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인 제작 철학
같은 소재를 가지고 매번 같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같은 소재를 가지고 매번 다른 그림을 그리는 이도 있다. 다른 소재를 가지고 매번 다른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있다. 다른 소재를 가지고 매번 같은 그림을 그리는 이도 있다. 삶에 의문을 가지고 나만의 소재를 선택함에 있어서 질료의 선택권은 작가 자신에게 있어야 한다. 요즘처럼 상품의 껍질만이 존재하고 외피 속에 내재한 기본 철학과 역사가 간과되는 사회에선 간헐적 유행이 의식을 지배한다. 우리는 만족을 모르는 얼굴의 즐거움을 위해 쇼핑을 하고, 책을 읽고, 여행을 가고, 술을 마시고, 친구를 사귀고, 격렬히 육체적 활동을 하지만 내부의 갈증은 더욱 심해진다.
같다는 방식을 제거한다면 같다고 말하여지는 이야기는 다른 것인가? 속을 울리는 본질은 변하고 있는가? 가사와 음역이 달라지는 노래를 꾸준히 부르는 한 사람이 있다. 창법이 다르다고 해서 성대 밖으로 터져 나오는 소리는 과연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인가? 부르는 사람은 다른 말을 하고 싶은 것일까? 다른 배우와 다른 소재로 다른 스텝과 영화를 찍는 사람이 있다. 같은 배우와 같은 소재로 같은 스텝과 영화를 찍는 사람이 있다. 이들이 가진 차별성을 뒤집어놓고 생각해 보자. 작가가 말하는 사상은 ‘다른(difference)’이란 피안을 두어 초점을 맞추지만 표현하는 화면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는가.
자발적으로 말하고 싶은 범위를 벗어나 다른 사람에게 새로운 시각을 전해주는 시점은 언제인가? 계속해서 같은 목소리로 자신을 표현해 왔다면 한 인간의 개성적인 표현이라고 치부하며 위안해도 괜찮을까? 자기만의 스타일이 확립되기 위해선 대중에게 꾸준하게 노출되고 지속적인 작업이 어떤 형상일 것이라고 공감하는 보편적인 인식이 생겨야 한다. 먹고살기도 바쁜데 디자인에 철학을 붙인다는 것이 어리석게 보였다. 하지만 땀 흘리는 노동을 하면서 입는 행위를 통해 과도하게 드러날 수도 있는 속내를 가려야 한다는 것에 동의했다. 벌거벗은 자신을 일차적인 감각에만 의존하여 한꺼번에 보여준다는 것은 보이는 사람이나 보는 사람이나 현실에 집중할 수 없도록 만드는 당혹스러운 사건이기 때문이다. 만드는 사람이 스스로 생각하고 고민하지 않으면 같게 보이는 이야기에 차별성을 가질 수 없다.
카자(CAZA). 황금빛 초원을 힘차게 달리겠다는 사자의 꿈으로 시작한 <예술가들에 의한 창조 예술구역 Creative Art Zone by Artists>. 나는 예술이 존재하지 않을 것 같았던 거친 황무지에서 새롭게 태동하고 있는 거대한 예술 공장의 생산 열기를 느끼며 꿈꾸던 예술을 만들어보리라 결심했다. 우리들은 태어나기 이전부터 물속을 유영할 수 있고 물속에서도 숨을 쉴 수 있는 자립적인 존재였다. 세상과 접촉하면서 시작된 공기와의 소통이 오히려 공기 없이 살 수 없게 했고 사람들과의 만남이 오히려 외로움을 가중시켰다. 자유로운 물고기로 태어나 열망하는 사랑을 좇아 인간이 되기 위해 목소리를 내어주고 비늘을 벗어버린 인어공주는 바다에서 헤엄칠 수도 소리 내어 말할 수도 없다. 문명 앞에서 선 우리들은 혹시나, 어쩌면, 아마도 물거품일지 모르는 희망을 따라 움직인다. 꿈을 만드는 공장장은 자신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직접 대화를 해야 한다. 나는 단순히 현실의 결과물로만 존재하는 사물들을 생활 속에 산재한 이야기들과 접목하여 색다른 이야기를 지어내려고 한다. 그렇게 삶과 예술이 한데 어우러진 풀아트(FULLART)를 꿈꾼다.
어린 시절의 나는 지렁이 낙서 같은 그림은 자주 끄적였고 마음속에 콕 박힌 작가나 등장인물의 이름을 동그라미 치면서 끝없는 상상의 세계에서 뛰어놀았다. 친구들과 팔방치기와 땅따먹기를 하며 경찰놀이와 도둑잡기뿐만 아니라 탐정놀이에 진심이었다. 하늘과 가까워질 수 있는 방방이도 자주 탔다. 학교에서 숙제를 다 해놓고 아이스크림 하나 입에 물고 집에 걸어올 때까지 하루종일 길거리에서 사람들과 사물들을 탐색하는 것이 일과였다. 이야기를 좋아했던 나는 친구들 집에 놀러 가서 얼른 집 탐색을 하고선 그 집에 책이 얼마나 많은 지를 보고 재방문의사를 결정했다. 빈 공간에 채워질 그림이 가득할 때까지 기다렸다가 평평한 도화지를 뒤집어 한 무더기 머릿속 낙서를 쏟아내었다. 읽을거리가 없으면 집 근처 책방에서 살았다. 몸을 근질거리게 만드는 책벌레는 작가의 비밀 코드를 전달하는 메신저로 생각했다. 도서관과 도서대여점, 만화방과 헌책방은 흥미로운 놀이터였다. 비디오대여점과 소극장도 비밀 아지트였다. 미로 같던 골목들과 사색이 가득한 거리는 관찰의 박물관이었다. 장난이 가득했지만 마음속에서 반항이 웅크리던 아이는 시간을 거쳐가면서 세상에서 내놓은 옷이 더 이상 맞지 않게 훌쩍 커버렸다.
일반적인 미를 추구하는 디자이너들과 표현하는 의식세계가 다른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설계적인 마인드의 제작자는 현 시대가 부여하는 감성적인 디자이너와 부합되는 개념이 아니다. 아무 말없이 홀린 듯 피리 부는 사내를 따라가지 않겠다고 생각해 놓고선 잊고 있었다. 프로덕션의 개념에 대해 적었지만 돈을 벌어야 하는 직업적인 선택 앞에서 제작자의 마인드에 대해 고민했었다. 상상이 구름처럼 떠돌아다녀도 정작 아무것도 만들 수 없었던 시간, 두 손에 선택권이 쥐어지기 어려웠던 순간을 벗어나 자유로워지면 내면을 표현하는데 집중하리라 다짐했었다. 황량한 허허벌판에서 만드는 것에 열중하는 사람들을 보며 머리가 시원해지는 자극을 받았다. 그 경험이 바탕이 되어 나는 예술가들에 의한 창조 예술구역이라는 개념의 브랜드를 만들었다.
내가 잘하는 것은 무엇이든 만드는 것이다. 처음에는 이상해도 계속 만들다 보면 어느 순간 꽤 괜찮은 모습을 만들어놓는다. 글과 그림, 사진과 영상, 옷과 기계, 사물과 공간. 디자인의 소재와 메이킹 재료는 한정 짓지 않는다. 놓여있는 열 개의 사물들을 없애고 하나로 만드는 기괴한 결합적 본능 때문에 거친 현상을 다듬는 작업이나 혼란한 상황을 정리 정돈하는 청소도 즐기는 편이다. 시간에 놓여있는 대상을 받아들이고 다른 형태로 돌출하는 과정에서 사라지는 현재는 필수적이다.
켜켜이 쌓아 늘어놓은 지난 흔적들을 정리하기 시작한 지 일 년이 넘어간다. 대략 어떻게 배치하고 바꿀지 개념적인 눈대중만 끝낸 상태다. 의식의 서랍을 섹션별로 분리하려면 쉽게 꺼내고 찾아낼 색인과 목차가 필요하다. 제작의 기준점을 시간에 둘 것인지 공간에 둘 것인지 경험에 둘 것이지 인상에 둘 것인지 고민하고 있다. 재료 준비가 끝나면 본격적으로 해체와 조립을 시작하여 모형 설계에 집중해야겠다.
남이 억지로 떠다미는 일을 하기보다는 좋아하는 일을 할 때만큼 스스로에게 유의미한 일은 없다. 굶주린 세월을 지나왔다면 다시 굶주려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그 어떤 기대와 불안을 내려놓고 초심으로 돌아간다. 빈털터리로 돌아가도 무섭지 않다는 사실은 새로운 나를 찾아 나아갈 때 가장 큰 위안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