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직함에서 혼동을 느낄 때가 있다. 디자이너의 발음에서 감지되는 개별적인 인식은 여성적이면서 육감적인 질감을 준다. 내가 추구하는 디자인은 사회에서 규정된 성역할이 주(主)가 되거나 여자나 남자 이렇게 한쪽으로 몰입된 감각보다는 남성과 여성이 조화된 실용적이면서 중간자적인 태도의 간극에 위치한다. 그러나 디자인의 세계에서 이런 모호한 태도를 취하면, 특히 가시적이고 육체적 감각이 몰입된 곳에서는 디자이너가 취하는 방향이 어떤 것인지 대중적으로는 인식이 불가능하다.
'디자이너'가 중성적인 감성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감정과 연관된 '욕망(Desire)'이라는 단어와 연상작용이 발동되어서 그럴 수 있다. 디자이너(Designer)는 'De'와 'Sign'을 하는 사람이라고 끈질기게 결합을 붙여봐도, '내 것이라고 서명을 하는 것'에서 발생한다는 기원을 찾아 부연을 해봐도, 정신적이기보다 감정적이고 육식적인 작용과 맞닿아 보인다.
어렸을 때부터 밤하늘이 좋았다. 별과 달이 숨 쉬는 밤이면 잠을 자기가 아까웠다. 하늘만 바라보고 있어도 별과 달의 움직임 속에서 어둠 위로 흘러가는 시간을 느낄 수 있었다. '디자이어(Desire)'는 원하고 갈망하는 인간의 소망과 연관되어 있다. 현대에서 사용되는 'Desire(욕망하다)'의 기원인, 라틴어 'Desiderare(데지데라레)'는 별, 별자리, 천체를 가리키는 'Sidere'와 'De' ~로부터라는 뜻이 결합되어 '별에서부터 온 소망'을 의미한다. 별자리를 보며 동방박사가 예수의 탄생을 점쳤듯이 천체에 놓인 별은 과거와 미래를 거쳐 현재까지도 연결 짓는 운명적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디자인이라는 용어가 포괄하고 있는 불타는 갈망(渴望)이나 독점적인 소유욕(所有慾), 관능(官能)적인 욕구(欲求, NEED), 육체적인 욕망(欲望)과 같은 감각적인 의미는 14세기부터 사용된 프랑스어 '데지레(Désirer)'에서 찾아볼 수 있다. 르네상스 시기, 인본주의(人文主義 Humanism)에 입각한 인간의 현재적 욕망과 열정을 예술적인 감각으로 전환한다고 가정하면, 인체적인 균형적인 미(美)와 감정의 발산인 정욕의 결합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 의미로 라틴어와 서양의 언어에 근간한 '욕망하다 (Desire)'는 단어부터 서양의 예술 사상적인 발전에 근거하여 사용되었기 때문에 정신적인 발현보다는 육체적인 감각의 감도와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한때는 욕망(慾望)이라는 단어를 선호했다. 열망(熱望)도 좋아했다. 읽고 있는 서양의 책들에선 낯을 붉히는 단어들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육체적인 단어에 단련된 시각의 설계자로서 실제의 마음과는 다르게 무심하도록 모든 용어에서 화염을 뿜어댔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A Streetcar Named Desire>를 타고 목표물뿐만 아니라 그 주위의 포진까지 날려버릴 파워팩과 생화학 포탄을 쏠 준비는 이미 끝마치고 있었다. 지글대는 뜨거운 불처럼 내부에서 끌어내는 열정도 한 무더기 구비되어 있었다. 니트로글리세린 (Nitroglycerin) 한 방울이면, 내부의 감정이 무엇이든지 간에 바로 폭발하는 듯한 쾌감을 가지고 곧장 불구덩이로 돌진하는 심미적 성향과 열정적인 욕망은 합이 맞았다. 무엇인가를 고안하고 얌전히 있고 책상머리에 앉아있는 것은 어울리지 않았다.
한자문화권에서 부여한 디자이너의 다른 직업적 호칭인 설계사(设计师) 또한 단어에 맞는 역할을 납득하기에 불충분하다. 설계사는 디자이너와 상반되게, 남성적이고 각진 느낌이다. 기계적인 도형과 수식을 포함한다. 창의적인 감각보다는 형식화되고 경영적인 패턴을 이해하는 사람에게 사용되며, 실제로 현장에서 설계사는 새로운 창작보단 도식된 패턴을 해석하고 운용하는 실행자에 위치에 있다. 고급설계사(高级设计师)라고 붙여서 관련 분야의 직공들을 아우르는 위치로 올라서는 것은 공사판의 현장감독으로 방향을 전환한다. 블루 칼라의 땀 한 방울은 실무 제작에서 필수적이지만 대량 제조의 사회에서 패턴을 이해하는 기계적이고 능률적인 해석능력을 발휘하여 십장들을 아우를 정도로 도식에 능숙해지면 창작력이 사라지는 듯 지루해지고 만다. 냉정한 설계사라는 단어로 변환해도 만족스럽지 않다. 사회적인 단어가 주는 어감 때문인지 보험설계사가 떠오른다. 인간 간에 관계적인 호소가 필요한 보험은 방어적이면서 실제적 사고가 언제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허수가 많아서 체계적이지 않다.
내 안의 기호가 커지던 시기, 그러나 밖으로 나갈 수 없는 기간 동안, 한 자리에 웅크리는 것에 익숙하게 되었다. 외부로 무조건 돌진형이었는데 시선을 돌려 내부를 바라보게 되었다. 가만히 앉아 돌아보니 머리를 쓰는 것은 체질에 맞았다. 그래서 심장이 뭐라 하든 말든 머릿속에 감정까지 몰아넣고 욕망에 욕망하지 않는 상태로 지내게 되었다. 욕망이 쓸모없어져서 그럴 수도 있다. 현재로선 머리에 많은 것이 담겨있다.
설계적인 사고와 감각적인 욕망 사이의 균형은 존재하는가?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기대하는 디자인의 자연스러운 부드러움과 욕망간의 상호 작용은 설계상에서 적용되고 있지 않다. 감각적인 육체와 이성적인 사고는 결합이 가능한가? 대화 몇 마디에도 감지할 수 있는 표피적인 상태와 언어와의 이질적인 불균형이 사람들에게 과연 이 사람이 디자이너인지를 질문하게 하는 것인가 싶다. 간혹 직업적인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나는 디자이너이기도 하고 디자이너가 아니기도 하다. 타인이 바라보는 관점에서 감정에 의존하는 감각적인 디자이너라면 디자이너가 아니다. 내가 바라보는 관점에서 디자이너라면 바로 디자이너이다. 내부에서 의식이 발현되는 디자이너는 육체적인 욕망이나 감각의 결과에 집중하는 것이 아닌, 미래적인 방향의 어릴 적 숨겨진 소망과 다듬어진 생각의 실현을 추구한다. 내부에서는 미래적이고 주체적인데, 외부에서는 육감적이고 피동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디자이너(DESIGNER)라는 단어가 주는 이중적인 괴리감이다. 타인과의 인식의 차이에서 비롯된 사회적 자아의 반항과도 같다. 이것은 자립적 언어가 발생시킨 인식적인 갈등이다. 타인이 나를 어떻게 평가하든, 나는 나이다. 단순히 직업적인 호칭으로 구분될 수 없는 설계적인 사고를 가진 디자이너의 필연적인 거부이자 필수적인 소망은 계속된다.
[Thirsty Day : Designer’s Yearning and Thirst] PHOTOGRAPH by CHRIS