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 이후의 인식과 전략
13년 전, 나는 성추행 피해를 겪고 가해자를 고소했다가 취하한 경험이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나를 지속적으로 괴롭힌 것은 단지 그 사건 자체가 아니라, 그 사건을 둘러싼 2차 가해였다. 더 나아가 최근에는, 내가 2차 가해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한 선택을 존중하기는 커녕 오히려 조롱하고 폄훼하는 3차 피해까지 경험하게 되었다. 이처럼 성폭력 피해 이후의 삶은 사건 그 자체를 넘어선 복합적인 폭력 구조와의 싸움이다.
그러나 이러한 고통의 시간 속에서 나는 하나의 능력을 얻게 되었다. 바로 가해자의 심리와 언어 패턴을 조기에 식별하고, 빠르게 거리를 두는 능력이다. 나는 성폭력의 직접 가해뿐 아니라, 2차, 3차 가해 역시 ‘가해의 범주’에 포함됨을 인식하기까지, 그들의 사고방식을 바꾸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약 10년이란 세월을 투자했다.
그 긴 시간 동안 나는 반복되는 관계 속에서 최선을 다해 (사실 본의 아니게) 그들의 공통된 행동 양상을 파악하고 분석해냈다. 그 결과, 이제는 더 적은 시간과 에너지로 문제 인물을 판별하고, 단절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게 되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중요한 사실 하나를 추가로 깨달았다. 바로 스스로를 페미니스트라고 정체화하는 사람일지라도, 실제 행동에서 가해 패턴을 반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이는 정체성과 실천 사이의 간극을 직시하게 해준 중요한 통찰이었다.
만약 내가 그 사건을 겪지 않았다면, 이들에 대한 분별력을 갖추지 못한 채 관계를 지속했을 것이며, 예기치 못한 위기 상황에서 더욱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을 가능성도 있다. 역설적으로, 과거의 피해 경험은 앞으로의 더 큰 피해를 방지하는 감별 능력과 자기보호 전략을 내게 안겨준 셈이다.
물론 나는 앞으로도 3차, 4차, 혹은 그 이상의 가해와 마주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는 그것들이 내 삶의 주도권을 빼앗도록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나는 생존자로서의 경험을 통해, 단단한 경계와 냉정한 분별력을 갖춘 사람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어떤 폭력도 더 이상 내 존재의 중심이 되도록 두지 않을 것이다.
나는 참고 넘기기, 비판, 무시, 설득 등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방식의 대응을 시도해보았다. 그러나 그들은 결코 멈추지 않는다.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사과하지 않는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명확한 결론에 도달했다. 만일 2차 가해를 시도하는 사람이 나타난다면, 그 즉시 그 사람을 삶에서 배제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