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남자의 제안
“훗, 저런 조잡한 우물 따위로 나를 위협하려거든 좀 더 커야겠구나. 하지만..”
돌연 그의 눈에 불이 번쩍한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지금 내 집이 이리 망가져 내 기분이 몹시 좋지 않구나. 허니, 어서 바른 데로 토설을 하거라. 내 결계를 어떻게 뚫고 들어 왔지?”
대답하기 난감했다. 우물에서 나와보니 이곳이었다고 말을 해야 할까? 그러나 각희는 그가 자신의 시선을 집요하게 따라다니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남자는 마당 한 쪽 구석에 있는 우물을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 보았다.
“누가 보냈지?”
“나는 모르오. 우물에서 나와 보니 이곳이었소.”
"거짓말!"
그의 눈빛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각희는 깨달았다. 거짓말은 애초에 불가 한 것.
"지장 법사라 하면 아시오?"
각희는 주저 없이 대답을 했다. 왠지 지장 법사의 이름은 이런 순간에 써 먹어야 할 것 같았다.
“누구?”
그녀의 예상대로 남자의 얼굴이 급히 화색이 돌았다. 길고 하얀 손이 불쑥 각희의 작은 몸을 끌어 당겼다. 뜨겁고 단단한 사내의 품에 머리가 닿자 폭풍 같은 남자의 심장 소리가 들린다.
“정녕, 네가 법사께서 보낸 새타니더냐.”
새타니는 잔인하게 죽은 어린 영혼으로 만든 어린 악귀를 이르는 말이었다. 남자는 그녀를 지장이 보낸 영혼으로 착각하는 듯 했다.
뭐 어딘가 다른 의미로 비슷하긴 하지만...
“내가 어딜 봐서 그리 보인단 말이오?”
구천에서 요귀니 색귀니 수많은 별명을 가진 그녀였으나, 적어도 악귀 취급은 받지 않았다.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는 듯 미소를 띠었다.
“그래, 그래, 악귀면 어떻고 또 아니면 어떻겠느냐? 내 너를 많이 놀랬켰구나, 진심으로 사과하마. 허면, 진즉에 지장이 보냈다 말을 했어야지.”
아까와는 너무 다른 반응이었다. 그가 연신 미안하다며 톡톡 그녀의 등을 두드렸다. 거기다 따뜻한 눈빛까지.
“새타니가 될 아이 하나 보내 달라 그리 청을 드렸었거늘, 결국 지장께서 이리 내 소원을 들어주시는구나. 그 정성에 보답하듯 내 너를 귀하게 써 주마.”
부드럽지만 소름 돋는 목소리가 심장에 착착 감겼다. 빙그레 웃으며 미소를 보자, 각희는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서둘로 고개를 저었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새타니가 아니오. 그리고 악귀따위는 될 생각이 없습니다.”
그녀의 볼멘소리에 남자는 들고 있던 부채를 쫙 펼쳐들었다.
“보통의 천박한 것들과 비교하는 것은 삼가도록 해라. 악귀들 중, 나처럼 품격 있고, 상냥하고, 지적인 악귀를 과거에도 앞으로도 본 적이 없을 터이니.”
그는 푸른 옥색 도포자락을 휘날리며 보란 듯이 빙글 돌았다.
“우아하든 상냥하든 악귀는 악귀지.”
각희는 몇 발자국 뒷걸음질을 치며 귀를 틀어 막았다. 만월의 밤, 악귀의 속삭임에 속아 넘어가기 떡 좋은 날이었다.
“옳거니, 물론 네 말이 옳다. 악귀는 악귀일 뿐이지. 다만!”
“?”
“세상 모든 것이 인간 중심이라, 인간은 자신에게 해가 되면 모두 나쁘다, 악하다 여기는 게 아니겠느냐.”
돼먹지 못한 헛소리. 각희는 콧 웃음을 쳤다. 악귀들이란 존재 자체가 해악한 이들인데 그들에게 분별이 있을 리가 없었다.
“인간들도 못된 짓을 하고, 악귀들도 못된 짓을 하지.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런 게 아니야.”
엉망이 된 집안을 둘러 보는 그의 눈빛이 다시 시뻘겋게 달아 올랐다.
“과정이 전혀 아름답지 않아. 품격도 떨어지고, 그것을 참을 수가 없어.”
악귀라 하나 짙은 눈썹에 살짝 가늘게 올라간 눈꼬리가 꽤 매혹적인 낯짝을 가진 사내였다. 하지만. 못된 짓도 품격 있게 하는 악귀라니 그녀가 지금껏 들었던 것 중 가장 신박한 헛소리였다.
“감히, 내 집 안에 들어와 쑥대밭을 만들어 놓고, 사라졌어.”
그는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너는 오늘부터 나를 모시며 따르거라.”
뜬금없이 불쑥 나온 말에 각희는 아무런 반응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가만히 있다가는 이대로 저 위험한 남자에게 끌려 갈 것 같았다.
“나는 그, 지장 법사께서 보낸 것은 맞는데. 그쪽에게 보낸 것은 아니라오”
부정을 했지만, 말이 통할 것 같은 인사가 아니었다. 어떻게든 저 사내의 손에서 벗어 나야 하는데...
“손목에 연꽃 문신이 있지 않느냐? 그것이 증거야. 손목에 그것이 있는 한, 너는 내 곁을 벗어 날 수 없을 거야."
그는 턱을 살살 문지르며 각희의 손목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뭐요?"
각희의 얼굴이 다시 새파랗게 질렸다. 저자의 손에서 벗어날 수 없다니. 그럴리가 없는데.
"나는 이승유라고 한다. 이름이 무엇이냐? 아차차, 새타니이니 이름 따위가 있을 리가 없겠지. 어디 내가 하나 지어줘 볼까.”
악귀 이승유는 즐거운 일을 생각하듯 뒷짐을 진 채, 마당을 서성였다.
“각희요.”
그녀의 대답에, 그는 뭔가 분하다는 듯 뒤를 돌았다.
“이름이 있었어? 내 분명 이름이 없는 새타니여야 한다, 그리 부탁을 하였거늘.”
펄펄 뛰는 그를 뒤로 한 채, 각희는 손목에 새겨진 연꽃 문양을 한참을 바라 보았다. 그러고는 툭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이 망할 놈의 땡중이! 각희는 저도 모르게 하늘에 떠 있는 커다란 달을 노려 보았다. 처음부터 이 계약은 뭔가 잘 못 됐다.
“이름은 아무리 생각해도 각희가 좋겠습니다.”
이름을 지어 준다면서 한참 고심 끝에 지장법사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지금 누구 놀리십니까?”
각희는 이마를 구기며 볼멘 소리를 냈다. 떠도는 망자들이 붙인 별명이 진짜 이름이 되어 버렸다.
그녀의 불평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지장 법사는 눈을 감았다. 법사가 붉은 글씨로 적은 종이는 공중에서 붉은 연리를 내며 화르륵 타올랐다. 붉은 연기는 허공에서 작은 덩어리로 모여 천천히 각희의 손목에 내려 앉아 연꽃 문양의 각인을 만들었다.
“이게 뭡니까?”
“별 것 아닙니다. 제 청을 들어주신 것에 대한 작은 성의라고 생각하시지요.”
지장은 할 말을 마쳤다는 듯, 옷 자락을 떨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각희는 일어나는 그녀의 옷 자락을 와락 붙들었다.
“뭐가 더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계약이 이렇게 일방적이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부터는 소녀의 조건도 들어주십시오.”
“뭐, 원하신다면.”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제 기억을 찾을 수 있게 해 주십시오.”
각희가 바라는 것은 오직 하나였다. 잃어 버린 기억을 찾아 내는 것. 아무것도 모른 채, 이렇게 무력하게 구천에 남아 있고 싶지 않았다. 불 지옥으로 떨어지던, 인간 세상으로 다시 환생을 하던, 이번에야 말로 반드시 결판을 내고 말리라.
그녀의 요청에 지장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육신을 버린 이가 스스로 그 기억을 잃어 버리는 것은 누구도 관여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게 무슨 뜻입니까?”
“선자께서 스스로 하신 일이란 뜻이지요.”
쾅! 느닷없이 머릿속에서 우레같은 소리가 들렸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쪼개지는 것 같은 통증이 몰려왔다. 각희는 살풋이 눈살을 찡그렸다. 분명 무엇인가 자신이 기억으로 다가가는 것을 막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 이 고생을 제가 사서 하고 있다는 말입니까?”
“때문에 그 기억이 꼭 좋은 것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상관없습니다.”
스스로 기억을 봉인했다면, 그 기억을 풀 수 있는 이도 자신 뿐이라, 퍽 난감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오죽하면 기억을 지웠을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생령귀는 악귀가 될 수 있는 존재들입니다. 아마도 그대가 악귀가 되는 것을 막기 위해 스스로 기억을 지우는 선택을 한 것이겠지요. 또 그 우물은... ”
쾅쾅! 머리에서 마치 폭죽이이라도 터지듯 굉음이 다시 울렸다, 각희는 두 손으로 머리르 부여잡고, 주저 앉았다. 지장 법사는 그 뒤로도 뭔가를 더 이야기 했지만, 내용은 하나도 머릿속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이래도 하시겠습니까?”
그녀의 머리 위로 지장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하겠습니다.”
각희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이제 더 물러 설 곳은 없었다. 이승에서 기억을 잃고 저승에서 조차 받아주지 않는 몸이니, 이곳이 더 이상 돌아설 수 없는 막다른 길이다.
그렇게 잃어버린 기억을 담보로 받은 것이 연꽃 문양의 법구였다. 신변 보호의 목적이라 하였으나, 이제보니 또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이 틀림없다.
“알겠니? 그 법구가 네가 새타니라는 증거다. 게다가 아주 어여쁘게 생긴 우물까지 달고 나오지 않았느냐?”
말을 마친 그는 큰 걸음으로 다가와 각희의 손목을 낚아 챘다.
“악!”
“이크!”
불이 닿듯 타는 듯한 통증에 이승유는 그녀의 손목에서 서둘러 손길을 거두어 들였다. 그 힘에 밀려 각희는 뒤로 자빠졌다. 손목은 여전히 불에 덴 듯 얼얼했다. 그는 통증이 남아 있는 두 손을 쓸듯이 문질렀다. 곧 만족스러운 듯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