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절, 용기와 회피 그 사이

무례함엔 설명도 아까워

by 인과연

프로 손절러. 그게 나의 대명사가 될 거란 생각은 살면서 해본 적이 없다. 그런데 20대 후반부터 30대 초반 사이에 진짜 거짓말처럼 인간관계가 한번 싹 갈렸다. 그것도 전부 내가 자발적으로 한 손절로서.


갑자기 심경의 변화가 생겼냐고? 갑자기가 아니다. 그전에 “지쳤다.”가 맞겠다. 맞춰주기 버겁고 무례한 태도를 응대하는 내 시간이 아깝다고 느낀 게 맞다.


네가 이런 말 한 건 무례한 건데 무슨 의도로 말한 거야? 그런 말 하지 말아 줘 등등의 조율을 할 마음도 사라진 상태. 그런 상태가 되면 나는 손절을 한다.



오랜 친구들을 손절하는 이유도 간단하다. 그만큼 오래 참았으니까. 물론 난 성인군자가 아니니 나도 잘못한 게 있겠지.


난 그걸 일방적인 믿음과 호구 콘셉트로 친구관계를 시작한 내 잘못이라고 본다. 박수는 혼자 치는 게 아니다. 그런 태도로 대해도 괜찮게 행동하니 그런 취급을 받은 거다.


물론 무례한 그들이 잘못이 크다. 친구가 헤헤거린다고 막대하는 게 더 못된 쪽이 맞다. 하지만 그 긴 시간 동안, 긁어 부스럼 만들기 싫고 친구니까 그냥 넘어가자 등의 핑계로 전조 증상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태도 조절을 하지 않은 내 잘못도 존재한다.



한번 받은 상처는 아무는 데에 시간이 한참 걸린다. 하지만 가까운 친구는 만남의 횟수도 잦다. 그게 온라인이든 오프라인이든. 그럼 그 상처 위에 상처가 또 생긴다. 그걸 묵혀둔다. 그게 반복된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 그 자리는 너덜너덜해진다.


그제야 거의 다 파괴된 살점 조직을 움켜쥐고는 “손절”이라는 단어로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난다. 이건 용기일까 회피일까. 내가 하는 방식이지만 옳고 그름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미련한 방식 같은데 나 같은 성향의 사람도 꽤 될 거라고 본다.



이제 와서 그들의 대사들을 하나하나 다 읊고 싶진 않다. 가지각색으로 머리가 아픈 대사들이니. 그런데 그런 사람들이 여러 명이라 그런가 공통점이 하나 있다.


그들은 본인 현실에 굉장한 불만족이 있는 상태라는 것. 비교심리가 극대화된 상태라는 것. 문제는 내가 그런 그들의 꼬여버린 심성과 상황을 해결해 줄 수 있는 지니가 아니라는 거다.



너무 뻔뻔해서 지금 생각해도 어이가 없는 케이스가 하나 있다.


내가 본인 결혼식에 준 축의금 20만 원을, 본인 부모님이 가져갔기에 자긴 내게서 받은 게 없다고. 거기다 본인은 200만 원짜리 유모차를 사야 되기 때문에 내게 축의금 주는 것도 부담스럽다고.


어차피 결혼식장 밥은 맛없을 거니 안 먹고 대신 10만 원 줄게. 그리고 작은 선물 해줄게~라고 선심 쓰듯 말하며 내 얼굴을 쳐다보던 그 당당하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물론 그게 끝은 아니었다. 내 명품 커플링을 보곤 너무 얇아서 별로라고, 자기네도 이거 껴봤는데 여러 겹 아니면 끼면 이상해서 종로 가서 맞췄다며. 왜 그거 했어? 라든가.


서울에서 결혼식 하는 건 교통비 들어서 민폐라던가. 본인 결혼식 때 ktx 타고 내려온 내겐 교통비 안 줘놓고, 자긴 그땐 어려서 교통비문화 몰랐던 거라고. 그러곤 내게 당당하게 교통비는 주지?라고 한다던가.



중학교 때부터 친했던 그 착하던 친구가 맞나, 왜 이렇게 악해졌지? 내가 알던 사람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만 강타했다. 그날의 연타 공격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가 너무 당황해서 말이 안 나왔던 그 상황이 장면으로 기억된다. 적당히 하나만 얘기했으면 난 또 넘어가줬을 텐데, 넘어갈까 봐 독설을 풀었나 싶기도 했다.



만약 그만큼 친하니까 면전에 대놓고 한 얘기라기엔 글쎄. 저게 친한 사이라고 용인이 될 말들인가. 애초에 그런 막말하는 사이도 아니었다. 아니면 내가 서울 산지 오래돼서 속칭 “깍쟁이”가 되어버린 건가. 그날로 손절을 마음먹고 난 그 아이에게서 조용히 사라졌다.


내가 서울 생활을 오래 하며 어릴 적 친구들이랑 자주 못 보니 오해를 사고,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저축 안 하고 다 쓰면서 지내는 일상을 보게 되니 그게 불편을 샀나 그런 생각을 하며 이해해보려고 했다.



그런데 어차피 그런 이해시도는 별로 의미는 없다. 나를 불쾌한 존재로, 시비 걸고 싶은 존재로 한번 인지한 마음이 변하긴 어려우니까. 괜히 사람 마음만큼 어려운 게 없다고 할까.


본인 입장에선 친구라서 막아둔 호감의 장벽마저 이미 무너져버린 상태고 다시 세울 생각도 없으니 어려울 수밖에. 난 이렇게 힘들게 사는데 넌 왜 맨날 편해 보여? 이렇게 느끼게 되니 그렇게 스트레스 포인트였겠지.



예전의 나였으면 편지를 써가며 왜 그러냐고 했을 나였다. 정이 참 많았으니까. 친구라면 평생 가야 되는 줄 알고 집착하던 시절이 남들보다 길었으니.


그런데 그렇게 매번 최선을 다했다 보니 손절에 후회가 없었다. 허망함은 남지만. 평생 갈 친구인 줄 믿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시절인연을 배워가는 거지만.



사람들이 “결혼”을 기점으로 인간관계가 한번 싹 갈린다는 건, 내게도 포함되는 말이었다. 나라고 특별한 사람은 아니니까.


그렇게 멀어지는 관계를 나만 갖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허망하다는 느낌은 지울 수 없었다. 내 호의에 반만 해주면 안 되는 거였니?라는 메아리만 속에서 울렸다.



그럼 프로 손절러로 사는 게 힘드냐고 묻는다면 아이러니하게도 훨씬 삶의 질이 높아졌다. 감정소모는 생각보다 엄청 비효율적이다. 연애를 해도 계속 스트레스 주는 관계는 끝이 안 좋다고 하는데 친구관계라고 다를 건 없다.


둘의 관계에 개선 여지가 있으면 강한 용기를 내서 얘기를 해보는 것도 좋다. 또는 너무나 지키고 싶은 관계라면 한 번쯤은 추천한다.


하지만, 나의 상황처럼 그럴 힘도 안 생기는 관계가 있다. 보통은 이미 썩어서 건드려도 의미 없는 관계. 그럴 땐 나처럼 용기라고 생각하며 회피하듯 손절하는 것도 방법이다.


맞닥뜨려서 얘기해 보는 게 훨씬 커다란 스트레스로 다가올 거라면 굳이 그걸 해야 될까? 란 생각이 들기 때문.



너무 냉정하게 말한 것 같은데, 이렇게 말하기까지 쉽진 않았다. 지금이야 쿨한 척 글을 적고 있지 막상 겪으면 눈물이 다 나기 때문이다.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주니,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읊으면서 아무렇지 않은 냉혈한인 척 글을 쓸 수 있게 됐을 뿐.



그런데 이런 글 백날 읽어봐야 내가 겪어보고 현타도 와봐야 굳은 살도 생기면서 손절러가 되는 것 같다. 모두와 잘 지낼 수 있는 매력과 능력이 있다면 그것도 좋은 인생이다.


나처럼 그게 안된다면 둘 중 취사선택 해보는 것도 방법이다. 아니면 그냥 침묵을 유지하며 다음 기회를 도모하는 것도 괜찮을 수 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관계에 대해서 어디까지 에너지를 쓰고 싶냐에 대해 스스로에게 물어본 다음에 행동하는 걸 추천한다. 안 맞는 거 억지로 하다간 병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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