져 나왔다. 


눈에 익숙한 의복과 악기들.      

고구려와 백제 음악은 현재 당황실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귀족들이 즐기는 삼대 예악에 들어있으며, 특히 이들이 추는 호선무는 비록 규모는 작을지언정 그 춤사위의 화려함을 따라갈 수 없었다. 중종은 이들의 호선무의 유행을 사그라지지 않자, 나라를 망치는 요악이라 일컬어 한때 금지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미 평민들에게까지 퍼진 것을 금지한들 들어먹을 턱이 없었다. 

정변이 일어난 후에도, 이들의 예악은 다시 황실에 자리를 잡았다. 음악을 사랑한 황제 덕분이었을까. 이들의 음악은 이로부터 당이 멸망한 이후에도 이백 년가량 궁중 예약으로 남아 있었다.      


맑은 청동 북이 그 시작을 알렸다. 


둥! 둥! 둥!

화려한 리듬에 맞추어 여인들의 화려한 군무가 시작됐다. 군무를 보는 휘의 눈이 어둡게 흐려졌다. 백제 왕실에서나 볼 수 있는 군무였다. 분명 이들을 가리킨 스승들은 사비나 웅진에서 예약을 담당하던 이들이었을 것이다.      


휘는 속이 울렁거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어두워지는 휘의 표정을 보며 태평공주는 활짝 승리의 미소를 지었다. 아까까지 황궁에서 있었던 체증이 쑥 내려가는 것 같았다.      


매화독이 그녀를 죽일 수 없다면, 그녀 마음에라도 독을 심어 놓으리.      


“어디 불편하시오?”

“아닙니다!”     


휘는 억지로 어두웠던 표정을 지워냈다. 


“공주의 향수를 달랬으면 하는 마음에 특별히 준비한 것이라오!”


어차피 춤을 청하는 것은 그녀였으니 제가 잘못한 것이었다. 설마하니 백제의 궁중 예악을 기루에서 볼 것이라는 예상하지 못했다.      


어쩌면,      

자신이 올 것을 알고 미리 준비해 둔 덫일 것이다. 휘는 입술 안 쪽을 지그시 깨물었다. 

군무가 점점 절정으로 치닫고 있을 때 여인들 사이로 금빛 가면을 쓴 남자가 춤을 추며 무대 중앙으로 들어왔다.  그가 빙그르르 무대 주변을 돌자, 유려하고 섬세한 그의 손끝에서 빛이 떨어졌다. 느릿한 걸음으로 그가  점점 그녀에게 다가왔다.      


휘의 얼굴이 서서히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가면 너머로 보이는 남자의 귀걸이가 유난히 반짝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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