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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달가는 물고기 Mar 27. 2021

#42 보이지 않는 출구

- 태평궁에 갇히다-

지성은 홍비와 함께 아무 소득이 없이 왕부로 돌아왔다. 

돌아온 지성은 내내 말이 없었다. 극도의 긴장감에 홍비와 찬비도 내내 그의 옆에서 말없이 서 있었다.      

월루의 잿더미까지 모두 뒤졌다. 


평강리 모든 기방과 주점, 객잔까지 샅샅이 훑었다. 

그러나 아무것도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묵철 그가 있을 곳은 한 곳밖에 없으리라.      


“태자 전하 드셨습니다!”     


지성이 대답하기 전에 이융기는 지성이 있는 회랑으로 다급하게 걸어 들어왔다.      


“왕비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태자의 말에 지성은 대꾸하지 않았다.      


“평강리는 다 뒤져서라도 데려왔어야지!”

“없습니다.”     


지성의 목소리에 절망감이 담겼다.    

  

“그렇다고 왕부로 돌아온 것이냐!”

“묵철이 데려간 듯합니다.”


지성은 마른세수 하며 대답했다. 


“묵철!”     


이융기는 탁자를 내리치며 소리를 질렀다. 

갑자기 튀어나온 이름. 돌궐의 가한 묵철, 그는 다시 당과 혼인 동맹을 요구했다. 매년 변방에서 전쟁을 치러야 했던 당은 그의 요구를 들어주기로 했다. 


곧바로 그는 사신으로 왔던 화봉요를 따라 제 아들을 함께 보냈다. 그런데 그가 지금 장안에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때 죽였어야 했거늘.”

“그가 있는 곳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의 아들이 어사대부 화봉요와 함께 돌아왔다. 있을 곳은 하나밖에 더 있겠느냐?”     


화봉요는 태평공주가 들인 사봉관. 

태자 또한 지성과 같은 생각을 하는 듯했다.      


‘태평궁!’


태평궁과 월루는 전각이 가까이 있지는 않았지만 역시 태평궁의 내밀한 부지였으니, 예상할 수 있는 곳은 역시 그곳뿐이었다.      


“감히, 괵왕비를 납치를 하다니 간이 배 밖으로 나온 놈이구나!”     


이융기는 털썩, 자리에 주저앉았다. 월루에 불을 내는 일은 큰 위험을 감수하고 벌인 일이었다. 조정은 이미 그녀의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태평공주는 월루를 만들어 기녀들과 무희들을 이용해서 장안에 유언비어를 퍼트렸다.      


 민심은 이미 그녀를 희대의 악녀로 비판을 하면서도 한 편으로 태평공주를 두려워했다. 그녀는 이러한 민심을 이용할 줄 알았다. 자신을 측천무후를 이은 여제로 인정하는 분위기를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비어를 퍼뜨리며 황제를 압박했다.     


여덟 명의 재상 중 다섯 명은 제 사람들이었고, 조정은 사봉관들로 꽉 차 있었다. 이제 태자의 폐위만 이루어진다면 그다음은 굳이 나서지 않아도 저절로 이루어진 일들이다.      


그래서 참 다행이지 않은가. 

때마침 나타난 이가 묵철이라는 것이.      


“그래!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으십니까?”     


묵철과 그의 아들 아사나양아지는 태평궁에서 머물고 있었다. 

전날 밤, 그 난리를 겪고도 그녀의 얼굴에는 피로함이 보이지 않았다.    

  

“공주마마의 보살핌으로 부족함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당의 관대를 입은 묵철은 태평공주를 향해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지난밤 월루에 불이 일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묵철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태평공주는 살짝 불편한 듯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니 말입니다.”

“범인은 잡으셨는지요?”

“흠….”     


태평공주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가한께서 어젯밤 그곳에 계셨습니까?”

“그럴 리가 있습니까? 소인은 어제 아들과 오랜만에 술을 한잔했기에….”     


턱! 태평공주가 거칠게 용피선을 접으며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감히! 그대가 나를 기만하는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마마!”     


태평공주의 호통에 묵철은 고개를 숙였다. 고개를 내린 그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그대가 무엇을 하든, 관심은 없네만! 내 집에서 일어나는 일은 용납하지 않겠소!”    

 

 묵철을 내려다보는 그녀의 얼굴에는 많은 감정이 숨어 있는 듯했다.      




휘는 눈을 번쩍 뜨였다. 높은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리에서 일어나자 재빨리 주변을 살폈다. 


투박한 탁자와 침대가 전부인 공간 한가운데에는 화로가 뜨거운 열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녀는 의식적으로 손을 갖다 댔다. 그의 아이를 가졌다. 생명을 잉태한 기쁨을 느끼기도 전에 이렇게 갇히는 신세라니.      


미친 듯이 저를 찾을 지성을 생각하니 한숨부터 나왔다. 

밖에서 인기척이 들리고, 휘는 머리를 더듬어 머리꽂이 하나를 뽑아 소매에 숨겼다.      

덜컹거리며 문이 열리고 음식을 담은 쟁반을 든 시녀 하나가 들어왔다.      


“일어나셨군요.”     


시녀는 쟁반을 조심스럽게 내려놓은 뒤돌아서 나가려 했다.

휘는 나가려는 시녀 앞을 막았다.      


“여기가 어디냐!”

“,..,,”     


여자가 말을 하지 않고 그녀를 지나치려 하자, 휘는 그녀를 붙잡았다. 

열린 문 너머로 잘 정돈된 정원이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저에게 이리하셔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시녀는 잠시 멈칫했으나 가볍게 무릎을 꿇어 고개를 숙인 뒤 그녀를 지나쳤다. 

천천히 닫히는 문 너머로 깊은 숲 위로 높게 솟은 대명궁의 황금색 지붕이 언뜻 비쳐 보였다. 

대명궁 지붕이 이렇게 잘 보이는 곳이라면 장안에서는 한 곳뿐이었다.


휘는 자신이 지금 태평궁 후미진 곳 어딘가에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아챘다. 

막다른 골목,

태자는 월루를 태워버렸고. 

태평공주는 묵철을 이용해 자신을 이곳에 가뒀다.    

  

버젓이 관복을 입은 묵철을 이곳에서 만나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태자와 태평공주, 이 둘의 소리 없는 전쟁은 서로를 끝도 없이 구석으로 몰고 있었다. 


이 전쟁은 반드시 둘 중 하나가 죽어야 끝이 날 것이다. 태평공주는 저를 붙들고 괵왕의 병력을 손안에 쥐려고 들 것이다. 휘는 그렇게 쉽게 태평공주의 손안에 잡혀줄 생각이 없었다. 


게다가 손을 잡은 상대가 묵철이다. 

이 사실은 태평공주는 절대로 부여 휘를 살려서 내보낼 마음이 없는 것이었다. 

묵철에게 쥐도 새도 모르게 끌려가거나 아니면 진짜로 죽어서 나가거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열리지 않았던 왕부의 육중한 정문이 열렸다. 

그리고 장안의 여인들이 가장 보고 싶어 하는 얼굴, 괵왕 이지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나로 깔끔하게 올려 묶은 머리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부드럽게 일렁였고, 유난히 밝은 갈색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빛을 떨굴 것 같은 안광이 서려 있었다. 


붉은 갑옷은 그가 수도방위 총책임자로의 입지를, 팔목의 금빛 아대는 황족으로서의 위엄을 불러일으켰다.

많은 사람이 왕부 주변으로 몰려들었다. 무주 이후 단 한 번도 괵왕부의 정문은 열린 적이 없었다. 그가 일부러 사람들이 볼 수 있게끔 중앙문으로 나온 것은 그의 의지를 표명하는 것이었고, 그가 앞으로 행보에서 어떤 선택을 했다는 의미도 있었다.      


지성은 부하들과 말을 타고 곧장 대명궁으로 향했다.      


“괵왕 지성이 황제 폐하를 알현하옵니다! 만세! 만세! 만만세!”     


예종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반겼다. 

괵왕 이지성.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자신의 위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황궁보다는 변방이 좋다 하였고, 조정의 정치보다 대리사 감옥이 더 편하다 했던 인물이었다. 

태자에게는 더없이 필요한 인물.      


“어서 오너라!”     


칼을 차지 않았지만 완전한 무장의 모습으로 함원전으로 들어온 그를 예종은 찬찬히 바라보았다.      


“괵왕 이지성, 폐하의 부름을 받고 왔사옵니다!”     


지성과 태자는 가까운 사이였다. 그럼에도 정치적으로 그동안 엮이지 않았던 이유는 태평공주와 태자 사이에서 선택을 강요받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주저할 필요가 없었다. 부여 휘,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태평공주를 향해 칼을 꺼내 드는 것도 마다하지 않을 생각인 것이다. 더구나 내 아이를 가진 아름다운 나의 비!     


“나는 태자에게 양위할 생각이다.”

“예! 폐하!”     


황제의 단호한 음성에 지성은 가만히 고개를 숙여 대답했다.      


“너는 어찌 생각하느냐.”

“저는…”     


지성이 얼굴을 들어 인자한 황제의 눈길과 마주했다.      


“괵왕 이지성은 폐하와 그 보위를 이으실 태자 전하의 편에서 목숨을 다 바칠 것입니다!”

“무엇보다 괵왕의 선택이 중요한 것, 참으로 고마운 일이네.”

“황공하옵니다! 폐하!”

“양위를 하면 아마도 태평공주의 편에 있는 이들이 군사적 움직임을 보일 것이다.”

“대비를 게을리하지 않겠나이다"

     

고개를 숙여 공수하는 지성을 예종은 물끄러미 보기만 했다.      


“못난 놈이지만…. 잘 보아 다오.”

“말씀을 거두어 주십시오.”     


지성은 황제가 앉은 단상을 향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래, 왕비의 소재는 파악하였느냐?”

“짐작되는 곳이 한 군데 있사온데….”

“역시 태평궁이로군….”

“망극하옵니다. 폐하!”     


황제의 얼굴이 점점 침울하게 굳어갔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네가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것을 다 동원하여 비를 찾으라!”

“황은이 망극하옵니다! 폐하!”     


함원전을 나오는 지성의 낯빛은 어둡고 딱딱히 굳은 시선은 내내 바닥을 향해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던 우림 총관 갈복순이 거친 목소리로 지성을 쫓아왔다.      


“전하! 태자 전하께서….”

“나는 지금 태평궁으로 갈 것이다.”

“예? 이렇게 무작정 쳐들어갈 수 있는 곳이 아니지 않습니까? 만일 들어가서 찾지 못하면 어쩌시렵니까? 일단 태자 전하를 만나서…. 어이쿠!”     


갈복순을 앞질러 가던 지성이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달리다시피 그의 뒤를 따라오던 갈복순은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그의 등에 코를 박고 말았다.    

 

“태자께, 절대 나서지 마시라 일러드려라!”     

지성은 큰 보폭으로 빠르게 그의 시야에서 사라져 버렸다.      




휘는 갇힌 신세였지만 그녀에 대한 대접은 후했다. 

매일 좋은 음식이 나왔고, 그녀가 원하는 차를 마실 수 있었다. 시녀들이 따로 드나들지 않았다. 그러나 늘 하던 데로 주변을 정리하는 것은 그녀의 일과였다. 모든 일이 끝나면 조용히 침상에 누워 천장 가까이에 있는 좁은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나 달빛을 관찰했다.      


‘차라리 광이나 헛간 같은 곳이 탈출하기 더 편할 텐데.’     


아무리 둘러보아도 나갈 구멍이라곤 굳게 닫힌 철문과 높은 천장 가까이에 있는 작은 창뿐이었다. 며칠 동안 주변을 정리하면서 저 작은 유리창을 열어보려 무던히도 애를 썼지만 깨지 않는 한 저 창을 열 방법은 없어 보였다.     


“왕비께서 불편한 것은 없으시오?”     


육중한 문이 열렸다. 

붉은 비단 적삼과 속살이 훤히 내비치는 나피삼을 걸친 여인이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태평공주의 말투는 마치 손님이라도 챙기는 듯 부드럽고 나긋했다.      


“불편함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휘는 태평공주 쪽을 보지도 않고 차갑게 대꾸했다.      


“훗!”     


휘의 대답에 태평공주는 용피선을 들어 살포시 웃었다. 고분고분하면 괵왕비가 아니지.      


“왕비의 불편함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소.”

“아! 그렇군요.”


휘는 무심하게 고저(高低) 없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탁자에 앉아 조용히 차를 마시는 그녀 곁으로 태평공주가 다가왔다. 

태평공주가 손짓하자 따라왔던 시녀가 조용히 차가 담긴 다관을 내려놓았다.   

   

“이리 오셔서 함께 차나 드시지요! 그동안 말할 사람이 없어 적적하였습니다.”   

  

휘는 태평공주가 가져온 다관을 기꺼이 받으며 반색했다.      


“그런데 어째서 괵왕부가 조용하네그려. 분명 비를 찾겠다며 나를 찾아와 으름장을 놓을 만도 한데요!”

“저도 그것이 서운하던 참이었습니다”     


휘는 이 궁의 주인을 보며 서운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태평공주는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보자 입매를 비틀었다.      


‘역시 마음에 들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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