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 세대의 몰락
전쟁을 겪은 까쓰통 할배들이나 태극기 부대 입장에서 586 세대 운동권은 진정 빨갱이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이 청년이던 시절엔 윗세대에게 아마 ‘기껏 죽어라 싸워서 겨우 평화를 찾아 대학까지 보내 놓았건만 먹고살만해지니까 이 썌끼들이 배때지가 처 불러서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쓸데없이 머리나 기르고 데모나 한다’라는 소릴 들으며 자라지 않았을까 싶다. 하긴 일제, 북한과 맞서 싸웠던 그들에게 고작 같은 편인(?) 독재정권의 행포 따위가 얼마나 시덥잖게 보였겠나. 더군다나 누구나 자신들의 투쟁이 가장 숭고하게 느껴지는 법이 아닌가.
이와 마찬가지로 586 세대 입장에서 그들 방식대로 데모하지 않는 지금의 2030은 투쟁하지 않는 젊음, 아무것도 안 하는 한심한 것들로 여겨질지 모른다. 겨우 힘들게 싸워 민주화를 이뤄냈더니 쓸데없이 입만 살아서 인터넷에서 헛소리나 지껄인다고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디지털 세대다. 그들이 실탄과 최루탄에 맞섰듯 우리는 개인정보 유포와 악플과 맞서야 하고 그들이 화염병을 던졌듯 우리는 미러링을 하며 그들이 찌라시를 돌렸듯 우린 #해시태그_운동을_한다. 까쓰통 할배들 세대의 시대정신이 독립이고 주적이 일제와 북한, 586에겐 민주화와 박정희, 전두환이었다면 2030의 시대정신은 여성주의이고 주적은 남성 권력이다.
그들의 무용담이 “느그들이 최루탄 맞아 봤어?” “난 서대문 형무소에 1년이나 있었어 인마.” “내 야학 선배는 광주에서 총에 맞아 죽었단다..” “긴급조치 9호 위반으로 고문을 당해서 죽을 뻔했지.” “노엄 촘스키 선생의 ‘미국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이란 책을 읽었더니 글쎄 매국노 취급을 당했지 뭐야?” 였다면 지금 2030의 미래에는 “니들 지인 능욕 당해 봄?”(의뢰인이 구한 일반인 여성의 사진을 나체사진과 합성하거나 야한 표정을 짓는 모습으로 만들어 주는 신종 디지털 범죄) 내 신상이 10년 동안이나 일베에 박제되어 있었다 이기야.” “내 페친분은 남자 친구가 성관계 몰카를 유포해서 자살하셨단다.” “낙태금지법 때문에 전 남자 친구한테 협박을 당해서 죽을 뻔했지.”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더니 꽃뱀 취급을 당했지 뭐야?” 정도가 될 것이다.
나의 아랫세대는 어떨까? 아마 2060년쯤 되면 육체와 물리적 공간이라는 게 더 이상 의미가 없어져 애들이 죄다 인셉션 마냥 하루 종일 눈을 감고 누워있을 수도 있다. 적어도 우리는 아무리 일을 안 해도 밥을 먹거나 쌀 때만큼은 움직이지만 얘들은 그 마저도 안 하고 영양분 농축 캡슐로 대신하거나 대소변 순간이동 장치 따위로 해결할지 모른다. 그럼 우리는 우리의 꼰대들이 그러했듯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서 허송세월 보내는 잉여들이라 혀를 차지 않을까? 그러나 그건 우리 기준일 뿐. 실은 가상현실 안에서 뇌 전체를 해킹당해 일생의 이불 킥 데이터가 전 세계 모든 인류에게 유출된다거나 대머리 변태 아저씨의 엉덩이에 깔리는 생생한 기억을 주입당한다던가 하는 고통을 겪고 있을지 모르는 노릇이다. 이 녀석들의 시대정신은 무엇이 될까? (이들이 과연 존재하긴 할까)
6.25 참전 용사들에게 총상 흉터가, 586에게 정치범 수감 경험이 일종의 훈장이라면 우리 세대의 그것은 디지털 박제, 조리돌림, 신상정보 유출, 악플, 성차별과 성범죄, 가스 라이팅, 데이프 폭력, 유리천정, 2차 피해 등을 이겨낸 경험과 오프라인뿐만 아니라 온라인 사회활동 경험 등이 아닐까 싶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웬만한 훈장은 다 가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미래에 국회의원이 될 몸이라는 뜻이다. 586도 결혼 전까지만 활동하고 그 이후부턴 부동산 삽질을 했듯 난 이미 그에 상응하는 시간만큼의 수난을 겪었고 할 일을 다했으니 앞으로 노인들은 무시하고 어쭙잖게 입 털면서 아랫세대를 착취하며 꽃길만 걸어야겠다. 그래 봤자 아마 내가 죽으면 모두가 날 위해 울어줄 테니 죄책감은 느껴지지 않을 거다. 정말 나의 시대가 오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