ㅡ 누군가의 침입
“각희야!”
“....”
“각희야?”
“....”
능글거리는 이 승유의 목소리가 가까이 다가오자, 각희는 서둘러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손목에 새겨진 법구의 의미를 알아차렸으니, 저 사내와는 더 이상 엮이는 것이 좋지 않다 판단했기 때무느이었다
그러나
그는 내내 말이 없는 채, 일정 간격을 두고 각희의 뒤를 따라왔다. 그녀가 뛰면 그도 뛰고, 그녀가 자리에 멈추면 그도 자리에서 멈췄다.
각희에게 처음 말을 붙인 것도 그들이 험난해 보이는 숲길 입구에 다다랐을 때였다. 이 승유는 뒷짐을 지고, 성큼 앞서 걷다가 하늘 꼭대기에 닿을 만큼 높은 절벽을 올려다보았다.
“정말 이 흉 산을 오를 생각이냐?”
그는 한참을 올려 보다 어디가 불편한 듯 눈살을 찌푸렸다.
“불편하면 따라오지 않으면 될 것 아닙니까?”
각희는 빈정거리듯 대꾸했다. 누가 오라한 적도 없는데 굳이 따라다니는 것이 내내 걸리적거렸다.
"네가 가는 길을 내 어찌 마다하겠느냐. 기특해서 그러지."
그는오히려 능글맞은 눈 웃음을 지었다. 각희는 혀를 내두르며 고개를 저었다. 화를 내면, 화를 내어 좋다 하고, 욕을 하면 욕도 잘한다 하며 칭찬했다.
화도 내어 보고, 어르고 달래기도 해 보았으나, 그는 작정한 듯 그녀 옆을 집요하게 쫓아 왔다. 그렇게 옥신각신하며 그 둘은 함께 응봉의 입구에 다다랐다.
“왜 내가 데려다 준다는 좋은 곳을 마다하고, 이 험한 곳을 가는지 이해할 수 없구나.”
대문을 나선 순간부터, 알 수 없는 힘이 응봉으로 그녀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불길하고 낯선 이 산의 기운이 두려웠지만, 그 안에 자신이 잃어버린 무언가가 있을 것 같다는 직감이 발걸음을 멈출 수 없게 했다
이 승유는 새초롬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여인을 꼼꼼이 관찰했다.
그의 눈에도 각희는 보통의 평범한 여인은 아니었다. 살아있는 자의 영도 죽은 자의 혼도 느껴지지 않는 말 그대로 껍데기처럼 보이는 여자였다.
물론 새타니로 쓰기에 이 보다 더 좋은 도구는 없었으나. 그 안에는 또 다른 것이 있었다.
자신도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그 깐깐한 비구니가, 절대 악귀 따위와는 말을 섞지 않겠다 딱 잘라 말했던 그 고집불통 지장법사가 이렇게 순순히 자신이 원하는 것을 내어줄 리가 없었다.
때문에 눈 앞에 나타난 그녀를 섣불리 잡을 수도 또 놓을 수도 없었기에. 그는 일단 지켜 보는 쪽을 선택하기로 했다.
자신에게 어차피 시간은 많으니까.
각희의 뒤를 따르며 이번 일을 찬찬히 되짚었다. 그 날은 과시를 마치고 편한 마음으로 집에 갈 준비를 하던 저녁, 갑자기 방문밖에서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렸다.
“이보게 장의! 뭘 꾸물거리고 있는 건가? 어서 이곳을 빠져 나가시게.”
“무슨 일인가?”
문이 벌컥 열리며 방 동기인 여사훈이 사색이 된 얼굴로 뛰어 들어왔다. 하지만 이 승유는 그를 쳐다 보지도 않고, 느긋하게 짐을 싸며 대꾸했다.
“역모일세!”
“역모?”
“누군가 한 밤중에 주상을 모살 하려 했던 모양일세.”
“그래서?”
역모로 몰렸다는 말에도 이 승유의 얼굴에는 놀란 기색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뜻밖의 반응에 사훈은 울상을 지었다. 그는 앉지도 서지도 못하고 안절부절했다.
“그런데 그것이....”
사훈은 하기 힘든 말을 꺼내기라도 하는 것처럼 말을 끌었다. 오히려 그의 침묵이 참기 힘들었다. 이승유는 짜증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자네 집안이 연루 되었네.”
“그런가?”
사훈은 청천벽력 같은 상황에서도 덤덤히 고개를 숙이고 뭔가를 생각하는 이승유가 답답했다. 사훈은 불안한 눈으로 밖을 살피며 엉덩이를 들썩였다.
“자네 아버지가 지난 밤 전하께 참의 이선규에 대한 상소를 올렸다는군.”
참의 이선규. 지금의 주상은 방탕한 혼군이다. 한 달 전 궁에 피바람이 불어 여러 사관들이 목숨을 잃는 사화가 일어났다. 조정에서는 이를 바로잡기 위해 홍문관의 참의들이 나서 왕에게 간언을 했으나 그 모두 그 자리에서 참살을 당한 사건이 있었다.
“으흠. 그런데 왜?”
“왜라니? 지금 이럴 때가 아니라니까.”
옴짝하지 않고 생각에 잠긴 이 승유를 사훈이 억지로 일으켰다. 그는 자신의 큰 도포자락으로 승유를 감싸며, 서둘러 방 밖을 살폈다. 하지만 이승유는 호들갑스러운 사훈을 여전히 못마땅한 눈으로 쳐다 보았다.
“지금 더 말할 시간이 없네. 의금부에서 지금 이리로 오고 있다고.”
사훈은 방안의 작은 쪽문을 열고 다시 밖을 살폈다.
“일단 큰 불은 피하고 봐야지. 나중에 반촌에 거처를 마련할 터이니. 잠잠해지거든 계명사로 서신을 남기게. 빨리.”
그에게 떠밀리다시피 쪽문 밖으로 몸이 반쯤 나갔을 무렵. 우당탕 소리가 나며 성균관 사립문이 부서지듯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장의, 이승유는 어디 있느냐?”
“역적 이승유를 추포하라!”
‘어떻게 내가 그 기척을 몰랐을까.’
이승유는 오히려 그 누군가의 기척을 몰랐다는 것이 더욱 불편했다. 분명 무엇인가 나타났다.
자신에게 기척을 숨길 정도면 앞으로 상대하기 까다로운 존재가 이곳에 있다는 말인데... 역모니 의금부니 그런 것들 따위는 그의 관심사가 아니었다.
애초에 그를 가둘 수 있는 이도, 목숨을 앗을 수 있는 이도 이 세상에는 존재할 수 없으니 말이다. 단, 참을 수 없는 것은 단 하나. 침입자의 존재를 자신이 몰랐다는 것. 그것 뿐이었다.
그 사실에 이 승유는 이상하게 설레고 있었다. 이렇게 기대 반 호기심 반으로 집으로 돌아왔을 때, 그가 본 것은 풍비 박산이 난 집 안에 태평하게 돌아다니고 있는 여인 하나 뿐이었다.
‘저 아이 때문이었나?’
때마침 지장 법사가 보냈다는 각희가 나타났다. 그녀가 어떤 마음을 품고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을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지장이 보냈건 보내지 않았건, 그녀는 앞으로 이 승유, 자신이 소중히 키워낼 그만의 새타니가 될 것이니까.
이러다 다리가 부러지지 않을까 걱정이 될 때 쯤, 그들은 응봉의 절벽 위에 아슬아슬하게 지어진 작은 초가집에 도착했다. 응봉의 산은 깊은 초목 속에 잠긴 채, 마치 침묵 속에 누군가의 숨소리가 숨어 있는 것 같았다. 가는 길마다 음습한 기운이 스며들었고, 나무들의 그늘 아래엔 검은 그림자들이 꿈틀거렸다.
들어서는 입구부터 가득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과 새소리조차 들리지 않는 산의 침묵이 그들에게 무언의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이 산을 꼭 올라가야 하는 이유가 대체 뭐냐?”
각희와 적당한 거리를 두고 걷던 이승유가 불편한 기색을 숨기지 않고 물었다. 곁에서 내내 칭얼대던 그의 입이 닫힌 것도 산에 들어설 때 부터였다.
"이 산은 함부로 외부인을 들이지 않는 곳인데..."
사실 그녀 또한 딱히 이유를 알지는 못했다. 처음 이승에 발을 디딘 곳이 풍비박산이 난 대가집이었고, 이어서 떠오른 곳이 이 흉산에 자리한 초가집이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의 삶을 대신 살아 준다 했으나, 그 누군가를 알지 못했기에 혼란스러웠다.저를 알아 보는 사람이 있을 줄 알았으나, 그녀의 처지는 구천에 있을 때와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이 남자를 어떻게 떨쳐낼 수 있을까,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그는 그녀가 가는 길을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그저 흥미로워하는 걸까, 아니면 무언가 더 숨기고 있는 것일까?"
"네가 봐야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저 문 인듯 싶구나."
승유가 헛기침을 하며 손가락질을 하자, 각희도 그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았음에도 집 주변은 튼튼한 싸리나무가 둘러져 있고, 오래 되어 보이는 세간살이들은 먼지가 좀 쌓여 있을뿐 단정한 상태로 제자리에 있었다.
“아이고 힘들다!”
각희는 툇마루를 보자마자 그 자리에 쓰러지듯 누워버렸다.
반면, 이승유는 문밖에서 못마땅한 얼굴로 주변을 살피더니, 조심스럽게 문 안쪽으로 발을 들였다.
“계집아이가 겁이 없구나, 이런 흉산에 외딴 집이 의심스럽지도 않으냐?”
“그리 겁이 나시면 돌아 가십시오. 애초에 오라고 한 적 없습니다.”
아무런 대꾸가 없자, 각희는 어기적거리며 일어나 승유를 힐끔 쳐다보았다. 머리에 쓴 갓을 내려 놓고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는 그의 눈빛이 아련해 보였다.
각희는 잡생각을 털어 버리려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정신 차려라. 각희야! 잠시였으나, 그를 사람처럼 보고 있는 자신을 탓했다.그러나 그것도 잠시,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승유의 가슴에 푸른 빛이 도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각히는 눈을 비비며 다시 한 번 부릅떠, 주변을 둘러 보았다.
험준한 산골짜기에 아늑하게 자리 잡은 집 반대편에는 깎아 지를 듯한 절벽이 병풍처럼 펼쳐진 곳이었다.
지난 밤 커라단 만월도 그렇고, 이 산의 요기가 남다름을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각희는 눈앞의 이 승유를 찬찬히 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