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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호승 Sep 28. 2022

휴학

휴학을 했다.


누군가에게 저 휴학했어요 라고 하면 대개 이유를 물어보는데, 휴학을 결정하게 된 계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말해주자니 길고 별 재미도 없는 이야기다. 나는 매우 신중한 편이지만 이럴 땐 오히려 즉흥적인 사람으로 보이는 게 편하다. 오랜만에 본 친구들한테는 ‘엇학기인 김에 그냥 좀 놀려고’, 어른들이나 교수님들께는 ‘인턴을 좀 해보려고요’, 춤을 추는 사람들에겐 ‘춤을 더 춰보려고요’. 만나는 사람들마다 그들의 입장에서 최대한 이해가 잘 가도록 간단하게 이야기를 해왔다. (거짓말은 절대 아니었으니 다들 속상해하기 없기) 여기까지 말하면 다들 날 응원해주거나 존중해주었지만, 날 너무 깊게 걱정하거나 부정적으로 보는 분들 앞에서는 ‘세 학기 정도는 휴학할 생각입니다’라는 말은 쉽사리 나오지 않았다.


그럼, 왜 나는 군휴학도 해놓고서 한 학기도 아니고 세 학기를 통째로 놀려고 하느냐. 여기까지 오신 분들에 한해서 내 휴학의 정당성을 나름 입증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울 아부지는 동국대 83학번이다. 동국대에는 동굴부라는 아주 특이한 동아리가 있는데, 아빠가 이곳에 청춘을 갈아 넣었다. 아빠가 회장일 때 자기라도 외국에서 동굴 탐사를 배워와야겠다며 제대 후에 바로 휴학을 해서 유럽으로 떠났다. 비자 구하기도 어려운 시대에 아빠 집이 잘 살았던 것도 아니니, 그냥 정말 개고생을 하면서 몇 달 생존을 하고 왔다고 했다. 하지만 어려움 속에서 그보다 더 재밌고 값진 경험을 했다고 느낀 아빠는 그 이후로도 몇 번의 휴학과 함께 <고생하며 돈 벌기 - 고생하며 여행 다니기>를 반복했다. 어렸을 때부터 이 에피소드를 지속적으로 들어온 나는 아, 대학생이라면 휴학을 몇 년 하면서 여기저기서 다녀야 하는구나 하고 생각하게 되었다.


2. 누나는 알게 모르게 내 정체성에 큰 영향을 줬다. (가끔씩 참으로 미워서 그렇지만) 딱 두 살 터울이라 보고 자란 게 생각보다 많다. 누나는 미대를 나왔는데 미대엔 자유로운 영혼들이 많다고 했다. 그 안에서 누나도 총 2년 휴학 - 이게 누나 과에선 평균이라고 했다 - 을 했다. 나도 바빠서 누나가 휴학하고 정확히 뭘 했는지는 잘 모르지만 그때 사람이 좀 더 밝았고, 휴학을 기점으로 나름의 지혜를 얻어온 것 같았다. 제주도에서 한 달 살기 할 땐 행복해 보였던 사람이 올해 취업을 해서 매일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걸 보고 취업보다 휴학을 먼저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3. 중학교 1학년 때에 같은 반에서 김세훈을 만났다. 둘 다 대치동의 압박 속에서 공부를 나름대로 해오고 있었고, 둘 다 공부보단 음악에 뜻이 있었던 것 같다. 공부를 하러 간 도곡정보 도서관에서 깊이 발굴해 낸 좋은 음악을 추천했고, 주말 아침엔 모여서 좋아하는 노래를 틀고 양재천에서 한강까지 자전거를 탔다. 둘 다 외적으로는 모범생에 가까웠기 때문에 갑자기 음악을 하고 싶다고 말할 용기가 없었다. 이 나라에서 태어난 이상 우선 공부를 하자는 결론에 도달했다. 좋은 대학이라는 일종의 보험을 들게 된다면 그때 휴학을 해서 같이 밴드를 하자고 했다. 내가 멀리 기숙사 학교로 가면서 3년간 떨어져 있게 되었지만 둘 다 그때의 약속 비스무리한 것을 단순히 몇 년 전의 치기로 생각하고 있진 않았다. 둘 다 보험에 과몰입을 한 덕에 좋은 대학교를 한 번에 갔다. 정신없게 재밌는 대학 생활을 즐기고, 난 춤을 추고, 군대를 차례로 다녀오고, 스무 살의 업보를 청산하기 위해 학교를 열심히 다니니 스물넷이 되었다. 그 사이에 나름 음악도 배우면서 좋은 기타와 피아노도 사고, 방향성도 정하고 했지만 실질적인 시작이 없었다. 올해 초에 이제는 정말 물러설 곳이 없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제는 어떻게든 시작해봐야 나이 먹고 후회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고 23년에 같이 학교를 쉬기로 결정했다. 10년 전과 달리 이걸로 밥 벌어먹고 살 수 있을 거란 확신은 없지만, 여전히 하고 싶고 또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4. 친한 중고등학교 친구들을 포함해 내 주변엔 수능을 다시 본 사람들이 많다. 대학이나 시험이라는 목표를 위해서 1-2년 쏟는 것이 당연해진 이 시대에 하고 싶은 거 이것저것 한다고 1-2년 쓰는 게 진짜 아까운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100세 시대라는데 난 98세 시대 해도 큰 차이 없지 않을까?


5. 모든 일에는 타이밍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아무리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지만 상대적으로 좋은 시기가 있는 건 확실하다. 지금처럼 책임은 가볍고 자유로우면서 체력이 받쳐주는 때가 또 올까? 앞으로 무언가 일을 하게 된다면 아무리 길어도 한두 달이 가장 큰 휴식일 텐데 이렇게 핑계 댈 것 없이 하고 싶은 거 다 해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을까? 감사하게도 내가 빨리 사회로 나가서 우리 가족을 책임져야 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가족이 내 선택을 깊게 존중해준다면 휴학을 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   

 

그래서 휴학의 목표는 하고 싶은 거 다 하기다. 밴드도 하고 좋은 사람들이랑 춤도 추고 술도 마시고 돈 열심히 벌어서 여행도 가고… 십 년 후쯤의 내가 ‘아 그때 그거 좀 도전해볼 걸’ 하고 후회하지 않게 하기가 포인트다.


휴학을 결심하고 가장 걱정되었던 건 내가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게 되는 것이었다. 아무리 놀려고 했다지만 4시 취침 - 1시 기상을 일삼거나 휴학 최대 업적이 게임 랭크라면 좀 슬프니까… 그래서 나름 세운 목표는


책 읽고, 영화 보고, 음악 듣고, 전시 보기.

돈 모으기.

짧은 여행과 긴 여행 하기.

매달 글을 쓰거나, 안무를 짜거나, 음악 올리기.

음악이랑 춤 좀 더 깊이 있게 배우기.

<내 삶을 지탱하는 단어 찾기> 같은 슈퍼 N적인 프로젝트 무맥락으로 하기.

영어 공부나 환경 분야 인턴도... 밥은 먹고 살아야지


휴학 화이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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